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그래. 그가 대충 알려 주긴 했어. 위에 엔리케 경이 온 것도 알고 있다.”
이엘이 하늘을 검지로 가리키며 씁쓸하게 대꾸했다. 아마 피시가 스스로 올리세스의 곁에 남아 그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게 못마땅한 듯했다. 그녀라면 완강하게 거절했을 텐데, 그 어린 하이에나가 이엘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노아도 궁금할 지경이다. 어쨌든 그건 차치하고.
“로를 발견했습니다.”
“로? 레온의 아이? 그 애를 어디서?”
“여기서 조금 더 밖으로 나가면 갈대밭이 있습니다. 주변에 인간들의 영지가 있긴 하지만, 각각의 영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라 인적이 드뭅니다. 거기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쓰러져 있었다니, 그게 무슨……. 세세하게 말해 봐.”
“갈기가 뽑혔습니다.”
“…….”
“납치를 당한 후 탈출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간들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잇다가 만 이엘이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짧게 침음했다. 갈기? 타이곤의 갈기를 뽑아 갈 생각을 했단 말이야? 타이곤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그의 주인인 레온이 2차 전쟁 때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죽였는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감히 그 레온의 아이를 건드렸다고.
“그래서 레온 후작의 영지에 로를 데려다주러 다녀왔던 건가?”
“예, 폐하. 죄송합니다. 로가 너무 놀란 듯해서 그대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아니야. 잘했어. 아니…… 잘했다고 말하면 안 될 일이지, 이건…….”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제 2르뷔 제국을 건국한 뒤로 인간들이 이종족을 사냥하던 짓은 당연히 금지됐다. 이종족이 이종족끼리 먹이사슬에 있는 것과 별개로, 인간은 이제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가 있기 때문에 서로를 먹이사슬 관계에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암시장에서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그래서 그 암시장의 관리를 조르단 공작이 감독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레온의 성격을 알 텐데도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 뭔가 목적이 있어서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레온은 뭐라고 하던가.”
“이 일은 자기한테 맡겨 달라고, 폐하께 전언을 부탁했습니다.”
그 말에 이엘이 실소하듯 짧게 웃었다. 좋게 말해서 맡겨 달라는 거지, 사실상 자신이 제국을 다 뒤져서라도 놈을 찾아내겠다는 선포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 얘기를 굳이 노아를 통해 전했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엘의 충신이기에 그녀가 허락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이 일은 레온 후작에게 일임하는 게 낫겠군. 우선 우린 출발하도록 하자. 노아 공, 후미에서 혹시 모를 추격대를 신경 써 주게. 하트 경은 나와 함께 선두에서 이끌고 가도록 하지.”
“예, 폐하.”
하트와 노아는 동시에 대답하곤 각자 자리로 향했다. 하트의 등에 올라탄 이엘은 고개를 돌려 올리세스의 영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아직 피시가 저곳에 있다.
‘안 돼. 널 두고 가는 것까지 내게 바라지 마. 절대로 안 돼, 피시.’
‘확인할 게 남았어요. 금방 끝내고 갈게요.’
‘널 이렇게 이용하려고 남작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준 게 아냐.’
‘제가 선택했어요. 폐하, 제 역할과 제 몫을 제가 선택한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 자처하면서까지 세작 일을 하는 이유가 뭐야? 어차피 올리세스의 곁엔 유클리드도 심어 두었고, 루벤의 조카를 역으로 이용하여 감시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피시가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뭐야?’
피시가 제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꺼내 이엘의 앞에 내밀었다. 잘 세공되어진 펜던트는 시간의 흐름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였다.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듯한데……. 근데 이걸 왜? 뜬금없이 펜던트를 보여 준 피시를 향해 의문을 갖자, 피시가 엷게 웃으며 딸깍 소리와 함께 펜던트를 열었다.
‘제 친구 시모네가 고니의 호수에, 그러니까 스완의 아버지인 빈센트에게 맡겨 주었던 거래요.’
‘아…….’
‘이 안엔 저희 영지 그림이 있었어요.’
그가 보여 준 펜던트 속 그림은 피시가 그토록 사랑하고, 이엘도 사랑에 빠졌던 하이에나의 영지였다. 아주 잠깐 그림을 응시하던 피시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피시는 곧 손을 움직여 펜던트 속 그림을 위로 들춰 올렸다.
‘근데 뒷면에 이런 게 들어 있었어요.’
‘이건…….’
‘네. 윌터 가문의 문양이에요.’
윌터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종이였다. 다 펼쳐도 손바닥만도 안 될 만큼 작은 종이가 꼬깃꼬깃 접혀 펜던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 오래된 터라 종이도 누렇게 변색될 정도였기 때문에 그 위로 적힌 글자들이 상당히 흐릿했다. 하지만 글자는 흐릿해도 그려진 그림은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지도인 것 같았어요.’
‘지도라면…… 설마 여기 지도? 윌터 백작령?’
‘네.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던 거예요.’
‘여기 표시가 되어 있네.’
‘네.’
