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아직 수색 중입니다. 이미 영지는 다 뒤졌고, 인원을 나눠서 다른 마을까지도 뒤져 봤지만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알폰스의 대답에 노아가 실망한 듯 짧게 탄식했다. 우선은 궁정 화가 루벤부터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
올리세스는 루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루벤과 그 조카에게 세작 일을 시켰다. 물론 지금은 일라이저가 영지의 단속을 강화시킨 터라 외부에선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마 소식이 끊겼다고 생각하겠지. 그사이 루벤의 조카는 일라이저가 역으로 이용하는 중이었으며, 루벤은 현재 늑대의 영지에 머무르며 심신에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루벤은 단서를 찾는 것에 큰 기여를 했다. 그가 그린 소녀들의 그림이 아니었더라면, 이엘은 드레인이 보여 주었던 아이들이 테런스 포르의 딸들일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맞대요. 테런스 포르와 친구라고 했어요. 테런스 포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대요.
뱀의 영지에서 나온 스완이 드레인과 만날 수 있게 되자마자 이엘은 그를 통해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루벤이 그린 소녀들의 그림을 코르넬 포르가 알아본 것이다. 자신의 사촌 누나들을 닮은 것 같다는 말에 모두가 설마 하는 마음이 됐다.
―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건지는 드레인도 모르겠대요. 다만 테런스 포르가 아주 어릴 때 우연히 꿈을 통해 드레인과 만났다고 해요. 드레인도 직접적으로 능력을 통해 만난 인간은 테런스가 처음이었대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고 하던데요.
그렇게 이어진 인연은 꽤 오래 지속됐다. 드레인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테런스가 자라, 결혼도 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걸 지켜보면서 마치 자식을 키운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단다. 그러던 중에 전쟁이 터졌다.
― 2차 전쟁 때, 테런스는 이종족이 연구소를 들이닥치기 직전에 드레인에게 자신의 딸들을 맡겼대요. 아이들을 재우고 쇄골에 있는 인식표를 제거한 상태로 드레인에게 맡겼다고 했어요. 어쩌면 테런스는 인식표를 제거하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드레인의 말에 따르면, 테런스 포르는 상당히 오랜 시간 어떤 해독제를 만드는 데 주력해 왔다고 한다. 그게 아마도 인식표를 제거했을 때 퍼지는 독에 관한 해독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끝내 해결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을 드레인에게 맡긴 걸 보면.
― 드레인이 폐하와 한 번 더 만나고 싶대요. 테런스 포르의 조카에 대해서도 궁금해했어요.
테런스의 조카가 이엘과 친구란 건 드레인도 몰랐던 사실이다. 드레인은 스완을 통해 이쪽 사정을 전해 들으면서 테런스의 조카라던 코르넬 포르를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단다.
반면 이엘은 고민에 빠졌다. 코르넬은 아직 용의 존재를 모르는 데다가, 죽은 줄 알았던 제 사촌 누나들이 살지도 죽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로 미지의 공간에 있다고 하면…… 그 여린 코르넬이 받을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일 듯해서. 어차피 직접 만나러 갈 수도 없을 텐데 괜히 의미 없는 희망만 심어 주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이 복잡하게 됐지만 큰 단서가 되어 준 루벤과 코르넬에게, 이엘은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루벤의 가족을 꼭 찾아내야 돼, 노아 공. 알겠나?”
“예, 폐하.”
“아무래도 오늘은 나도 함께 수색에 나서야 할 것 같군.”
“폐하께서 직접이요?”
“응. 저택 안은 확인해 보지 않았잖아.”
“차라리 제가……,”
“아니. 공작은 오늘 밤 올리세스의 눈을 좀 돌려 주겠나?”
“…….”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이엘은 딱딱하게 굳은 노아의 표정을 보며 도리어 더 정색하며 부정했다.
“저택의 경비를 느슨하게 해 달라는 의미였는데. 곡해하지 말고.”
