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02화 (402/488)

402화

그렇게 포레스트를 통해 알아낸 장소였다. 몇 달 전에 노아가 리노를 찾기 위해 윌터 백작 소유의 마을들을 전부 둘러봤었지만 그곳들은 전부 포필렌을 재배하는 곳들이었을 뿐, 저장하거나 개량을 위한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 영지밖에 없을 텐데.

어제 있었던 일을 잠깐 떠올렸던 이엘은 가지고 왔던 도구를 이용해 창문을 가볍게 열었다. 줄곧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트에게도 손가락을 둥글게 모아 무사히 들어왔다는 표시를 보여 주곤 다시 창문을 조용히 닫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네 번째 방이랬지.”

발자국 소리를 죽여 문까지 도착해 귀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종족만큼은 아니지만 보통 인간들보다 청력이 좋은 터라 이렇게 눈을 감고 집중하면 아주 작은 인기척도 감지할 수 있다. 꽤 긴 시간 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이엘은 조용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포레스트가 말한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혹시나 포레스트가 어제 봤다던 집사장이 오늘도 그 방에 들어갔을까 봐. 이엘은 어둠이 짙게 깔린 맞은편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대기했다.

달깍.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을 나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집사장이었다. 그는 빈 트롤리를 가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 그러고도 잠깐의 시간 간격을 두고서야 이엘은 움직일 수 있었다. 검을 비롯해 로빈의 독약을 들고 오긴 했지만 마찰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다행히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엔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목제 가구 특유의 냄새와 기름 냄새도 언뜻 섞여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가구들을 모아 넣은 창고인 듯했다. 새하얀 천들로 가구들을 덮어 놓았지만 관리를 잘한 건지 천 위엔 먼지가 조금도 쌓이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여느 창고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공간에 불과했다.

“뭔가 있는 건 확실한데…….”

공간이라곤 지하밖에 없을 테니 열심히 발로 바닥을 굴려 봤지만 죄다 막혀 있는 터라 빈 공간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백작의 말대로 이 저택엔 지하가 없는 걸까? 그러면 조금 전에 집사는 왜 트롤리를 가지고 여길 드나든 거지? 기껏해야 가구밖에 없는 창고인데.

그렇게 한참을 애꿎은 바닥만 두드리며 허탕만 치다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을 무렵이었다. 이엘의 시선이 돌연 벽면에 닿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커다란 초상화를 만지다 불에 탄 흔적을 느꼈던 때처럼.

이번에 찾지 못하면 정말 돌아가야 한다. 곧 있으면 날이 밝을 테니 제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꼭 오늘 찾고 싶었다. 아직 기한이 며칠 더 남아 있었지만 시간이 지체될수록 이엘과 기사단은 조급해질 테고 그럴수록 실수할 확률만 커지니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루벤의 가족을 찾아야만 한다.

“어……!”

그때였다. 잡생각에서 빠져나온 이엘이 첫 번째 벽면을 지나쳐 그다음 벽면을 스쳤다가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질렀다. 뭔가 미묘하게 우둘투둘하게 어긋난 것처럼 느껴졌는데……. 한 발짝 뒤로 가며 지나쳤던 부분을 다시금 만졌을 때 확신했다.

여기다. 벽이었어.

주먹으로 벽을 콩콩 두드리자 텅텅 소리가 들렸다. 이 벽은 가벽이다. 벽 너머에 공간이 존재해. 그리고 조금 전에 만져졌던 벽의 우둘투둘한 부분은 바닥에서부터 이어진 선이었다. 자세히 보니 벽에 아치형으로 그어진 선이 존재한다.

이게 문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대충 아치형 문의 크기를 파악하고 몸을 벽에 기댄 채 있는 힘껏 밀었다. 약간의 반동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벽이 뒤로 밀리는 걸 확실히 느꼈다. 이번엔 두 손으로 벽을 짚고 조금 전보다 강하게 밀치자 아치형의 문이 뻑뻑하게 회전했다가 돌아왔다.

방법을 바꾸는 게 낫겠어. 그녀는 벽에서 떨어져 뒤로 한참 물러났다가 벽을 향해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몸이 벽에 거세게 부딪쳤을 때, 그렇게 뻑뻑하고 버겁던 벽이 한순간에 휘리릭 돌아가며 커다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지하가 있을 거라 미리 예상하고 벌인 일이라, 이엘은 벽 너머의 공간에 바닥이 없이 곧장 계단으로 뚫려 있었음에도 심하게 구르지 않고 멈출 수 있었다. 물론 높이가 꽤 있었던 터라 약간의 부상은 피할 수 없었지만.

“윽. 나중에 하트가 한 소리 하겠는데…….”

까진 팔을 쳐다보며 쓸데없이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역시나 지하 공간이 있었다. 조금 전에 떨어졌던 곳은 저 위였나 보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을 올려다보던 이엘은 다시 깜깜한 정면을 주시했다. 혹시 몰라서 불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을 가져오긴 했지만 당장 저 앞에 뭐가 있을지 몰라, 일단은 벽을 짚고 걸어가 보기로 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한참 걸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아주 미묘하게 일렁거리는 불빛을 발견했다. 이엘은 조금 전보다 속도를 내, 거의 뛰다시피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빛은 점점 커졌다. 그나마 이 정도 빛이라도 밝혀 둔 것에 고마워해야 하나. 이엘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목까지 내려 뒀던 천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저쪽에서 보이지 않게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봤다.

