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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09화 (409/488)
  • 409화

    아. 허를 찔린 듯한 패티스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잊고 살았다. 백조와 이엘이 했던 영혼 결속의 계약.

    우습게도 1년 전만 하더라도 패티스는 그 계약을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깨지기만을 고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스완은 성력과 예지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엘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스완과 그의 능력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연장할 수는 없는 건가?”

    “네, 그건 어려워요.”

    “그러면 고니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그것도 없는 건가?”

    “저희로서도 그건 몰라요. 이 저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풀리기는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걸요.”

    사실 계약이 끊긴다고 해서 곤란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일단 이엘과 스완의 목숨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패티스에겐 지켜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게다가 스완이 쓸 수 있는 성력은 공격용보다는 방어용에 더 적합했기 때문에, 사실상 전투에선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완은 본래 물에서 사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게 본인에게 더 좋을 것이다.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인공 호수에 들어가곤 하니까. 모쪼록 이 계약은 파기되는 게 서로에게 이로울 터였다. 패티스는 희망 없는 곳에 쓸데없이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단념했다.

    “알겠다. 그럼 넌 최대한 이쪽 일을 마무리하고 너희 호수로……,”

    “아뇨. 그게 아니라 드레인에게 가려고 해요.”

    “뭐? 드레인?”

    “거긴 여기와 다른 세상, 다른 공간이잖아요.”

    아, 그걸 잊고 있었다. 드레인이 있는 곳은 여기와 다른 시간이고 공간이었다. 테런스 포르의 딸들이 성장하지도 않고 눈을 감았던 그 상태 그대로 잠들어 있는 것처럼. 그 얘기는 곧 스완이 그곳으로 들어가도 계약이 유효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가 드레인의 영역에서 보조하겠습니다. 거기라면 폐하와 연락도 주고받을 수 있고, 성력과 예지도 컨트롤이 더 쉬워져요. 옆에 드레인이 있으니까요.”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나?”

    “아뇨. 아직 말씀 못 드렸어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인데, 확신이 없어서요.”

    “그걸 내게 말했다는 건. 마치 내가 네 의견에 지지라도 해 주길 바란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정확해요. 제가 맞다고 말해 주세요. 패티스 님이 확신해 주시면 정말 괜찮을 것 같거든요.”

    스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패티스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근에 널 상대해 줬다고 내가 피시처럼 느껴지기라도 하나?”

    “…….”

    “헛소리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선택은 네 몫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네 몫이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도리어 스완은 만족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질 않나. 스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됐으면 이제 그만 네 침실로 돌아가. 나도 쉬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사실 스완은 그곳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가벼운 묵례를 하곤 패티스의 침실을 나가 버렸다.

    달깍.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침실이 고요해졌다는 생각에 패티스가 짧게 웃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이 굳었다. 스완의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 누구보다 혼란스러운 건 자신과 하트일 것이다. 어쩌면 현장에 있었을 하트는 더 끔찍한 심정일지도 모르지.

    그는 걸음을 옮겨 침실 안쪽에 있는 문을 열고 와인 창고로 내려갔다. 무의식적으로 가장 독한 와인을 골라 무작정 잔에 따랐다. 차라리 술에 취해 정신이라도 잃어버리면 좋겠건만, 빌어먹게도 자신은 웬만해선 술에 취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렇게 독한 와인을 몇 병이나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아 흐트러진 상태가 되어도 비웃음당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싯피싯 웃음을 터뜨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멍청한 형님. 진짜 끝까지 빌어먹을 형님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음을 열지 말 걸 그랬다. 누님. 조이나, 내 누님. 차라리 늦었다고 하지 그랬습니까. 갈라진 우리 사이를 이어줄 끈 같은 건 없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패티스는 부릅뜬 눈으로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제 눈물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올리세스의 사병들이 모두 철수했습니다. 조금 남아 있던 자들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가서 수색해. 반드시 피시를 찾아내야 한다.”

    “예, 폐하.”

    피시를 무너진 동굴에 버려두고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뒤늦게 몰아닥친 올리세스의 사병들은 하나같이 보호석을 갖고 있었던 터라 상공에 있던 독수리들도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올리세스와 손을 잡은 매가 헤르몬 산을 맴돌고 있던 터라 독수리들이 온전히 하늘을 점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일단은 그들이 후퇴할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엔.

    그리고 이틀이 지나 그들이 헤르몬 산을 내려갔을 즈음, 근위대와 기사단이 남은 자들을 처치하고 피시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하고 급하게 도착한 오드와 일라이저를 본 이엘은 이를 악물며 그들을 반겼다.

    “오느라 고생했어.”

    “폐하. 일단 제 영지로 가셔서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러셀 후작의 말이 맞습니다. 저와 함께 이동해서 그곳에서 좀 쉬세요, 폐하.”

    일라이저의 제안에 오드도 동의하며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일단은…… 일단은 피시를 찾는 게 우선이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물론 피시는 인간과 다른 우논이니 이틀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쓸데없이 이틀이나 시간을 버린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폐하. 독수리가 갔으니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우선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벌써 이틀째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벌써 이틀째 저 지옥 같은 헤르몬 산에 갇혀 있는 이도 있어.”

    “…….”

    “이틀이나 시간을 허비했다고.”