“아닙니다. 그 부분은 제가 더 오해를 풀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말이 나와서 다행이다. 노아는 재빨리 이엘의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올리세스가 노골적으로 노아를 대하지는 않았지만 놈이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이엘의 눈치까지 살폈다.
“무슨 오해?”
“올리세스 윌터가…….”
“공작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어. 내가 설마 공작 탓을 할까 봐?”
이엘이 살짝 웃음을 터뜨리곤 노아와 조금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근처엔 이엘과 근위대뿐이긴 했지만 여기가 올리세스의 영지인 만큼 적의 눈이 언제 어디서 자신들을 향할지 모른다. 노아도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한 발 뒤에서 따르며 다시 한 번 조용히 속삭였다.
“아주 작은 오해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겐 폐하밖에 없습니다. 설령 수많은 암컷들이 있었다고 해도, 제 시선은 폐하만 향했을 겁니다.”
“확신할 수 있나?”
“예? 폐하……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앞서 걷던 이엘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숨죽여 웃었다. 뒤에선 꽤나 억울한 듯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해명이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굳이 뒤돌아 달래지 않았다. 열심히 아니라고 항명하는 노아의 말을 노랫소리 삼듯 가볍게 흘려들으며 저택 안으로 향했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왔던 이엘은 불빛 하나 없는 새카만 밤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침실 문에 기댄 채 서 있던 하트가 침실 문을 조용히 열었다가 닫고는 이엘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고요합니다.”
“시간이…… 슬슬 준비해야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야. 그렇게 답한 이엘은 그제야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 수 있었다. 침대에 몇 시간이나 누워 있었더니 정말 잠에 빠질 뻔했다. 새빨개진 눈을 여러 번 비비니 하트가 살짝 미간을 좁히곤 침실에 딸린 욕실에 손수건을 들고 가 찬물을 적셔 그녀에게 건넸다.
“비비지 마시고 꾹 누르십시오.”
“고마워, 하트 경.”
피실 웃은 이엘은 손수건으로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가 뗐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 것 같네. 작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빠르게 벗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환복한 저를, 하트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마. 금방 다녀올 테니까. 경은 여길 잘 지켜 줘. 어차피 아무도 안 들어오겠지만.”
이엘은 윌터 백작령에 들어선 날부터 지금까지 두통을 앓고 있는 척, 이른 저녁부터 침실에서 꼼짝도 않는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처음엔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윌터 백작과 올리세스도 이엘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피로를 읽은 건지, 의원을 알아보겠다는 말까지 하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튼 그 덕에 오늘 밤은 경계를 살짝 늦출 수 있을 듯하다. 이것 외에도 노아를 비롯한 몇몇 이종족들이 만찬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니 이엘이 머무는 침실 쪽은 상대적으로 경계가 약할 터였다. 이엘은 커튼을 살짝 걷어 내고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창문을 넘는 건 오랜만이네.”
이온을 살리기 위해 땅 위로 올라오자마자 로빈에게 붙잡혀 뱀의 성에 갇혀 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탈출하기에 급급해 눈에 보이는 천을 닥치는 대로 엮어 뛰어내렸다가 빗물에 미끄러져서 다리를 다쳤었다.
그 뒤에 오드로부터 치료를 받긴 했지만 원래도 무릎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비가 오는 날이면 여전히 다리 전체가 욱신거린다.
그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가벼운 놀이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묵고 있는 곳은 고작 2층이었던 데다가 이종족의 저택도 아닌 터라 한 층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미리 준비해 뒀던 단단한 끈도 있고.
“폐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엘이 허리에 끈을 동여매는 걸 곁에서 돕던 하트가 한 번 더 물었다. 그녀는 이번엔 대답 대신 허리춤에 넣어 뒀던 붉은색 병을 꺼내 흔들었다.
“이거면 되지?”
