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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12화 (412/488)
  • 412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건, 인간과 비슷한 사상이다. 사실 이종족은 ‘살아남는다’는 개념보다는 ‘살아간다’라는 개념이 더 잘 어울린다.

    하지만 스라소니는 예외였다. 아주 오랜 시간을 인간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남았던 종족이었다. 그 종족을 아주 오래 이끈 유클리드는 말할 것도 없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피시의 시선에 유클리드는 철창 안으로 손을 넣었다. 피시의 뺨 바로 앞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퉁기니, 유클리드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물줄기가 피로 얼룩진 피시의 얼굴을 닦아 냈다.

    “이종족답게.”

    “…….”

    “나타니엘을 선택했다는 건 그런 의미야.”

    인간처럼 살아남기 위해 배신과 신뢰를 일삼겠다는 게 아니라, 이종족처럼 살아가겠다고. 그녀를 선택해 삶과 죽음 속을 살아가겠다고. 그런 의미였다.

    피시는 제 얼굴 곳곳에 들이닥친 유클리드의 능력이 피로 엉망이 된 환부를 깨끗하게 닦아 내고 있음을 느꼈다. 스라소니답지 않은 온기와 배려에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꼬마 하이에나 왕자님. 더 다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꼬마라니…… 꼬마 아니에요. 그리고 왕자가 아니라 남작이에요. 폐하께서 직접 수여하셨고요.”

    “내 눈엔 한참 어린 거 맞는데.”

    분하지만 유클리드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저쪽은 나이를 세는 게 무의미한 삶을 살아왔으니까. 그런 피시의 표정을 읽은 유클리드가 낄낄 웃더니 피시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곤 돌아섰다.

    “애 키우는 기분이네.”

    계단을 오르던 유클리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자식을 봤던 게 언제였더라. 어차피 다 죽어서 기억도 안 나지만. 그렇게 까마득한 과거를 헤집다가 혀를 차곤 다시 계단을 올랐다.

    *

    “레온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나가 봐.”

    “하지만……,”

    “그만. 나가 보라고 했을 텐데.”

    레온의 싸늘한 말투에 란트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레온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지만 이쯤에서 돌아서야 했다. 최근 들어 더 예민해진 레온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아무리 측근인 란트라 할지라도 무슨 벌을 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쉬십시오, 후작님. 혹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곧장 불러 주십시오.”

    의자에 앉아 이마를 꾹꾹 누른 채 그만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여전히 걱정이 가득 묻은 란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그제야 찾아온 적막에 레온이 눈을 깊게 감고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노아가 로를 데려왔다. 이엘의 곁을 지켜야 할 그가 어떻게 로를 만나 데려왔는지 묻고 싶은 게 가득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레온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다짜고짜 본체화를 한 로의 갈기가 엉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된다. 왜 로의 갈기가……. 로의 갈기는 멀쩡했는데?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은 로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다. 연구소에 갇혀 누군가 자신을 구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그 시절의 제 모습이 저곳에 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곧장 전쟁부터 준비했다. 영지전이 된다면 황실과 성전에 허락을 받아서라도 처절하게 진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레온은 예상치 못한 단서를 발견하게 됐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레온은 서랍에서 꺼낸 유리병들을 차례차례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두 5병. 한 병에 담긴 기름의 양을 계산해 볼 때, 이건 상당수의 늑대를 죽여 가며 억지로 뽑아낸 기름인 게 틀림없었다.

    제 앞에 로를 데려왔던 노아의 반응을 보면 그는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종족들은 제국이 새로 세워진 이후로 개체수에 더 예민해졌기 때문에, 종족의 수장인 노아가 이런 일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기름의 주인은 노아의 영지에 살고 있지 않은 떠돌이 개체이거나, 혹은 티 나지 않게 수년에 걸쳐 은밀하게 납치된 개체일 것이다. 노아가 모르게.

    이게 무슨 의미일까.

    “타이곤의 갈기…….”

    로를 떠올리며 짧게 침음했다.

    “늑대의 기름.”

    레온의 손가락이 기름이 담긴 병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여기에 독수리의 눈알까지 더해졌다면.”

    타이곤의 갈기. 늑대의 기름. 그리고 독수리의 눈알.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레온은 기름이 담긴 병을 손에 꽉 쥐며 미간을 좁혔다. 언젠가 이엘에게서 들었던 그 세 가지 제물……. 그녀의 오빠인 아르세니온을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하다던 그 세 가지 제물.

    그렇다면 누군가 저것들을 의도적으로 모으고 있다는 건가? 대체 누가? 그걸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올리세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올리세스. 사실 로빈일 확률도 높았지만 그는 최근에 스완으로 인해 영지가 엉망이 된 상태였다. 온갖 더러움을 끌어모으던 소모라 땅까지 정화된 터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 로빈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뱀은 늘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했다면 정탐꾼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올리세스뿐인데…….

    며칠이 지나 안정을 찾은 로를 통해 납치범들에 관해 물었지만 로가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이 늑대의 기름병도 우연히 발견된 것들이었다. 그나마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려던 것을 란트가 혹시 모른다며 챙겨서 가져온 덕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기름병이 발견된 곳에 로를 데려갔지만, 로는 자신이 납치되었던 곳이 이곳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냥 우연인 걸까. 아니면 곳곳에 산재한 걸까.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으니 또다시 두통이 밀려왔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이윽고 레온의 손에 잡힌 건 포필렌이 담겨 있는 병이었다.

