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엔리케가 설명하는 곳이 어딘지 안다. 이엘은 들고 있던 펜던트를 열었다. 꾸깃꾸깃 접혀 있는 종이의 한 귀퉁이가 검게 타 있었다. 아마도 이곳을 확인하기 위해서였겠지. 독수리의 눈으로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곳에 뭐가 있었나?”
“보호석이요.”
“보호석?”
“예. 허가받지 않은 보호석들이 땅 아래에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
“양이 상당했습니다.”
엔리케의 그 말에 뒤에 있던 노아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로빈 같았던 것이다.
로빈이 세잔티노에 보호석을 가득 모아 저장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로빈은 그 보호석을 나자르에게 흡수시켜 완전한 나자르를 만든 다음, ‘그’를 불러내고 바치는 데에 쓸 계획이었다. 물론 스완이 세잔티노를 정화하는 바람에 다 소용없어졌지만.
“폐하.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그래. 그것 때문에 피시가 잡혀간 건지도 몰라. 일단은 피시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를 구출한 뒤에 알아보도록 하지.”
이엘은 다시 한 번 엔리케에게 당부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차게 대답하곤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포르 자작의 영지로 향한다. 그곳에서 준비를 할 테니, 러셀 후작. 그대는 먼저 제 1, 2기사단과 함께 출발해 자작령에 있는 영지민들을 그대의 영지로 피난시키도록 해라. 오드 님. 당신은 러셀 후작과 함께 가 주세요. 영지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포르 자작령은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군의 영지였고, 영지민의 숫자가 제일 적은 곳이기도 했다. 피난시킬 수 있을 만한 인원이었기에 그곳을 사용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일라이저와 2기사단은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1기사단의 등에 올라탄 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우리도 출발하자.”
이제 정말 최종장에 들어섰다.
*
믿는다. 분명 폐하가, 그리고 오드 님이 반드시 날 찾아내 주실 것을 믿어. 피시는 피딱지가 앉은 눈을 겨우 떠서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누군가의 어깨에 업혀 이동 중이었다. 예상이 맞다면 리노 윌터가 잡혀 있는 그 마을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그사이에도 피시는 몇 번씩 기절했지만 죽지 않기 위해 정신력으로 버텨 냈다. 그는 제 품속에 있는 보호석을 떠올리며 간절히 바랐다. 부디 패티스가 이 보호석의 존재를 깨달아 주길. 그래서 이엘과 오드가 보호석의 결계식으로 제 위치를 알아내 주길.
며칠이 더 지나 피시는 눈이 가려진 상태로 어떤 장소에 도착했다. 피시가 기절했다고 생각한 인간들은 그 상태로 피시를 축축한 곳에 집어 던진 채 문을 잠그고 사라졌다.
피시는 눈을 감고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다행히 이곳엔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래서 순식간에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변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끊었다.
“여긴 어디지…….”
온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공간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변한 덕에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은 끊어졌지만 손발을 옥죄고 있던 쇠사슬은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덩치가 커진 탓에 되레 움직임에 제한이 생겼다. 결국 피시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길 어떻게 나가지…….”
혹시 몰라서 능력을 사용하려 했지만 역시나 불가능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 보호석이 있는 듯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커다란 철창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생각에 무력해져 구석에 쓰러진 채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이대로 폐하께서 오실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안 되는데……. 여기서 확인할 게 있는데. 여기가 리노 윌터가 갇힌 그 마을이 맞는지도 확인해야 하는데……. 차라리 올리세스가 자신을 보러 오면 좋겠다. 그럼 그를 홀려서라도 이곳을 나갈 기회를 엿볼 텐데. 하다못해 조력자라도 있으면…….
“뭐야. 진짜 왔잖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재빨리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곤 경계 태세를 갖췄다. 금방이라도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피시의 모습에 상대방이 더 놀라며 두 손을 내밀고 그를 진정시켰다.
“이봐, 진정 진정!”