“그건……,”
“로빈이 선물한 독. 자신의 혈액에 독을 섞어 만든 특수한 액체.”
저걸 만든 로빈조차 해독제가 없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액체였다. 그동안 이엘은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목소리’를 찾아 ‘그’의 공간으로 도망쳤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식의 도피는 피할 생각이다.
비단 로빈이 말했던 영혼이 갉아먹히는 방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와 점점 거리를 둬야 한다.
“알겠습니다. 여긴 제게 맡기시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부탁해.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택에 소동을 일으켜 줘. 소리를 듣고 곧장 돌아올 테니.”
“예.”
이엘은 여전히 저를 불안한 듯 쳐다보는 하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어 주고는 창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순간적으로 불어온 돌풍이 제 뺨을 때리듯 스치고 지나간 덕에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던 졸음마저 싹 다 날아갔다.
목표는 지하 창고였다. 은밀하게 저택 내부를 조사했던 근위대와 기사단들은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는 보고를 남겼지만, 그들이 가지 못한 곳이 존재하긴 했다.
윌터 백작은 저택이 1층부터 시작되는 구조라고 했으나 포필렌을 유통하기 위한 저장 창고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 리 없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일단 수색에 나설 생각이다.
창문을 넘어 줄을 잡고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늘 악천후 속에서 창문과 담을 넘곤 했는데 오늘은 그에 비하면 날씨도 꽤 괜찮다. 여러모로 시작이 좋다. 바로 아래층 창틀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한 이엘은 바로 창문을 열지 않고 안쪽 상황을 살폈다.
이쪽은 백작의 서재였다. 이 방부터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방들은 전부 백작과 올리세스의 개인 용무를 보는 집무실이었다. 오후 시간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올리세스가 신임하는 집사장이 모두의 눈을 피해 이 방 중 한 군데로 들어가는 것을 포레스트가 목격했다.
‘올리세스가 절 불렀어요. 자꾸만 제게 폐하에 관해 물어보면서요…….’
어젯밤 참다못한 포레스트가 이엘의 침실에 찾아와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놈이 음욕을 가지고 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시선이 포레스트에게까지 닿을 줄은 몰랐다. 노아만 신경 쓰느라 다른 건 놓친 제 자신을 탓하며, 이엘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포레스트를 달랬다.
‘놈이 네게 손을 댔니?’
‘그, 그건 아니지만…… 무,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워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감추고 훌쩍거리는 어린 뱀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아마 포레스트가 이 무리에서 가장 어리고 약한 개체인 데다가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뱀이란 걸 알고 건드렸던 모양이다.
‘오늘부터 네게 호위를 붙여 줄게. 올리세스가 또다시 널 부르면 내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전하렴. 넌 그럴 자격이 있어.’
‘저, 정말요?’
‘그럼. 네게 일부러 못되게 구는 거야. 네가 내 사람이라는 걸 알고.’
포레스트는 로빈이 직접 그녀에게 소개한 아이였다.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닐지라도 대외적으론 이엘이 이 뱀을 마음에 들어 해서 데리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을 텐데, 감히 황제의 남자를 허락도 없이 제 방으로 불러들여?
폐하의 곁에 있는 모든 자들을 뺏을 생각입니다. 유클리드가 제게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오드의 성력이 필요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엘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져갈 생각이라던……. 그 시작이 이 어린 뱀인 걸까. 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레스트의 뺨을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유클리드는 늘 저를 자기 방으로 불렀는데 딱 한 번 방으로 불렀다가 밖으로 나왔던 적이 있어요.’
‘밖으로?’
‘네. 갑자기 집사장이 들어왔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제 눈치를 슬쩍 보다가 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어요. 집사장은 올리세스의 방 안으로 들어갔고요.’
‘…….’
‘혹시 몰라서 여기 오기 전까지 그 근처에 숨어 있었는데 조금 전에 또 집사장이 그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 방이 어디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