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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03화 (403/488)

403화

*

“왜 그렇게 못마땅하게 봐?”

“대체 폐하께서 너의 어딜 보고 임무를 내리신 건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이카르 때문에 유클리드는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나도 이해할 수가 없네. 왜 하필 너랑 내가 이렇게 짝이 된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카르를 놀리듯이 비죽거렸다.

“닥쳐. 넌 들어가서 놈을 데리고 나올 생각이나 해.”

“워워. 진정해. 왜 이렇게 흥분했어? 우두머리가 그렇게 날뛰면 네 아래 딸린 것들은 덩달아 불안해진다고.”

오래 산 선배의 조언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그렇게 덧붙인 유클리드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난 이카르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이카르의 뒤에 있던 재규어 몇 마리가 평소완 다르게 낑낑거리며 불안한 듯 주변을 배회하고 잔뜩 경계했다. 그 모습에 이카르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서로를 불쾌히 여기는 유클리드와 이카르가 함께 오게 된 곳은 리노 윌터를 숨겨 뒀다는 문제의 그 마을이었다. 포필렌을 유통시키는 근원지이며 동시에 이교도의 포교 활동의 근원지이기도 한 곳. 이엘이 두 사람에게 맡긴 일은 리노를 구출해 내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엔 이카르가 저 혼자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었다. 그러나 이엘이 그의 고집을 완고하게 거절하곤 그 일은 네 몫이 아니란 말을 전하며 이카르의 마음을 못내 서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머리를 차갑게 식힌 뒤에 생각해 보니 이 일의 적임자는 자신이 아니라 유클리드가 맞는 듯하다.

“유클리드. 네가 폐하의 뒤통수를 치는 일 따윈 없길 바란다.”

“아직도 날 못 믿네.”

유클리드는 현재 올리세스의 동맹에 속한다. 물론 실제로는 정보를 이엘에게 빼돌리고 있지만. 어쨌든 그 덕에 굳이 마을에 잠입하지 않아도 환대받으며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혼란한 틈에 리노를 납치하면 될 일이고. 거기까지는 유클리드가 할 테니 문제는 없다.

다만 이카르와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는 건 저 믿지 못할 스라소니 놈이 혹여나 뒤통수를 때릴까 봐. 리노를 데리고 나와도 이카르와 재규어에게 넘기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이거 봐, 이거 봐. 눈빛이 아주 무섭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명심해라. 넌 혼자고, 우린 무리라는 걸. 허튼짓 하면 곧장 응징해 줄 테니 목숨이 아깝다면 미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전쟁광이란 건 아예 잊어버렸구나, 꼬마야.”

“누구한테 꼬마라고……!”

“걱정 마. 네가 걱정하는 그런 허튼짓은 할 생각 없으니까.”

이놈의 동맹들은 어째 날 이렇게 못 믿어? 유클리드가 장난스럽게 툴툴거리며 이카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분노한 이카르에게 손등이 후려쳐졌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알겠어. 까칠하기는. 제법 자유분방한 게 내 종족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완전 속 좁은 놈이었구만.”

“…….”

“넌 폐하를 아직도 못 믿어? 왜 폐하께서 네가 아닌 나를 선택하셨겠어.”

“그거야…….”

“단순히 내가 올리세스와 동맹이기 때문에 저 마을에 접근하기 쉬워서? 전혀. 그것 때문이 아니야, 꼬마.”

꼬마라는 단어에 다시 욱할 뻔했지만 이번엔 그냥 흘려듣고 넘겼다. 그런 이카르의 반응에 유클리드가 키들거리다가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위로 쳐들고 힘을 쭉 뺐다.

“저 마을엔 보호석이 있어. 그 가동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우리로선 알 수가 없고.”

“…….”

“너희 종족이 전쟁에 특화된 종족이긴 해도 보호석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잖아? 과거에 토벌전과 1차 전쟁으로 뼈아픈 경험을 했으니 너도 알고 있겠지?”

어느 이종족이든 보호석 앞에선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 그걸 잘 아는 이카르는 반박하지 않고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쥔 채 유클리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능력도 쓰지 못하는 네가, 얼마 남지 않은 네 동족 몇 마리를 데리고 들어가 봤자 큰 승산이 없다는 소릴 하는 거란다, 꼬마야.”

“…….”

“반면 나는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이쪽으로는 재능을 타고났거든.”

허세가 아니다. 유클리드는 혼자서 스라소니 전체 몫을 다 할 정도로, 이쪽으로는 유클리드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긴 시간을 통해 쌓은 경험과 타고난 머리, 그리고 온갖 교묘한 기술이 그걸 뒷받침했다. 괜히 전쟁광이란 별칭이 따라붙는 게 아니었다.

“넌 네 무리를 지켜. 여기서 잘 숨어 있어. 내가 리노인가 뭔가 하는 놈을 곱게 데려다줄 테니.”

“혼자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으면 신호를 보내. 너야말로 무리해서 폐하의 계획을 어그러뜨리지 마라.”

“좋아. 내 선에서 해결이 안 될 것 같으면 기꺼이 너를 부를게.”

그 말을 마친 유클리드는 이카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곤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장. 저놈을 믿어도 되겠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어. 게다가 아직 폐하께서 올리세스의 영지에 계시니 괜히 분란을 일으켰다가 문제가 생기면 안 돼.”