“누구야!”
“나라고. 네 아군.”
어둠 속에 스며들어 있던 인영이 횃불을 든 채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끝부터 천천히 시선을 올라가며 정체를 확인하던 피시는 미간을 좁히며 눈을 크게 치떴다.
“……유클리드 백작?”
“그래, 그래. 나야. 유클리드.”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보다시피 임무 수행 중이었거든.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유클리드의 말에도 피시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경계를 풀지 못했다. 유클리드는 그 반응에 당연하다는 듯 어깨만 으쓱일 따름이었다. 둘은 이전에도 대화란 걸 나눠 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사실상 서로 대면한 게 지금이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저를 못 믿는 것도 당연하다.
“뭐, 그걸 남작이 믿든 말든 그건 나랑 관계없고. 폐하께서 남작이 이곳에 올 테니 반드시 구출하라고 명령하셨거든. 그러니까 남작은 얌전히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나중에 나와 함께 나가면 돼.”
“폐하께서……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아셨군요.”
“그래. 남작이 갖고 있는 보호석. 그게 위치를 알려 줬다고 하던데. 남작의 동생이 폐하께 알렸다더군.”
역시 패티는 똑똑해……. 똑똑하고 섬세하다. 제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세잔티노 때 이미 보호석을 주었던 것이다. 제 동생을 떠올리며 피시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건지 손발이 묶인 채로 바닥을 기어 철창 가까이 다가왔다. 그 모습에 유클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새벽에 다시 올게. 그거 끊을 만한 걸 찾아서.”
“잠깐만요, 백작님.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요.”
“뭔데?”
“여기가 리노 윌터가 있는 곳이 맞나요? 이 마을에 리노가 있어요?”
“용케 맞혔네? 맞아. 여기가 리노 윌터가 갇혀 있다던, 이교도들이 가득한 그 마을이야. 폐하께서 내게 내리신 임무는 여기서 리노를 탈출시키는 거였고.”
피시가 유클리드를 믿지 않는 것과는 달리, 이엘은 그를 꽤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유클리드에게 맡긴 것만 봐도.
“그래서 리노는 찾았나요?”
“아직. 위치는 파악했는데 접근이 쉽지 않아. 난 여기에 숨어든 게 아니라 올리세스의 동맹으로 허가받은 입장이거든. 아직까진 그 관계를 깨뜨리면 안 돼서 몰래 접근할 수도 없는 상황이야. 리노는 남작처럼 이렇게 비교적 접근이 쉬운 곳에 있지 않아서.”
녹색 탑. 그 탑으로 가기까지가 만만치 않았다. 유클리드가 이 마을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곳은 제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전쟁이 터졌으니,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다.
만약 이엘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더라면 유클리드는 그냥 제 성미대로 탑으로 쳐들어가 리노를 납치해 탈출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답답한 상황이 며칠째 이어지던 중에, 독수리를 통해 그녀가 명령을 전했다. 리노가 아닌 피시의 탈출을 우선순위에 두라는 명령을.
“그러니까 남작. 사고 치지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여의치 않으면 리노고 뭐고, 난 남작만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 입장이니까.”
“폐하께서 리노를 포기하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남작이 우선이라고 하셨어. 사실상 전쟁이 선포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거든. 여기 밖만 나가 봐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올리세스가 소유하고 있는 영지, 특히 이렇게 바다와 맞닿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간 가짜 사제인 아스타로의 교리대로 사람들은 천천히 세뇌되어 갔던 모양이다. 그들은 올리세스를 위해서라면 온몸을 바치겠다며 선언하고 나섰다.
“막아야 해요. 이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된다고요.”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폐하께서도 원치 않으시잖아요.”
“하지만 필연적으로 전쟁이 터지는 순간이 와. 그건 막을 수 없어. 폐하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인 이상, 르뷔아 황실의 유일한 핏줄인 이상. 그리고 황위에 오르신 이상, 이런 시간은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선 겪어야만 하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피시는 안다. 모든 유형의 전쟁에서, 지키고 싶은 게 많은 쪽이 잃는 것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올리세스는 위험한 짓을 꾸미고 있어요. 그걸 막아야만 해요.”
