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어쩐지 약 올리는 듯한 알폰스의 웃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등을 밀쳤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다. 나타니엘은 대체 놈의 저런 부분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알폰스처럼 조금 전에 알게 된 게 아니라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보고를 받을 만한 놈이 있었나?
아. 유클리드……. 그가 전략상 올리세스와 손을 잡는 척하고 있었지. 유클리드라면 올리세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사실을 이엘에게 말했던 모양이었고. 노아는 괜히 소름이 돋은 제 팔을 마구 비비적거리며 무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윌터 백작저는 전쟁에 휘말려 한 차례 무너졌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지의 저택들에 비해 훨씬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최근엔 자주 쓰이지 않는 1제국식의 건축 방법으로 재건된 탓에 이곳만은 전쟁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저택 곳곳을 살펴보던 이엘은 지나는 복도의 벽에 즐비하게 늘어선 그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작의 저택은 미술품이 참 많군.”
“작위와 영지를 다시 수여받고 영지민을 받아들일 때, 화공을 특별히 더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그 덕에 이렇게 많은 미술품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실력이 뛰어난 화공이 있다면 짐에게도 소개해 줄 수 있겠나?”
“예? 화, 화공을 말씀이십니까?”
“응. 과거엔 궁정화가가 전담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없질 않나. 괜찮은 화공이 있으면 한 명 소개해 주게.”
이엘의 말에 윌터 백작은 당황한 건지 살짝 눈치를 보다, 이내 알겠다며 대답하고 말았다.
“아, 그게…… 폐하께 아무나 소개해 드릴 순 없으니 숙고하여 선별한 뒤에 폐하께서 환궁하시는 시기에 맞춰 화공과 함께 입궁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음, 짐은 아무나 괜찮은데.”
“제, 제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럽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백작의 마음이 그렇다면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지. 알겠네. 그럼 더 특별히 신경 써서 소개해 주게.”
“예, 폐하. 가장 뛰어난 자로 고르고 또 고르겠습니다.”
윌터 백작은 허허 웃으며 화제를 바꾸기 위해 서둘러 이엘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궁정화가 루벤 단을 황궁으로 보내 내부에서 세작 일을 시키기엔 이것만큼 절호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루벤과의 연락이 끊어진 것이다. 안드로와의 교류로 루벤을 잠시 늑대의 영지에 보냈는데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루벤뿐만 아니라 일라이저 러셀의 영지에서 세작 일을 하고 있는 루벤의 조카까지 소식이 끊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일라이저 영지의 경계가 심해져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윌터 백작은 안내받은 처소로 향하는 일라이저의 뒤를 빤히 노려봤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황제가 화공을 한 명 소개받고 싶다고 하는데 루벤이 적합하기에 놈을 보내려 했거든. 마침 황제의 곁에서 보고할 놈이 필요해서. 근데 놈이 늑대의 영지에 간 뒤로 연락이 안 되질 않니. 게다가 러셀 후작령의 경계가 삼엄해져 검문이 상당히 까다로워진 탓에 조카 놈도 소식이 끊기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구나.”
잠깐 떨어져 있던 올리세스가 고민하는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와 함께 생각에 잠겼다. 포필렌 유통을 위해 늑대의 영지에 찾아가 안드로의 제안을 허락한 건 자신이었다. 올리세스가 직접 루벤 단을 늑대의 영지로 보냈다. 근데 거기서 연락이 끊길 줄이야…….
하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어차피 늑대는 언젠가 제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고. 신경에 거슬리는 건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세작 노릇을 하고 있다던 루벤의 조카이다. 놈은 루벤과 달리 활동적으로 움직이며 정보를 빼돌리던 핵심 인물이다. 그런 자와 연락이 끊기는 건 상당한 손해인데.
그러나 이 역시 늑대와 비슷하게 처리하면 해결된다.
“그럼 간단하네요. 안 그래도 러셀 후작이 이곳에 와 있으니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될 일 아닌가요?”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니. 제 아비를 닮아서 얼마나 꼿꼿한지 모른다. 아니. 황제를 향한 충심은 제 아비보다 더해.”
“그 정도는 제게 어렵지도 않아요. 러셀 후작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그래. 알겠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렴. 그보다 이번 황제의 행렬에 나자르가 없어 아깝게 됐구나. 네 몸 상태를 한번 확인해 봐야 할 텐데.”
윌터 백작은 오드가 없다는 것이 정말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아들인 올리세스는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는데 온갖 좋은 약이란 약은 다 써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 해를 넘기지 못할 거란 의원의 말과 달리 다행히도 몇 번의 고비 끝에 지금까지도 연명하며 살고 있었다.
최근엔 포필렌을 개량해 만든 약으로 병세가 호전되긴 했지만 그 또한 일시적일 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자르로부터 주기적으로 받는 성력이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제가 황제가 되면 나자르는 자연히 따라올 테니까요.”
“올리세스, 얘야. 너 정말로 황위를 탐내는 거니.”
“…….”
“어차피 황위 같은 건 아무 의미 없어진 세상이 아니니. 그러지 말고 차라리 황제의 눈에 들어서 첩의 자리라도……,”
“아직도 아버지는 절 못 믿어요?”
올리세스의 눈에 핏발이 서자, 윌터 백작은 서둘러 아니라는 말을 하며 제 아들의 등을 다독였다. 아주 짧게 앓고 지나가는 순간의 치기라고 여겼는데, 올리세스의 야욕은 제 생각보다 더 독하고 저열했던 모양이다. 진작 말렸어야 했나. 너무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키웠던 게 화근이었나. 돌이켜 봤자 이미 늦었다.