리노를 빼 오려다가 도리어 이엘이 올리세스에게 붙잡힐 수도 있다. 물론 그녀의 곁에 온갖 기사단과 근위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키고 있으니 그렇게 될 린 없겠지만. 어쨌든 저 마을에서 문제를 일으켜도 별일 없을 유클리드가 가는 게 맞긴 하니까.

“각자 자리로 가서 몸의 크기를 작게 줄이고 상황을 지켜봐. 아마 며칠은 있어야 할 테니까. 혹시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곧장 내게 보고해라.”

“예, 대장.”

부디 별 문제 없이 리노를 데리고 탈출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까 놈의 눈빛과 말투를 보면 성공할 것 같긴 한데, 문제는 그쪽이 아니라……. 이카르는 이유 없이 고개를 뒤로 돌려 주변을 바라보기 바빴다. 어째 폭풍이 한차례 일 것만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근데 이게 다 무슨…… 무슨 소란인가?”

“죄송합니다.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아, 아무튼 폐하께선 대피하십시오.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윌터 백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 두 손을 움켜쥐곤 횡설수설 의미 없는 말만 떠들어 댔다. 늦은 새벽, 저택에 불이 났다. 그것도 자신의 가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짐은 괜찮네. 걱정 말고 수습이나 잘하게.”

“예, 예.”

돌아선 윌터 백작은 이를 악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돌려놓은 저택인데……. 작위를 복위하자마자 이 백작령을 되찾고 모두의 찬사를 받았던 과거의 저택을 그대로 건축하는 데 온 시간과 돈을 쏟았다. 이종족에게 빌빌 기어 가며 어렵게 지었던 게 바로 저 저택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택의 반 이상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앉았다. 지하에 잡아 놓은 인질들에게 식사를 주고 올라왔던 집사장이 실수로 램프를 떨어뜨린 건지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아 오른 것이다. 하필 지하로 가는 통로였던 그 방에 기름통이 가득했던 터라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번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쉽게 진화되지 않는 불길이 퍼진 저곳은 루벤의 가족과 그 외 인질들을 잡아 놓았던 지하 창고 바로 위였다. 하필이면 인질들이 있는 곳을…….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현재로선 생사를 알 수 없지만 죽었을 확률이 크다. 연기 때문에 질식했을 테니까.

……그러나 만일 도망쳤다면? 불이 지하까지 번져 타 버렸거나 연기에 질식돼 죽었다면 차라리 낫지만, 만일 살아서 도망쳤다면? 그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백작은 밖으로 나와 발을 동동 구르며 활활 타오르는 저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백작을 발견한 올리세스가 한달음에 달려와 제 아비를 붙잡았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그래, 근데 지하가 문제구나. 하필 불이 난 곳이 지하로 가는 입구여서.”

“빠져나갔을 리 없어요. 우선 진화부터 하고 나중에 조사하는 게 낫겠네요.”

“근데 넌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니?”

“아……. 네. 잠깐 볼일이 있었거든요.”

올리세스는 제 옷차림을 수상하게 쳐다보는 아버지의 시선에 산뜻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새벽이 다 된 시간에 침의 차림이 아닌 게 퍽이나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지. 직전에 피시를 만났던 올리세스는 그를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뒤에 이곳에 온 제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황제는요? 괜찮던가요?”

“그래. 조금 전에 대피하시는 걸 봤다. 일이 꼬였다. 하필 이곳에 있을 때 일이 터지다니. 이걸로 책을 잡아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구나.”

“걱정 마세요. 제가 마무리 잘할 테니. 아버지는 가셔서 쉬시죠. 금세 진화될 겁니다.”

여전히 걱정이 한가득인 백작을 달래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올리세스는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는 현장을 바라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아버지는 고작 저택이 날아간 것에 발을 동동 굴렸지만 저 안엔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들이 많았다. 이를 테면 루벤이 그린 그림들과 포필렌 저장 창고와 같은 것들.

하지만 이상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필 황제가 여기 머물 때 이런 일이 생겼다고? 그것도 하필 그 지하 창고가 있는 곳에서? 인질들이 전부 죽었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만일 탈출이라도 했다면. 그래서 황제의 무리 중 누군가 그들을 발견했다면……. 그땐 정말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

“왠지 찝찝한데.”

그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느라 바쁜 황실기사단과 근위대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하필 이런 때에 집사장이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이 너무 안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어린 뱀과 하이에나에 잠깐 홀려서…….

포레스트와 피시. 종족은 다른데 둘이 묘하게 닮았단 말이야. 두 사람을 떠올린 올리세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싯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뱀은 다루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했었다. 황제가 뱀의 공작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던 그 어린 뱀은 언제나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며칠 지켜보니 소문과 달리 황제는 그 뱀에게 큰 관심이 없는 듯해서 몇 번 제 개인적인 공간으로 불렀는데, 사흘 전부터는 제 명령에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폐하께서 허락 없이는 제 방을 나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쩐지 그녀가 저를 보는 눈빛이 달라진 것 같더니…… 그 이유가 뱀이었군. 어차피 큰 흥미는 없었던 터라 금방 손을 떼고 목표를 바꿨다. 황제의 애첩이라던 하이에나가 제 영지에 찾아왔던 것이다.

피시는 뱀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그보다는 더 여유로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늘 예민하고 경계하던 포레스트와 달리, 자신이 말을 걸어도 웃으며 곧잘 응하곤 했다. 조금 전까지도 그 하이에나와 함께 밤 산책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하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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