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다. 누군가의 의도로 이루어진 방화 사건이든, 정말 집사의 실수로 만들어진 사고이든 간에 자칫했으면 황제가 화재에 휘말릴 뻔했다. 그땐 정말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이걸 역으로 이용했다면 자신은 그녀를 공격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반역죄로 끌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솔직히 시작도 전에 반역죄를 뒤집어쓸 뻔했으니 지하에 갇힌 인질쯤이야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정도로 생각하고 지금은 덮어 두는 게 낫겠단 생각을 했다.
근데 자꾸 이런 식으로 일이 꼬이면 곤란하지. 어쩔 수 없네. 예정보다 계획을 앞당기는 수밖에.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던 올리세스는 화재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침실에서 잠을 자다가 갑작스런 봉변을 당한 척, 근위대와 함께 저택을 빠져나와 대피 장소로 향하던 이엘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불길에 활활 타오르는 백작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렇게 보니 마치 그때가 생각난다. 로빈의 영지에서 그의 성을 폭파시켰던 그때가.
“폐하. 이동하셔야 합니다.”
“인질들은?”
“전원 탈출하는 것에 성공하여 조금 전에 숲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럼 아직 러셀 후작을 만난 건 아니겠구나. 긴장을 놓지 말라고 근위대와 기사단에게 전해.”
“예, 폐하. 노아 님이 인솔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숲 쪽으로 올리세스의 관심이 돌아가지 않도록 대비하고.”
“예.”
다행히 영리한 크리스가 당황하지 않고 탈출하는 것에 성공해 준 모양이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히 탈출했다. 이엘은 그에게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의심 많은 크리스가 제 말을 따라 줄 거라고 완벽히 기대하진 않았다.
일이 틀어지면 노아가 직접 지하로 내려가 탈출시키는 것까지 염두에 뒀었는데, 다행히 크리스는 인질들과 함께 지하에서 도망쳐 올라왔다.
이제 숲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라이저와 합류하여 그의 영지로 인질들을 빼돌리면 이쪽 일은 끝이 난다. 그곳엔 오드도 함께 보냈다. 여기서 일라이저의 영지까지 거리가 꽤 먼 탓에 그 적지 않은 인원을 데리고 일라이저 홀로 엄호하며 가는 건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오드의 힘으로 단시간에 이동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는 김에 오드에게도 휴식을 주고 싶었고. 그곳에서 며칠 머무르다가 다음 영지에서 일라이저와 함께 합류하는 것으로 의견을 맞췄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올리세스를 여기서 처리할 수도 있었다. 일부러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올리세스가 방화를 저질렀다고 몰아가면 그는 역모죄로 꼼짝없이 처형을 당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당장의 눈앞에 놓인 작은 이익을 취하고자 루벤과 했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게 우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폐하. 가셔야 합니다.”
“알겠어. 근위대와 기사단에게 미리 말했지? 이틀 내로 이곳을 떠날 거라고.”
“예.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좋아, 우선은 가서 쉬도록 하자.”
그녀는 제 어깨 위로 얹어진 로브를 더 안쪽으로 여미며 마주 부는 바람을 피했다.
*
노아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뒤로 힐끔거리며 크리스와 인간들이 제대로 숨어 있는지 확인했다. 불이 났던 저택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빛이라곤 하늘에 뜬 달빛뿐이라 다행이었다.
노아의 눈짓을 알아챈 크리스가 어설프게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완전히 숨기는 데에 성공했다.
“야, 노르드! 너 그동안 어디서 지냈던 거야!”
그래, 노르드. 그게 내 가명이었지. 남자는 반갑게 노아가 마을에서 머무를 때 지냈던 가명을 부르며 알은체를 해 왔다.
노아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곤 남자의 뒤에 또 다른 사람들은 없나 확인했다. 다행히 놈은 혼자인 듯했다. 여의치 않으면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
“너도 결국 백작님의 사병이 된 거냐? 야, 축하한다.”
“…….”
“근데 왜 아까부터 말이 없냐. 서운하네. 오랜만에 동향 사람 만나서 반갑지도 않냐?”
저 다갈색 머리의 남자는 노아가 리노가 붙잡혔던 마을에서 지낼 때 알고 지냈던 자였다. 그는 원래는 평범하게 포필렌이나 재배하다가, 노아가 검술을 봐주면서 실력이 늘게 되어 백작가의 사병으로 뽑히게 되었다.
동향이라고? 그 마을엔 고작 몇 달 머물렀을 뿐이다. 처음부터 자신은 외부인이었을 텐데, 저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동향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가. 그때까지도 노아는 남자를 경계하는 것에 집중하며 검집에 손을 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난 어제 여기로 호출됐거든. 줄곧 위병 일만 하다가 어제부로 백작저의 경비를 맡았어. 노르드, 너 알지? 내가 여기서 일하는 게 꿈이었던 거.”
“어.”