“아버지는 그냥 지금처럼 제 편이 되어 줄 사람과 영지 관리만 잘해 주시면 된다고요.”
“…….”
“그리고 제발 그 빌어먹을 동생 역시.”
“…….”
“허튼 생각 좀 안 하게 해 주시고요.”
이제는 하다 하다 신을 사칭하며 이교도를 만들고 다니는 제 아들의 모습을 보며 윌터 백작은 포기한 듯 고개만 끄덕였다. 2차 전쟁이 왜 일어났던가. 신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에 끝끝내 신도 인간을 버리셨던 것이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특히나 신을 사칭하며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그 죗값은 돌아올 것이다.
“알겠구나.”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말이 너무 지나쳤죠?”
“…….”
“모난 자식이라 죄송해요. 제가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래요. 숨도 잘 못 쉬겠어요, 요즘엔. 하루라도 빨리 편해지고 싶어요.”
아이는 제국법상 한 명만 낳는 게 원칙이었지만 윌터 백작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인 올리세스는 어려서부터 병을 앓아 몸이 약했고, 둘째인 리노는 제 형과 달리 몸과 정신이 건강한 아이였다. 그러나 영특했던 둘째는 일찍이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세계를 깨닫고 연구소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까진 좋았다. 둘째가 연구소에 들어갔으니 더 이상 제국법에 저촉될 일도 없었고 작위와 가문을 첫째 올리세스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문제 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올리세스의 병세는 심각했고, 가신들이 슬슬 후계를 둘째인 리노로 정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주고받던 차였다.
별안간 리노의 사형 소식이 들려왔다. 황궁으로부터.
“아버지. 전 제 동생을 사랑해요.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정말로 리노를 사랑하고 있어요.”
“올리세스.”
“다 저와 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아버지도 억울하지 않으세요? 왜 리노가 그렇게 되어야 했는데요?”
우리 윌터 가문이 황실에 얼마나 충성했는데요. 그렇지 않나요, 아버지? 올리세스의 작은 목소리에 윌터 백작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짧게 신음했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 제발 죽음만은 면해 달라며 황제의 앞에 몇 날 며칠을 무릎 꿇고 애원한 뒤에야, 윌터 백작은 제 아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둘째 아들은 이전의 영민했던 제 아들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던 리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이, 그저 껍데기뿐인 상태로 돌아왔다.
“우린 이미 한번 지옥을 경험해 봤잖아요. 전쟁이 우리 가족을 모두 찢어 놓았고, 탄광촌에서 형편없이 살다가 또 노예로도 살아 봤죠.”
“…….”
“제가 아버지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물론 제 아픈 몸을 고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것보다는 아버지와 리노를 위해서. 그래서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이젠 정말 모르겠다. 이렇게라도 귀족의 삶을 연명하는 게 나은 건지, 아니면 아들의 말대로 뭐라도 해야 하는 건지. 어차피 미래 같은 건 없고 단 한 번뿐인 삶인데, 주어지는 대로 순응하며 사는 게 과연 맞는 건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정말…… 정말 리노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냐?”
“물론이에요. 전 제 동생을 사랑한다니까요, 아버지.”
“…….”
“걱정 마세요. 제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루벤도 염려 마세요. 어차피 황제는 환궁할 수 없을 겁니다.”
“벌써 준비를 마친 게야?”
“거의 됐어요.”
“…….”
“그러니까 아버지는 가서 좀 쉬세요. 걱정 마시고요.”
윌터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곤 올리세스의 배웅을 받으며 제 침실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
피시가 도착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물론 영주인 윌터 백작에겐 사전에 양해를 구한 상태였지만,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아야 하는 것에 백작이 불편해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 백작과는 달리 아들인 올리세스는 도리어 기뻐하며 환영했다.
“어서 오세요, 남작.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가 먼저 피시의 앞에 손을 내밀며 악수까지 청했다. 그 모습에 아주 잠깐 얼떨떨했던 피시는 이엘과 시선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합류하느라 괜히 백작가에 폐만 끼치는 건 아닌가 싶네요.”
“그럴 리가요. 폐하의 손님은 누구라도 환영입니다.”
올리세스의 사근사근한 태도에 피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은 이엘도 의외라고 생각했다. 피시는 낯을 상당히 가리는 편인데 다름 아닌 인간을 상대로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하는 모습에서 퍽 놀라웠던 것이다.
“우선 쉴 곳을 안내해 드릴 테니 가셔서 푹 쉬시지요. 저를 따라오세요.”
“감사합니다. 폐하,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곧 다시 보자꾸나.”
피시가 제 애첩 정도로 알려져 있을 테니, 이엘은 부러 피시의 이마 위에 입술을 꾹 찍으며 대놓고 애정 표현을 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올리세스가 아주 잠깐 일그러진 표정을 짓긴 했는데 금세 갈무리한 탓에 아무도 보진 못한 듯했다.
“제가 본 인간 중에 가장 이중적인 것 같은데요.”
알폰스의 말에 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이 흘렀지만 올리세스는 제 아비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이엘과 무리를 환대했다. 그 어떤 동맹족의 영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화려한 대접을 여기서 받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하지만 희희낙락하며 마냥 웃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왔고, 이 고요한 곳에서도 해야 할 일은 존재했으니까.
“루벤의 가족은? 확보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