“그게 뭔데?”
“그건…….”
“나한텐 말하기 어렵다는 거야? 뭐, 그럴 수 있지. 이해해. 어쨌든 남작은 그것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거지? 확인할 게 있어서.”
“맞아요.”
“좋아. 내가 시간을 벌어 주지.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 준비해 줄 테니까. 다만 오래는 안 돼.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계획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해결해.”
“백작님은 정말…… 저희 편이신가요?”
“아니. 내가 왜 늑대나 하이에나 같은 것들과 같은 편이 되어야 하지?”
피시의 말에 유클리드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강하게 부정했다. 끔찍한 얘길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절 왜 도와주시는 건데요?”
“내가 남작을 도와준다고 생각해?”
“…….”
“내가 돕는 건 남작이 아니라 폐하야. 나타니엘이라고.”
설마 마을 밖에서 대기 중인 이카르 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저희를 돕고 있다고 착각하면 곤란한데. 다른 종족을 돕는 건 스라소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그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결정할 뿐이다.
“그저 너희가 폐하의 편에 선 덕에 내 도움을 받는 것뿐이지.”
“그럼 폐하를 배신하지 않을 건가요?”
“대체 그딴 실용성 떨어지는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이런 상황에 누가 누굴 신뢰하고, 누가 누굴 배신한다는 거야. 그런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잖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배신이고 신뢰고, 다 이용할 수 있는 대로 써먹어야지.”
“…….”
“……라고 얘기했겠지? 예전의 나는.”
유클리드는 그렇게 답하며 지하 감옥 곳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피시는 제 질문에 대한 뜬금없는 답을 한 유클리드가 대체 뭘 하는지 쳐다봤다. 그는 감옥 안 구석구석을 누비며 샅샅이 뒤지다가 몇 번 탄성을 지르며 뭔가를 발견해 손에 쥐었다.
“……백작님?”
“이게 끝인가?”
유클리드는 피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손에 쥔 것들을 조작하더니, 곧이어 다른 쪽 손을 바닥을 향하게끔 뻗었다. 그러곤 손끝에 능력을 몰아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유클리드의 손에서 똑똑 떨어지던 물이 순식간에 콸콸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호석은 이게 다였나 본데? 남작. 한번 능력을 써서 그 쇠사슬을 풀어 봐.”
보호석을 찾아낸 건가? 유클리드의 이상행동에 해답을 찾은 피시는, 고개를 끄덕이곤 눈으로 제 손발을 묶은 사슬들을 쳐다봤다.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 너무 과하게 사용하면 또 폭발할 테고, 그렇게 되면 발각될지도 몰라. 피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적은 범위에 커다란 힘을 순간적으로 가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피시는 눈으로 쇠사슬을 바라보며 손목을 이리저리 둘려 움직일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가상의 구를 만들어 그 안에 능력을 불어넣듯,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손목과 사슬의 틈 사이에 끼웠다.
퍽! 가벼운 폭음과 함께 피시의 손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툭 끊어졌다.
“뭐야? 듣던 것과 다르네. 제어도 못 해서 능력은 아예 쓸 줄도 모른다더니.”
되레 피시보다 유클리드가 더 놀란 듯했다. 여차하면 자신이 능력을 사용해서 막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게 피시는 깔끔한 염력으로 사슬을 끊었다.
“이렇게 제어도 잘하면서 대체 왜 폭주한 거야? 설마 이 마을로 들어오려고 놈들에게 잡힌 거야?”
“맞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절 좀 도와주세요. 조금 전에 제가 물었던 질문이요.”
“…….”
“과거의 당신은 그딴 질문을 왜 하냐며 따졌을 거라고 했죠. 그러면 지금의 당신은요? 지금의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