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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05화 (405/488)
  • 405화

    하지만 풀다 보니 평범한 천이 아닌 듯하다. 이건 천이 아니라…… 물에 젖어 축축해진 종이잖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이딴 식으로 애를 괴롭혀?

    노아는 이를 빠득 갈며 거의 찢다시피 종이를 손으로 잡아 뜯었다. 물에 젖은 탓에 꽤 질겨져 있었지만 이 정도 끊어 내는 건 제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노, 노아 니임……! 어, 어떻게 여기에……커헉!”

    “로. 숨을 쉬어라. 천천히 호흡해. 괜찮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노아를 발견하고 숨이 멎을 것처럼 헐떡대며 울던 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노아는 엉망이 된 로의 얼굴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동시에 다른 손으론 소년이 안심할 수 있게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거려 주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벌벌 떨던 로가 차츰 진정해 가는 게 눈에 보였다.

    “로. 이제 정신이 들어?”

    “노, 노아 님……. 어떻게 여기 계세요……? 호, 혹시 폐하께서도 여기 계세요?”

    “그래. 난 잠깐 순찰을 나왔다.”

    노아의 말에 로의 두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로는 당장이라도 이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 모습을 딱하게 쳐다보던 노아가 다시금 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소년을 달랬다.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지? 로, 말해 보거라.”

    “몰라요. 갑자기 납치를 당해서…….”

    평소 레온의 심복 노릇을 해 왔던 터라 영지 간 문제가 생길 때마다 레온의 말을 전하러 가는 것도 로의 역할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레온이 시켰던 심부름을 이행하기 위해 찾아가던 길이었다. 역습을 당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로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흐윽…… 저, 저 어떡해요, 노아 님? 어, 어떡하지요……. 흐윽!”

    “로. 괜찮다. 울지 말고 천천히 설명해 봐. 내가 안전하게 레온에게 데려다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응?”

    노아는 마치 제 새끼라도 된 양, 로를 품에 안아 올린 채 다정하게 등을 토닥거렸다. 늘 저만 보면 덜덜 떨며 겁부터 먹던 로였는데, 지금은 저가 처한 상황이 무섭고 두려웠던 탓인지 로는 노아의 품에 파고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가 소년의 울음으로 축축해질 즈음, 로가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빼, 빼앗겨서어……. 흐윽! 이,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뭘 빼앗겼다는 건가? 내가 되찾아 줄 테니까 말해 봐.”

    “가, 갈기를…….”

    “…….”

    “갈기를 빼앗겼어요……. 흐끅!”

    로의 말에 노아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주 잠깐 로의 종족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던 노아가 이를 악물며 한숨을 겨우 삼켜 냈다.

    “안 되는데…… 갈기를 뺏기면 안 되는데…… 흐어엉…….”

    “울지 말고 날 잘 봐, 로.”

    아직도 엉엉 우는 로를 바닥에 내려 준 노아가 로의 양쪽 어깨를 붙들며 시선을 제게 향하게끔 했다. 눈물에 젖어 시야가 탁해진 로는 입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리고 훌쩍거리더니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었나? 널 이렇게 만든 놈들.”

    “아, 아마도요…….”

    “아는 사람은 아니었어?”

    “네…….”

    “갈기만 빼앗았어?”

    “네. 제가…… 타이곤이란 걸 알고 저를 겁박해서 본체화를 하게 만들었어요.”

    보호석으로 무장한 인간들을 고작 이 어린 이종족이 이길 수 있을 리가. 로는 겁에 질린 채 본체화를 했고 인간들은 로의 갈기를 무자비하게 뽑고 뜯어 갔다. 그러곤 이렇게 머리와 온몸을 감싸 결박해 놓은 것이다. 능력을 써서 결박한 줄과 종이를 태우지도 못하게.

    “로. 그럼 넌 도망친 것이냐.”

    “마, 맞아요. 도망쳤는데…… 어, 어디서 도망쳐 왔는지 방향을 모르겠어요.”

    “알겠다. 괜찮아, 일단 진정해.”

    노아는 로와 대화하던 중에 소년의 목에 걸린 보호석이 비활성 상태로 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허가받지 않은 코드인 걸 보니 황실로부터 소유하도록 허락된 보호석이 아니라, 스완의 호수와 같은 곳에서 떠오른 무허가 보호석인 듯했다.

    이걸 발동하는 순간 나자르인 오드가 무허가 보호석의 사용을 눈치챌 테니, 어린 로를 속여 비활성 상태로 목에 걸어 둔 모양이었다. 로에겐 활성 상태로 해 놨으니 넌 능력을 쓰지 못한다는 거짓말을 했겠지. 그걸 철석같이 믿은 로는 능력을 써 볼 생각도 못 한 모양이고.

    노아는 이게 비활성 상태라는 것을 로에게 굳이 알려 주지 않았다. 사실은 능력을 쓸 수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면, 인간들에게 속아 여태 끙끙 앓았을 스스로를 자책하고 괴로워할까 봐. 대신 그는 로의 목에서 보호석을 끊어 제 옷 속에 집어넣었다. 이건 가져가서 조금 더 조사를 해야겠다.

    “가, 갈기가 목적이었나 봐요……. 저 어떡해요, 노아 님? 갈기가 뽑히면 저는……!”

    “우선 쉬거라. 네 영지로 지금 당장 데려다줄 테니까.”

    “아, 아니에요.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아냐. 네겐 휴식이 필요해. 안심하고 네 등에 올라타.”

    말을 마친 노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채 로를 위해 자세를 낮춰 주었다. 어떻게 감히 노아 님의 등에 올라타냐며, 한참을 고민하고 발을 동동 굴리던 로는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고 결국 그의 등에 타고 말았다.

