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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06화 (406/488)

406화

빈센트는 제 아들을 잘 안다. 저렇게 투덜거리는 건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은 서툰 욕심 때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은 스완의 아버지니까.

“그러게. 내가 네 능력을 가져갔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버지?”

“가끔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이 많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왜 하필 내게?”

“…….”

“스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네 몫이야.”

빈센트는 다정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물에 잠긴 제 하체 부분을 가리켰다.

“날 봐. 난 금기를 어긴 대가로 이렇게 페널티를 받아 다리를 못 쓰게 됐잖니.”

“그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적어도 내 친구의 죽음을 알릴 수 있었으니까. 물론 시모네를 구하진 못했지만 말이야.”

억울하다. 억울해서 미칠 것만 같던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 그 감정이 많이 무뎌졌다고 해도 여전히 억울하다. 내게 성력을 줬다면 완전하게 줬어야지.

아니, 적어도 내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됐어야지. 고작 미래에 네가 죽을 거라는 걸 말했다는 이유로 난 내 다리도 잃어야 했는데. 이게 어떻게 억울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후회하지 않는다.

“누구나 선택의 기회를 갖고 있어, 스완.”

“…….”

“그리고 난 네 선택을 존중해. 네가 설령 네 의무를 버리고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끝까지 널 보호할 네 아버지니까.”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버지 같았다. 그 낯간지러운 감정에 스완이 입술을 감쳐물며 한숨을 삼켰다. 난 정말 아직도 철이 없나 보네.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 이렇게 투정을 부리고 있으니……. 그 생각을 한참 곱씹고 곱씹던 스완이 고개를 끄덕이곤 빈센트의 앞으로 헤엄쳐 다가왔다.

그러곤 불쑥 그를 끌어안았다.

“나중에……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죠?”

“…….”

“그렇다고 해 줘요, 아버지.”

“미래의 일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스완이 빈센트의 어깨 위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말없이 아들의 등을 토닥거려 줄 뿐이었다. 섣부른 위로도 할 수 없을 만큼, 스완은 서럽게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흐어엉……. 너무, 너무해애……!”

“넌 정말 아직도 애구나, 스완. 그렇게 울면 어떤 암컷도 네게 관심 없을 거다.”

“어차피 암컷도 없는데요, 뭐! 흐윽……! 아버지이…… 미안해…….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엘과의 계약은 이제 고작 한 달 남짓 남았다. 이 기간이 끝나면 이엘과 스완의 영혼이 묶인 계약은 끝난다. 그렇게 되면 스완은 전처럼 이 호수에 발이 묶이겠지. 나자르의 저주와 보호는 아직 깨진 게 아니니까.

하지만 피할 방법이 하나 있다. 계약이 깨져도 이곳 호수에 돌아오지 않고 이엘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

“최대한…… 최대한 아버지 옆에 있고 싶었어요……. 시간이, 아버지, 흐윽……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래. 알아.”

“내 아버지로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나 낳아 줘서 고마워요…….”

“널 낳은 건 내가 아니라 네 어머니 소피아야.”

“아이, 참! 여기서까지 그럴 거예요?!”

코를 훌쩍거리며 품에서 떨어진 스완이 미간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그제야 빈센트도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 부자한테 이런 분위기는 안 어울려∼ 그렇게 농담을 던진 빈센트는 스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아프지 말고 건강히 잘 지내. 네 몫을 잘하길 바라, 스완. 넌 우리 가문의 자랑스러운 백조야. 오랜 시간 우리가 품고만 있었던 성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유일한 백조.”

“…….”

“내가 네 곁을 떠나도 많이 울진 마. 딱 소피아가 죽었을 때만큼만 울어. 안 그러면 네 엄마 서운해할지도 몰라.”

“……알겠어요.”

“그럼 이제 얼른 떠나. 작별 인사까지 마쳤으니까.”

두 사람 모두 직감했다. 지금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지금 떠나면 스완은 한동안 이 호수로 돌아오지 못할 테고, 그사이 빈센트의 수명은 다하겠지. 이게 정말 마지막 순간이다. 스완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곤 씩씩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갈게요. 잘 지내요, 아버지.”

“어, 그래. 잘 가라.”

“다녀올게요.”

“…….”

“꼭 올 테니까…… 아냐. 기다리지 마요. 언젠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요. 신의 곁으로 돌아가면 우리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갈게요. 안녕.”

그 말을 하곤 곧장 몸을 돌려 호수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미련을 두면 안 된다. 마음먹었을 때 바로 떠나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내 미련이 될 테니까……. 마음을 굳게 먹은 스완은 눈물을 다 닦고 백조의 모습으로 돌아가 호수를 헤엄쳐 나가는 속도를 높였다.

기한은 한 달. 영혼을 묶는 계약은 한 백조당, 한 번의 계약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약의 연장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기한이 끝나면 꼼짝없이 돌아와야 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계약을 끝내지 않는다면? 마치 시간을 멈춘 것처럼, 기한을 남겨 두고 멈출 수 있다면.

“드레인. 마음의 준비를 마쳤어. 이제 널 만나도 될 것 같아.”

드레인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것. 그녀의 능력에 갇힌 두 소녀들처럼, 스완도 그곳에 들어간다면 시간을 멈출 수 있다. 이곳과 그곳은 다른 세상이니까. 지금처럼 자신의 꿈에 섞여 드레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테런스 포르의 두 딸들처럼 육체까지 전부 드레인의 능력으로 넘어가면 된다.