“이게 다 네 덕분이다, 노르드.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뭐……. 솔직히 네 도움이 아예 없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니까. 네가 가끔씩 말해 줬던 게 검술 훈련에 도움이 되긴 했거든. 그때 말 제대로 못 해서 미안하다. 아무튼 고마워, 노르드.”
남자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했다. 그 반응에 노아는 쥐고 있던 검집을 놓았다.
모르나? 내가 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난 방화범이라는 걸. 지금쯤 방화범이 ‘노르드’였다는 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았을 텐데. 그러나 이 인간은 모르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 한참 마을과 백작령을 오가느라 바쁘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노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정리하며 조심스레 남자를 떠봤다.
“넌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나? 난 몇 달 됐지. 그때 널 마지막으로 보고 두 번 정도 우리 마을에 갔다가 여기로 완전히 이주했거든. 그 뒤로는 가고 싶어도 마을에 못 갔었어. 노르드, 넌 대체 언제 여기에 온 거야?”
“아…… 나는 며칠 안 됐다. 폐하께서 오신다고 해서 급하게 인원을 뽑길래 자원해서 왔어.”
“그랬구나! 야, 잘됐다. 그럼 너도 여기 수색 중인 거야? 아까 윌터 남작님이 여기 수색하는 인원이 적다고 나한테 가라고 하셨었거든.”
“아. 어, 나도 여기 수색 중이었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어.”
“그래? 그럼 우리 돌아가서 좀 쉬자.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일이 터져서 수습하느라 피곤해 죽겠다.”
“아, 그러면 먼저 돌아가. 나머지 구역은 내가 다시 정리하고 돌아갈게. 가서 쉬고 있어.”
“그럴까, 그럼? 고맙다. 이렇게 오랜만에 동향 친구도 만나서 반갑기도 하고.”
역시 올리세스가 수색대를 꾸려 놨군. 저 인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도망치느라 바빠서 수색대의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피를 보지 않는 편이 낫겠지. 결국 마음을 바꾼 노아는 자신이 이쪽 수색을 맡겠다며 남자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남자는 자신이 지금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았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끝까지 헤실헤실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노아는 숨어 있던 크리스와 인질들을 챙겨 계속해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일라이저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백작령의 경계를 한참 넘어야 보이는 강기슭이었다. 그곳까지는 거리가 상당했지만 다행히 갈대밭이 끊임없이 이어진 덕에 모습을 숨기며 이동할 순 있었다.
그렇게 한참 달렸을 무렵이었다. 선두에 섰던 노아와 뒤따르는 인간들 간에 거리 차이가 점점 심해져 노아는 달리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노아는 이종족이었고 크리스의 무리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갈수록 속도 차가 심해졌다.
“크리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아, 알겠습니다.”
그나마 크리스가 노아의 말에 화답하며 지친 인간들을 격려하기 시작한 것이 다행이었다. 다들 죽다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다시 한 번 힘을 내 노아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다행히 인간들이 또다시 지쳐 쓰러지기 직전, 알맞은 타이밍에 일라이저와 오드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노아와 일행을 발견하곤 빠르게 달려와 주변에 결계를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작님.”
“여기서부터 잘 부탁하오, 후작. 그리고 오드 님.”
“네, 공작도 조심히 돌아가세요.”
오드가 싱긋 웃으며 노아와 인사한 뒤, 인간들과 일라이저를 데리고 순식간에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긴 한숨을 내쉬던 노아가 그대로 돌아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우으으! 우읍!!”
별안간 들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걸음이 멈췄다. 어린아이? 이 근방은 인간밖에 없는 영지들뿐일 텐데 이렇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거기다 여긴 그 영지들 사이에 존재하는 버려진 땅과 같은 곳이라 마을은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이종족이나 인간이나 있을 리 없다는 소리다.
“우으!”
하지만 노아의 발길을 잡은 건 그게 단순히 어린애의 목소리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거기 누구냐.”
“으으! 우으윽!”
제 목소리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아는 검을 뽑아 든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 발소리를 들은 건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금 전보다 더 극심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돌연 불어온 돌풍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이 냄새는…….”
말을 하다가 무언가 깨달은 노아는 쥐고 있던 검도 바닥에 내팽개친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왜 네가……!
조금 전, 인간들을 탈출시킬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다. 이마 위에 맺혀 있던 땀이 흘러내려 턱 아래서 떨어졌을 때. 노아는 원치 않던 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로!”
“우윽!”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쓰러져 있는 로였다. 레온의 착실한 심복이자 어린 타이곤. 그러나 몰골은 처참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머리 부분이 온통 누런 종이로 둘둘 감겨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팔과 두 다리가 서로 교차된 채 줄에 묶여 있었고, 목엔 보호석이 걸려 있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아니다. 놀라지 말거라, 로. 나야. 노아. 네 주인의 친우.”
“우으……?”
노아의 목소리를 들은 로가 발버둥 치던 몸짓을 죽였다. 소년의 앞에 선 노아는 아주 잠깐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참담함을 삼켰다가, 곧 손을 뻗어 로의 얼굴에 둘둘 둘려진 천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