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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9화 (399/488)
  • 399화

    영지 시찰을 하는 동안엔 외관에 신경 쓰지 못하는 터라 이쪽이나 저쪽이나 덥수룩한 건 비슷했다. 하트 역시 원래는 깔끔한 상태를 고수하는데 최근엔 휘몰아친 사건들 때문에 자기 관리를 못한 듯했다. 그는 저를 부르는 이엘의 손짓에 한숨을 삼키곤 조금 전까지 노아가 앉아 있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곧 있으면 피시를 볼 텐데. 경도 깔끔한 모습으로 동생을 맞아 주어야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색하게 대꾸한 하트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번에도 이엘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서걱서걱, 가위 소리가 듣기 좋게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뒤에서 머리 정리를 마친 노아가 이번엔 그녀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시중을 들더니 하트를 힐긋 보곤 운을 뗐다.

    “근데 피시 남작은 무슨 이유로 이곳을 방문하는 겁니까?”

    “글쎄. 혹시 근위대장은 동생에게서 들은 소식이 따로 없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도에 있는 패티스를 대신해 하이에나의 영지를 지키고 있던 피시가 갑작스레 방문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이르면 이곳, 곰의 영지에서 합류할 것 같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밀리는 모양이었다. 결국 피시의 합류는 윌터 백작령이 될 듯했다.

    그렇게 급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찾아와도 된다는 말을 남겼는데 어쩐 일인지 피시는 최대한 빨리 방문하겠다는 전서만 전할 뿐이었다. 그의 형인 하트도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올 애는 아닌데.

    “우선은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 봐야겠어. 그보다 피시가 스완이랑 생각보다 더 좋은 사이가 된 모양이야.”

    이엘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도 하트는 큰 반응이 없었다. 이미 패티스에게서 넌지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노아도 저가 알고 있는 소식을 전했다.

    “앤디의 말에 따르면 제도에 있을 때도 로날드와 피시, 그리고 스완이 곧잘 어울렸다고 하더군요.”

    “응. 그래선지 피시가 스완의 안부를 묻더라고. 괜히 걱정할까 봐 스완의 상태를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경들도 알고 있으라고.”

    “예.”

    스완은 현재 고니의 호수에서 요양 중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건지 호수에 머무르는 시기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백조는 괜찮은 걸까요.”

    “본인 말에 의하면 괜찮다고 하던데 그때 르네 공의 말에 따르면 해독제가 필요한 상황인 건 맞아.”

    이엘도 노아도 모두 뱀의 독에 당해 봤기 때문에 그 맹독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나자르라고 해도 뱀의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랬기 때문에 몸에 남은 독기로 인해 노아와 이엘도 앓았던 것이고. 그러니 스완이 스스로 갖고 있는 성력으로는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스완에게 독을 뿜었던 리플이 죽었어. 그에게선 해독제를 얻을 수 없을 거야.”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요.”

    “그래. 로빈에게 직접 얻는 수밖에.”

    뱀의 수장이자 직계인 로빈은 어떤 뱀의 독이라 할지라도 그걸 거둬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리플이 죽어 버린 지금, 스완의 몸에 남은 독을 제거할 수 있는 건 지금 상황에선 로빈이 직접 치료해 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공작과 나는 로빈에게서 해독제를 받았는데도 몸에 남은 여분의 독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을 시달렸지.”

    “백조는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내가 로빈을 만나 볼까 생각 중이야.”

    “폐하!”

    줄곧 조용히 대화를 듣기만 하던 하트마저 놀란 건지 그녀의 손에서 머리를 빼며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위험하십니다. 로빈이 그걸 노리고 일부러 스완을 공격한 걸 수도 있습니다.”

    “아냐. 내가 아는 로빈이라면, 나 하나 잡겠다고 리플을 희생시켰을 리 없어.”

    “…….”

    “무엇보다 상대는 스완이었어. 자칫하면 스완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스완을 나자르로 오인한 상태인 로빈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 없어. 리플의 단독 소행이라 볼 수밖에.”

    아마 스완이 리플에겐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마치 예전의 이엘처럼, 제 주인의 눈을 가린다고 생각했겠지. 리플은 그때도 그랬다. 뱀과 인간이 연합해 늑대의 영지에 쳐들어왔을 때도, 자신을 생포해 데려가려 했던 로빈과는 달리 리플은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고 그 끝은 주드의 죽음이었다. 그 뱀은 유독 제 주인이 엮인 일엔 판단이 흐려졌다.

    “혼란스러운 건 로빈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에게 리플은 가장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뱀의 영지에 지내는 동안 이엘은 로빈이 생각보다 리플을 깊게 의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로빈이 당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직계와 방계를 모두 처리했기 때문에 그의 곁에 남은 유일한 방계는 리플과 도미닉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도미닉은 반란을 일으켜 죽었고.

    유일한 가족이고 친구이며, 가장 신임하던 수하였다. 그를 잃은 건 로빈 쪽에서 보면 엄청난 손해였을 터였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했어. 그가 정말 스완을 막지 않고 보내 줬다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니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응, 그래. 이번엔 공작도 함께 가자. 자, 하트 경. 다 됐어. 거울 봐 봐.”