    “꽉 잡아. 금세 데려다줄 테니.”

    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하곤 제 털을 꾹 쥐었다. 일단 로를 정신없게 해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만들긴 했는데……. 갈기 생각을 하니 노아도 숨이 턱 막혔다.

    타이곤에게 있어 갈기는 단순한 신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자체로 약효로 효용성이 있을 뿐 아니라 우논으로서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레온이 알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누가 봐도 인간들이 한 짓인데 이걸 레온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제 종족, 그것도 동족인 타이곤에 한해서는 눈이 뒤집히는 게 레온인데. 2차 전쟁에서 1차 전쟁의 한을 죄다 풀어 버린 것도 바로 그 레온이었다.

    일단 로의 본체화를 보지 못한 터라 정말 갈기를 뽑힌 건지, 또 어느 정도로 뽑혔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말 갈기를 빼앗긴 게 맞다면……. 그러면 이제부터 로는 우논처럼 영존할 수 없고 테르나 인간들처럼 언젠가 생명의 선이 끝나면 죽게 될 텐데.

    그건 우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권리가 사라졌다는 뜻이었고, 그 얘긴 곧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의미였다.

    “노아 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는걸요! 순찰 도시는 중이라고 하셨는데, 폐하께 가 보셔야 하잖아요.”

    “아니야. 널 데려다주고 돌아오면 돼. 시간은 여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금방 복귀하지 않으면 이엘이 걱정할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들을 일라이저에게 제대로 인계했는지 한시라도 빨리 보고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로 로를 홀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아는 어느새 해가 떠오르는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늦어도 하루 안에는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며.

    *

    스완은 평화로운 호수 위에 제 몸을 내어 맡긴 상태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있으니 지난 몇 년간 겪었던 일들이 한밤의 꿈처럼 느껴진다.

    뭍과 맞닿은 호수의 가장자리 쪽은 언제나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지만, 이렇게 중심부에 들어서면 안개가 많이 걷힌 터라 어느 정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물론 뭍에서 보는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스완은 이곳에서 때아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스완.”

    “아버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빈센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상체만 위로 뜬 채 유유히 헤엄쳐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오랜만에 고향에 온 건데 반겨 주기는커녕 눈치 주는 거야? 그 생각에 툴툴거리던 스완의 얼굴 위로 빈센트가 물을 휙휙 뿌려 댔다.

    “아앗! 장난 좀 그만 쳐요! 자꾸 물 먹잖아요!”

    “그게 뭐 어떻다고. 물에 사는 백조가 물 좀 마시는 게 뭐 대수야?”

    “그렇게 따지면 저한텐 대수 맞죠, 뭐! 전 물에만 사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물만 마시면……!”

    “그래. 넌 물에서만 사는 게 아니잖아.”

    빈센트가 줄곧 웃던 표정을 치우고 사뭇 진지해진 낯으로 쳐다보자, 스완은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스완.”

    “아버지, 나 아픈데. 좀만 더 쉬다가 가면 안 될까? 오랜만에 왔잖아.”

    거짓말은 아니다. 스완은 리플에게 당했던 독 때문에 아직 몸이 완벽하게 낫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여긴 스완이 나고 자란 호수라 체력을 회복하는 속도가 확실히 뭍보다는 빨랐지만 다시 뭍으로 돌아가면 또 골골댈 게 뻔했다. 그러나 빈센트는 의외로 완강했다.

    “네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데.”

    “…….”

    “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차피 넌 곧 여기로 돌아와야 할 거야.”

    엄살부리지 말라는 말을 돌려 하는 셈이었다. 스완도 알고 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이곳에 머물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늘 여유롭기만 하던 아버지 빈센트는 자신을 은근하게 압박해 왔다. 그럴수록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였지만.

    “아, 차라리 아버지가 나 대신 폐하를 만나지 그러셨어요.”

    “…….”

    “전 아버지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재치 있지도 않은데. 저 같은 건…… 사실 쓸모가 없어요. 고작 이 정도 성력으론 제 몸 하나 고치지 못하는데요, 뭘. 무엇보다…….”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심적인 부담감이 너무 컸다. 그래서 드레인과의 만남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뭐? 당분간 찾아오지 말라고?’

    ‘응. 며칠만 혼자 생각 정리 좀 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드레인을 봤던 날, 스완은 그녀에게 당분간 혼자 있고 싶다는 말로 저를 찾아오지 말라는 뜻을 표했다. 그 말을 들은 드레인은 처음엔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봤지만, 스완의 표정이 심각하다는 걸 눈치채곤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속대로 지금까지 스완의 꿈속에 찾아오지 않고 있다.

    자신이 없다. 드레인이 소중히 생각하던 그 소녀들. 그 아이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심지어 그 애들은 나타니엘과도 얽히고설킨 관계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 아이들을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이유가 추가됐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나날이 부담감은 쌓여 갔다.

    “아버지. 저는요……, 저는 그냥 제가 평범한 백조였으면 좋겠어요. 왜 저한테, 왜 제가 이런 능력을 물려받았을까요. 아버지도 알잖아요.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말썽만 피우던 앤지, 누구보다 아버지가 잘 알잖아요.”

    “힘들면 포기해.”

    “…….”

    “아무도 너한테 강요하지 않았어. 설령 황제가 네게 강요하면 그녀를 이곳으로 보내. 내가 설득할 테니까.”

    “폐하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싫다고 하면 당장 그만하라고 할걸요. 누구보다 절 존중해 주는걸요.”

    “그럼 뭐가 문제야?”

    “…….”

    “네가 못 하겠으면 그냥 다 버리고 이곳으로 돌아와. 어차피 계약이 끝나면 넌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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