    “어쩌면 회복의 시간이 될지 모릅니다. 폐하, 피시는 우논입니다. 큰 부상이 아니면 이틀이란 시간은 피시가 체력과 부상을 회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엔 없습니다.”

    독수리가 찾아내길. 피시가 버텨 냈길. 제발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피시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귀환을 기다릴 뿐이었다.

    “들어가서 눕기라도 하십시오. 여기서 폐하께서 쓰러지시면 저희조차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

    “곧 있으면 동맹족이 모두 모일 겁니다. 이종족만이 아닙니다. 조르단 공작을 비롯하여 저희 쪽으로 먼저 연락을 전한 원로회도 있습니다. 폐하, 이쪽은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노아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충언에 이엘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그녀는 결국 오드를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가 몸을 뉠 수밖에 없었다. 오드는 램프를 가져와 이엘의 곁에 내려놓곤 그 주변에 성력으로 적절한 온도를 만들어 주었다.

    “폐하. 좀 쉬세요.”

    “미안해. 또 휴식도 없이 급하게 오게 만들었네.”

    “전혀요. 후작의 영지에서 충분히 쉬었는걸요. 이제 폐하께서 쉬실 차례예요. 여긴 저희에게 맡기시고요.”

    이엘은 오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 뒤로 오드가 그녀의 막사를 한참 정리하다가, 곧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막사를 나가 주었다. 한참 웅성거리던 바깥 소음도 줄기 시작한 걸 보면, 그녀의 안정을 위해 막사 주변엔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 모두 떠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이엘은 좀처럼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이 고요함 속에서도 그녀의 귀엔 피시의 능력이 폭주하여 동굴이 무너지던 굉음이 들렸던 것이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참사에, 결국 이엘은 적막을 뚫고 일어나 앉았다.

    수색은 독수리와 기사단에게 맡겼지만 마음 편히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 테이블로 향했다. 그 위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다가 옆으로 치워 두었던 체스 말을 가져와 지도 위 곳곳에 배치했다.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보자.”

    경황이 없어 급하게 달아나느라 놓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엘은 피시가 헤르몬 산에 오기 전의 상황부터 천천히 되짚기 시작했다.

    올리세스 영지의 다음 목적지는 남부 지방이었다. 원래는 헤르몬 산을 통과하지 않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뒤에 합류할 피시를 기다리기에 그곳만큼 좋은 곳도 없을 거라 생각해 헤르몬 산에서 피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엘이 헤르몬 산에 도착하고 이틀이 더 지나서야 피시와 만날 수 있었다. 광활한 대지를 홀로 달려오던 하이에나 피시의 모습을 산 정상에서 확인하곤, 일부 근위대가 그를 맞으러 산을 내려갔다.

    이엘과 기사단, 그리고 하트는 산에서 피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곧바로 들려온 소식은 습격이 닥쳤으니 서둘러 폐하를 모시고 피하라는 비명 소리였다.

    총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산 아래에 있는 근위대와 올리세스의 군사들이 맞붙는 소리였다. 그사이 산 위에 있던 기사단도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상당수가 내려갔고, 하트는 이엘과 노아를 태운 채 일부 늑대들과 함께 산을 올랐다.

    그리고 산 아래서부터 공격을 피하며 달려온 피시가 이엘과 무리를 발견하곤 뒤따랐다.

    ‘피시!’

    ‘폐, 폐하! 피하셔야 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저도 모르겠어요. 올리세스가 다짜고짜 공격을…….’

    말을 다 끝내지 못한 피시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닥에 쓰러졌다. 하트의 등에서 뛰어내린 노아가 재빨리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제 등에 피시를 태웠다. 깊은 상처를 입고 숨을 헐떡거리던 피시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노아의 털을 굳세게 잡았다.

    아마도 피시의 뒤를 밟고 쫓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을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급하게 공격을 하는 거지? 심지어 저쪽에 인원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보호석을 갖고 있어 이종족의 능력을 막는 게 전부였으나, 지금의 근위대는 이종족의 능력뿐 아니라 검과 총을 모두 사용할 수 있기에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힘과 체력이 좋은 편이라 인간들이 더 불리하다.

    산 아래는 여전히 아수라장이었으나 이엘은 자신의 근위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정도 접전은 근위대와 기사단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 터였다. 어수선한 근위대의 대열이 정리되는 순간, 전세는 뒤바뀔 것이다.

    ‘폐하! 매복입니다!’

    상황을 살피러 앞서 달려 나갔던 늑대 중 한 마리가 상처를 입고 돌아와 소리쳤다. 피시의 뒤를 쫓던 인간들보다 더 많은 인원이 헤르몬 산에 매복해 있었고, 저 멀리선 새카만 매 떼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반대편에선 특정할 수 없는 여러 이종족들이 이엘과 무리를 발견하곤 득달같이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올리세스의 편에 선 종족들일 것이다.

    근위대와 기사단을 산 아래로 빼돌리기 위해 덫을 놨던 거군. 그쪽의 소수 인원은 버리는 카드였던 것이다. 올리세스가 곧잘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이전에 영지 시찰을 막 시작할 때, 제도에서도 이런 식으로 공격을……,

    잠깐. 제도?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제도.’

    ‘예?’

    ‘목표는 제도야. 내가 제도로 돌아가지 못하게 이곳에 발을 묶고 그곳을 점령하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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