    “……제발.”

    이엘에겐 포필렌을 끊겠다고 말했지만 재배를 멈춘 건 아니었다. 다만 전보다 재배지의 면적을 축소했고, 레온이 복용을 멈췄기 때문에 버리는 양이 더 많았다. 그의 충성스런 부관인 란트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 매번 포필렌을 따서 이렇게 병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려 두곤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약병을 그러쥐었다. 이 꽃의 중독성이 심하다는 걸 이제야 느낀다. 복용할 때는 몰랐는데 한번 끊어 버리니 그 강도와 주기가 전과 비교할 수 없어진 것이다. 예전엔 밤마다 찾아왔던 통증이었는데, 지금은 한낮에도 습관처럼 고통이 찾아왔다. 그것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강도로.

    결국 레온은 뚜껑을 열어 포필렌을 입 안에 넣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통증이 심장을 치고 지나가듯 크게 폭증했다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책상에 엎드려 땀을 뻘뻘 흘리던 레온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제 뿌연 시야 안에 이엘이 보이는 것 같았다.

    ‘레니.’

    나타니엘…….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뜨거운 숨을 내뱉는 제 머리 위에, 흐릿한 인영이 손을 뻗어 얹었다.

    ‘레니. 내 아가.’

    아아……. 나타니엘이 아니라 루나 님이신가? 나를 아가라고 부르는 건 루나 님밖에 없을 텐데. 그 생각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루나를 떠올리니, 그녀의 아들인 노아도 덩달아 함께 생각났다. 늑대의 기름을 노아에게 알려야 하는데.

    너무 오랜만에 포필렌을 복용한 탓인지 예전과 다르게 자꾸만 헛것이 보인다. 마치 이곳이 천국이라도 된 것처럼, 마치 이곳이 제 행복했던 시절인 것처럼. 자꾸만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레온. 내 사랑스러운 아가. 내가 미안해, 우리 아가. 널 세상에 내어놓고 떠나서 미안해.’

    아닌데……. 루나 님은 제게 미안함을 느끼실 필요가 없어요. 루나 님은…… 루나 님은…….

    ‘대신 나는 널 위해 살게, 아가. 내가…… 어떻게든 널 이곳에서 빼내러 올 테니까, 꼭 버텨. 조금만 버티렴, 레온. 금방 데리러 올게.’

    무슨 소리지? 날 빼내다니? 어, 어디를 가신다는 거죠? 루나 님! 절 두고 어디를 가시려는 거예요?! 덜덜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루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온몸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흐릿했던 인영이 또렷해지고 있다. 레온은 필사적으로 제 앞에 아른거리는 그녀를 잡기 위해 몸을 발버둥 쳤다.

    그러나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힌 것처럼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게 돼 버렸다.

    ‘레온. 네 이름은 내가 지었어. 넌 호랑이의 피가 섞였지만 틀림없는 내 아이야. 그러니까 용맹하고 단단한 사자로 자라렴. 부디 네게 갈기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 부디 네가…….’

    ‘…….’

    ‘……네가 그들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

    ……루나 님이 아니야. 루나 님은 검은 머리카락도, 검은색 눈동자도 아니야. 레온은 제 앞에 있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대체 뭐지? 백조의 환각인가? 아니면 이것도 포필렌의 부작용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내 기억인 걸까.

    레온의 눈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높은 콧대 위로 뚝 떨어졌다. 그 고였던 눈물이 다시 콧잔등을 지나쳐 책상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에 선 사람 때문인지. 이유 없이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 널 두고 떠나야만 하는 나를…… 부디 용서하지 마.’

    굽이치는 금발이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레온을 꼭 닮은 금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레온은 그제야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

    ‘레니, 내 아가. 안녕.’

    ‘어머니! 잠깐만요, 어머니!’

    거짓말. 거짓말이야.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내 환영 속에 나와요? 왜 하필 이런 환영 속에서 당신이 나오는 거야? 레온은 움직일 수 없는 몸에 힘을 주며 사라져 가는 제 어머니의 뒷모습만 간절히 바라보았다.

    이건 나의 기억일까? 아주 어릴 때, 태어나자마자 날 버려두고 연구소를 도망쳤던 그 어머니의 기억인 걸까?

    린다. 저 환영 속 여자는 제 어머니 린다였다. 자신을 낳고 연구소를 빠져나갔던 어머니는 저런 모습이었을까? 강인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는 주변의 증언과는 달리, 레온의 눈앞에 선 그녀는 빼빼 말랐고 창백한 얼굴 곳곳엔 보랏빛 멍이 가득했다. 하나도 강해 보이지 않아. 그저 평범한 이종족일 뿐이다.

    마냥 원망만 했었다. 자신을 버린 그 여자와 남자를 원망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자신을 가지고 낳아야만 했던 두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옹졸한 마음으로 그들을 미워했다.

    그나마 아버지인 발레리안은 자신의 탈출을 도와 제 친구들이었던 노아와 루나에게 맡겼다지만 어머니는? 그녀는 날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미워했으며 증오했을 거라고, 그렇게 한평생을 원망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왜? 왜 하필 이런 때에……,

    “아……. 이제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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