루벤으로부터 그의 가족 초상화를 미리 받아 얼굴을 익혀 둔 터라 저 철창에 갇힌 게 그의 가족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엘은 이곳을 지키는 이가 따로 없는 것을 확인하고 철창에 다가갔다. 그녀를 발견한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바짝 물러섰다. 그들은 모두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크리스?”

이엘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앞을 지키며 경계하던 남자가 움찔거렸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있는 듯한 남자는 천천히 이엘이 다가선 철창까지 걸어왔다. 남자와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생각보다는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입에 물린 재갈과 뒤로 묶인 두 팔을 제외하면.

“우으?”

“아, 이리 가까이 와. 풀어 줄 테니까.”

철창 안으로 손을 넣은 이엘을 남자는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이엘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고 있던 천을 턱 아래로 홱 내려 버렸다.

“이제 됐나?”

남자의 커다란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가 무릎을 꿇고 재빨리 몸을 바닥에 붙이고 엎드렸다.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이엘이 금세 천을 올려 썼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라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풀어 줄 테니 가까이 와.”

이번엔 얌전히 앞으로 다가왔다. 이엘은 양손을 철창에 집어넣어 그의 입에 물린 것들을 전부 제거해 줬다.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는 크리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검지를 세워 사인을 보냈다.

“쉿. 큰 소리를 내지 마. 나에 관해 알은체도 하지 말고.”

“네, 네…….”

“네 이름이 크리스가 맞느냐?”

“예, 폐…… 아니, 기사님. 예. 제가 크리스입니다.”

제 뒤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녀를 기사로 칭하자, 이엘도 만족한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대꾸했다.

“루벤과 네 아버지는 안전해.”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저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지른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올리세스의 말에 꼼짝없이 따라야 하는 건 오롯이 제 탓이다. 자신이 이렇게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황제가 콕 집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언급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세작 짓을 걸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 일은 나와 루벤 사이에 해결할 문제니 넌 신경 쓰지 말렴.”

“하지만…….”

“네 뒤에 있는 자들은 다 누구니?”

“모두 저와 같이 인질로 잡혀 온 사람들이에요. 비슷한 상황입니다.”

“크리스. 이걸 받고 내 말을 잘 듣거라.”

죄책감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크리스의 앞에 황제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그녀가 건넨 건 단검과 날카로운 쇠꼬챙이였다. 그러곤 그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귀에 속삭였다.

“나흘 뒤에 이 시간쯤에 여길 탈출해.”

“예? 하, 하지만……!”

“오늘처럼 집사가 매일 같은 시간에 들어오나? 혼자?”

“예, 맞습니다. 늘 이 시간에 식사를 가지고 와요. 보통은 경비병도 같이 오는데 근 며칠은 집사장이 혼자 왔습니다.”

아마 이엘이 이곳에 머무는 기간 동안은 지하 공간에 출입하는 걸 감추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인 집사만 오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 승산이 있지.

“나흘 뒤에 저택에 불이 날 거야. 집사가 식사를 주고 나가자마자 묶인 손을 풀고, 이 쇠붙이로 자물쇠를 열어서 탈출해. 여기에 꽂아서 돌리면 풀려.”

이엘은 철창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에 쇠꼬챙이를 꽂아 여러 번 돌려 푸는 방법을 크리스에게 가르쳐 줬다. 얼떨결에 그것들을 지켜보던 크리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렸다.

“그리고 저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달려가다 보면 출구로 향하는 계단이 보일 거다. 문은 내가 미리 열어 둘 테니 저들을 데리고 함께 탈출하면 돼.”

“자, 잠깐만요……!”

“잘 들어, 크리스. 네가 이곳을 탈출해야 네 가족도 자유가 돼.”

“…….”

“날 믿고 시키는 대로 하렴. 지하만 나가면 너희를 도와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를 따라가면 돼.”

크리스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홀린 듯 쳐다보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탈출이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그렇잖아도 제 아버지와 연락이 끊겼다고 짜증을 내던 집사장의 눈빛이 떠오른 것이다.

“……알겠습니다.”

“네 안전은 내가 보장하마. 네 아버지에게 데려다줄게. 날 믿어.”

“감사합니다, 폐…… 아니, 기사님. 어쨌든 감사합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살펴 주시는 건지 전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기사님께 배신자일 텐데…….”

“네 할아버지 루벤이 큰 공을 세웠어. 그리고 내게 너희 부자를 부탁했지.”

한때는 할아버지인 루벤을 원망했던 적도 있었다. 왜 우리 가족을 이 영지로 데려와서……. 크리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감정을 추스르는 걸 확인하곤 이엘은 철창에서 멀어졌다.

“그럼 나흘 뒤에 보자꾸나.”

“예, 감사합니다.”

“몸조심하렴.”

크리스는 그녀가 쥐여 준 것들을 꾹 쥔 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 황제의 흔적을 좇았다. 소문과 전혀 달랐다. 곧장 제 이름을 부른 걸 보면 정말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겨우 평민 하나, 그것도 고작 인질에 불과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황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왔다는 것에 크리스는 큰 충격에 빠졌다.

‘네 안전은 내가 보장하마. 네 아버지에게 데려다줄게. 날 믿어.’

어쩌면 이미 그 순간 자신은 구원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 크리스는 그렇게 한참을 철창만 붙잡은 채 이엘이 사라진 곳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