그렇게 하면 계약 기간을 연장하지 않고도 뭍에 남을 수 있다. 이 호수로 돌아오지 않아도 돼.

“……아버지.”

저를 보며 인사하는 고니들을 뒤로한 채 한참 헤엄쳐 뭍 근처까지 나왔을 때였다. 끝에 다다랐을 때, 스완은 자꾸만 뒤를 돌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뒤만 돌면 아버지가 저를 따라와 있을 것만 같아서.

“…….”

그러나 돌지 않았다. 여기서 뒤돌면 영영 이 호숫가에 매이게 된다. 드레인을 만나고, 이엘의 아이를 지키는 일 따윈 다 제쳐 두고. 빈센트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걸 포기하고 여기서 내 종족과 평화롭게 지내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스완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호수를 나왔다. 땅을 발로 밟고도 그는 뒤돌지 않았다. 비록 아버지는 이제 영영 못 만나겠지만. 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진 못하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내 선택은 내 몫이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스완은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헤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

아무리 빨리 달려도 레온의 영지에 들렀다가 올리세스의 영지에 도착하려면 이틀은 잡아야 했다. 로를 만난 건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이엘에게 보고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비웠지만 노아는 최대한 빨리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올리세스의 영지로 돌아오던 차였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게 됐다.

“엔리케 경. 대체 경이 여긴 어쩐 일이오?”

“하이에나로부터 연락을 받고 윌터 백작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상공을 날던 독수리가 노아를 발견하고 땅으로 내려왔다. 그는 르네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궁수대의 부대장인 엔리케였다. 이엘이 아끼는 새끼 독수리 메이슨의 조부이기도 한. 엔리케는 자신이 향하는 방향과 노아가 향하는 방향이 같음을 알고, 최대한 빨리 도착하기 위해 노아를 제 등에 태워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공작님. 왜 폐하의 곁에 계시지 않고 이곳에 계신 겁니까? 혹시 폐하께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폐하께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긴 했소. 그 문제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근데 하이에나가 경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패티스 백작이 부탁한 일이오?”

“패티스 님이 아니라 피시 님이십니다.”

“피시?”

피시라면 지금 이엘과 함께 올리세스의 영지에 있을 터였다. 그가 언제 독수리에게 연락을 하고 도움을 청한 건지 줄곧 같이 있었던 노아도 알지 못했다.

“백작령에 의문이 드는 곳이 있는데 저희의 눈으로 한번 확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보호석이 있으면 독수리의 투시 능력으로도 확인하지 못할 텐데.”

“예. 그래서 보호석을 일시적으로 해제시켜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피시가 왜 이엘을 만나기 위해 자신들을 찾아왔는지, 아직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백작령에 도착하자마자 올리세스와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고 그게 표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올리세스의 음욕에 적당히 놀아 주고 있는 건지 동맹족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만큼 피시는 백작령에서 동맹족보다 올리세스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피시가 뭔가 알아낸 건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크리스와 인질들을 찾기 위해 영지를 수색했던 것처럼 피시 역시 올리세스의 영지에서 뭔가 찾아내려 방문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 올리세스에게 접근해 보호석을 비활성 상태로 돌려놔, 독수리가 상공에서 능력으로 투시할 수 있게 한 건지도 모르고.

“그럼 나는 여기서 내려 주는 게 좋겠군.”

“그러겠습니다.”

말을 마친 엔리케가 부드럽게 땅으로 활강해 너른 평야 위에 노아를 내려 주었다. 그러곤 가벼운 인사를 마친 뒤 독수리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시 땅을 밟은 노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윌터 백작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침을 밝히는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작저에 사고가 생긴 지 하루가 지난 셈이었다.

지금쯤 지하 창고에서 인질들이 탈출했다는 것을 올리세스도 알아차렸을 텐데, 혹여나 이엘과 동맹군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까 노아는 초조함에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둑했던 밤하늘이 떠오른 태양으로 인해 완연히 밝아졌을 때, 노아는 윌터 백작령의 권역 경계선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 중심에 있던 건 하이에나의 등에 올라탄 이엘이었다.

“공작. 늦지 않게 돌아왔군.”

“폐하. 어찌 이렇게 다 나와 계십니까. 백작저는 어떻게…….”

“그보다 인질들은 러셀 후작에게 잘 인계했나?”

“예, 폐하. 죄송합니다. 바로 보고를 드렸어야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하루를 넘겼습니다.”

“괜찮아. 잘 인계했다면 그쪽은 괜찮다. 근데 급한 일이란 게 뭐지?”

노아는 정신없는 무리들을 쳐다보며 혹여 올리세스가 있을까 확인했다. 이엘은 짧게 웃으며 노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안심하라며 안도시켰다.

“영지가 엉망이 됐기 때문에 내가 더 머무를 수 없겠다고 말했어. 윌터 백작도 아쉬운 듯했지만 잡을 수는 없었던 건지 수긍했고. 그래서 조금 전에 다음 영지로 출발하기 위해 나왔던 거야.”

그녀의 말처럼 그곳엔 동맹족인 기사단과 근위대뿐이었다. 그들이 모두 괜찮은지 대충 눈으로 훑어보던 노아가 누군가의 부재에 미간을 찌푸렸다.

“피시는…….”

“피시는 여기 남았다가 늦게 합류하기로 했어.”

“폐하. 피시가 왜 여기 왔는지, 폐하께선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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