이게 무슨 뜻인지 알려 줄 수 있는 펜던트의 주인은 죽었고, 펜던트를 전해 준 빈센트는 말해 줄 리 없으니 피시는 직접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이엘과 동맹족은 이곳에서 인질들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피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에 표시된 곳을 홀로 은밀하게 찾아갔지만, 거긴 커다란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아주 낮은 언덕 위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아래로는 잔디뿐이라 영지 사람들도 여유 있을 때나 찾는 그런 흔한 장소였다. 아무리 뒤져 봐도 인질은커녕 뭔가 작은 특이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쩌면 독수리의 눈을 빌려 땅 아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급하게 독수리에게 연락을 해 엔리케를 이곳으로 불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엔리케 경과 함께 조사하고 합류할게요, 폐하.’
‘……,’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폐하도 보셨잖아요, 제가 얼마나 강한지.’
걱정이 가득 묻은 이엘을 달래기 위해 피시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포레스트를 겨우 떼어 놨더니 이젠 피시가 놈의 옆에 있겠다고 나선다. 그게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제 몫을 해내고 싶어 하는 피시의 선택을 막을 권리 또한 자신에겐 없다. 결국 이엘은 그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헤르몬 산을 넘어 이동할 생각이야. 여기서 예정보다 빨리 출발할 거라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그 산에서 널 기다릴게. 합류할 수 있겠어?’
‘네, 폐하. 보고하러 갈게요. 금방 합류하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백작령을 떠나 포르 자작의 영지로 갈 예정이었으나, 현재 포르 자작은 노아의 영지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남부 지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 뒤 동쪽 지방을 돌면 이 긴 영지 시찰도 끝이 날 터였다.
“폐하.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녀의 상념을 깨운 하트의 목소리에 이엘도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출발하자.”
“예, 폐하. 근위대 정렬!”
“예!”
“출발!”
하트의 구령과 동시에 선두에 선 근위대부터 발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기사단과 동맹족이 줄을 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해야 할 일을 전부 잘 마쳤으니 한 고개는 넘은 셈이었다.
*
그렇게 생각했다. 한 고개는 넘었다고, 여기까지 해야 할 일을 전부 잘 마쳤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 이엘은 마주한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넋이 나갔다.
분명 역습을 준비하는 건 이쪽이었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것도 이쪽이었는데.
“폐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피시. 피시가 아직 저곳에 있어!”
“곧 따라올 겁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노아가 피시의 이름을 애타게 소리치는 이엘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재빨리 하이에나의 등 위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하트는 계속해서 무너지는 동굴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듯한 이엘의 뒤에 바짝 붙어 앉은 노아가 손으로 상처 입은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그 손에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폐하. 치료하셔야 합니다.”
“안 돼. 우리끼리 갈 수 없어. 피시가 아직 저곳에 있다고!”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은 몸을 피하는 게 우선입니다!”
“피시가…….”
이엘이 말을 잇다가 말고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켰다. 노아의 말처럼 지금은 제 몸을 숨기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손으로 제 배를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나약한 마음을 접고 단호하게 하트를 불렀다.
“하트 경.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달려.”
“……예.”
“미안해.”
“아닙니다.”
사실 지금 누구보다 뒤를 돌아 무너진 잔해 속에서 피시를 찾고 싶은 건 하트일 터였다. 이엘은 그의 앞에서 슬픔을 꺼낼 처지가 되지 못한다. 괴로움을 참는 이엘을 대신해, 노아가 고개를 돌려 빠른 속도로 무너져 가는 동굴을 응시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아직 정예군이 완벽하게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무턱대고 공격을 퍼부을 줄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저쪽은 완전히 자멸했다. 대체 손실뿐인 습격을 왜 이 시점에서 진행한 거지? 무엇을 위해?
……혹시 올리세스의 영지에서 있었던 화재 사건이 그의 초조한 마음에 불을 질렀던 건가. 노아는 한숨을 삼키며 아직도 자책에 빠져 있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폐하. 우선 산 아래에서 근위대와 합류해야 할 듯합니다.”
“…….”
“지원군도 이쪽으로 오고 있을 테니, 이 밤만 넘기면 됩니다.”
“폐하.”
“폐하!”
하트와 노아가 번갈아 가며 그녀를 불렀지만 이엘의 정신은 아직도 저 위, 무너져 버린 동굴에 있는 듯했다. 두 사람 모두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폐하. 죄송해요.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요.’
피시의 마지막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했다. 이엘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보이는 조금 전의 일을 천천히 되짚다가 제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렇게까지 커질 일도 아니었다. 제 곁엔 근위대와 기사단이 있었고, 헤르몬 산에서 피시를 기다리는 동안 충분히 쉬었기 때문에 그들의 체력에도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방심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했다.
……우리는 피시를 잃었으니까.
“다 알고 있었어. 영지 시찰을 시작할 때 허술한 공격은, 언젠가 벌어질 일의 전초전이라는 걸. 내가 제도로 돌아가기 전에 습격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고.”
“폐하…….”
“하지만 알면 뭐 해. 알아도 이렇게 됐는데.”
“피시는 괜찮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훈련시켰습니다.”
하트가 달리던 발을 멈추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단호하게 정리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겁니다, 폐하. 그러니까…….”
“알겠어.”
“…….”
“기다리자. 피시가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말을 멈춘 이엘은 아직도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 정상을 쳐다보았다. 잃고 후회하는 짓은 주드로 족하다는 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바이다.
“당장 전쟁을 준비해.”
“예, 폐하.”
“제도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영지 시찰도 여기서 끝이야. 당장 동맹군을 소집해.”
이게 마지막이 될 거라고, 이엘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3부 마침
<4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