    이엘이 웃으며 하트의 얼굴 가까이 거울을 내밀었다. 하트는 단정해진 제 머리를 살펴보다가 뒷머리를 손으로 슥슥 쓸더니 이엘을 향해 가벼운 묵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 인사에 이엘이 작게 웃었다.

    “이러다 나중에 황위를 물려주고 이걸 직업으로 삼는 건 아닐까 싶어.”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그것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저도 보조하는 연습을 하겠습니다.”

    노아가 드물게 흐드러진 웃음을 꽃피우며 이엘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무엇이든 좋다. 네 입에서 미래를 가정할 수만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좋아. 처음엔 아이가 그녀의 미래를 꿈꾸게 했다면, 이제는 그녀 스스로가 그 미래를 직접 그리고 있다. 그거면 족해. 충분해. 미래를 그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난 충분해.

    “그럼 그때 하트 경은 뭘 하고 싶나?”

    “저…… 말씀이십니까?”

    “응, 경 말이야.”

    이엘의 물음이 다소 뜬금없었던 건지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던 하트가 그 자리에 멀뚱히 선 채 눈만 껌뻑거렸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다. 이엘이 말하는 그때라는 건 먼 훗날의 언제일 텐데, 하트는 먼 훗날의 제 모습을 그려 보지 않았던 탓에.

    줄곧 피시와 패티스 때문에 생을 연명하며 살았다. 조이나의 죽음 이후로 모든 게 허무해진 하트가 억지로 우논의 삶을 이어 가고 있던 건 전적으로 쌍둥이인 피시와 패티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을 덧대던 하트가 웃고 있는 이엘과 노아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배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기가 생긴 것도 아닌데…….

    근데도 저도 모르게 소망하게 된다. 이엘은 인간이기에 언젠가 죽게 될 테지만 저 두 사람의 아이는 태어나 살아갈 테니까. 어쩌면 그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낳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식으로 생을 이어 가겠지.

    “저는 그때도 폐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정말? 자유롭게 살지 않고?”

    “폐하께서 원치 않으시면 물러나겠습니다.”

    원래 지금의 근위대장도 필요에 의해 하트가 맡은 직위였다. 그 자리를 놓고 노아와 다투기도 했고. 사실 하트에게 근위대장이란 직책은 과분할 정도로 높은 자리인지라 어느 정도는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답한 대답이었다.

    “그래, 그럼 계속 나의 가족이 되어 줘.”

    “…….”

    “우리 계속 함께하자, 하트.”

    이엘은 노아의 품에서 벗어나 하트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짧은 머리카락들을 다정하게 툭툭 털어 주었다.

    이상할 정도로 하트에게서 이온의 향수를 느낀다. 정말 그가 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동기라도 된 것처럼. 이 무뚝뚝한 남자의 어떤 모습에서 다정한 이온을 느끼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제 그가 정말 제 가족이 되었단 사실 하나였다.

    “언젠가 만날 나의 아이에게도 좋은 숙부가 되어 주길.”

    “영광입니다.”

    하트는 이엘에게 잡힌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당연하다는 듯 곧장 대꾸했다. 늘 무감한 대꾸뿐이었는데, 어느샌가 이엘의 말에만 애정이 실린 대답을 하게 됐다. 물론 아주 미미한 정도라 상대방인 이엘만 겨우 알아차릴 정도의 애정이었지만.

    *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폐하, 친림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되니 반갑군. 그간 백작은 잘 지냈나?”

    “예, 폐하. 살펴 주신 덕에 평온히 지내고 있습니다.”

    아주 긴 시간을 돌아 드디어 윌터 백작령에 도착했다. 하이에나인 하트의 등 위에서 펄쩍 뛰어내린 이엘이 윌터 백작과 인사하는 사이, 백작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은 그 인기척을 느끼곤 옆으로 비켜서더니 이엘에게 그를 소개했다.

    “폐하. 제 아들, 올리세스 윌터입니다.”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윌터가의 올리세스입니다.”

    이름만 무수히 들었던 자의 등장에 모두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올리세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흩뿌리며 이엘과 무리를 향해 몸을 한껏 낮춰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래, 남작의 이야기는 백작에게서 익히 들었네. 사업의 수완이 좋아서 손대는 것마다 결과도 좋다고 하던데.”

    “과찬이십니다. 심심풀이로 하는 일일 뿐인걸요. 가진 것도 아주 작은 상단이고요.”

    맑게 웃으며 거듭 손사래를 치는 올리세스가 부끄러운 듯 볼에 수줍은 미소까지 그리며 연신 고개만 푹푹 숙여 댔다. 보면 볼수록 생각했던 것과 다른 올리세스의 모습에 하트를 비롯한 무리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남작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쉬면서 많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군.”

    “예, 폐하. 영광입니다.”

    “아이고, 폐하. 여독으로 피곤하실 텐데 어서 안으로 오시지요.”

    윌터 백작은 이엘과 제 아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좋은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한껏 신난 표정으로 펄쩍펄쩍 뛰었다. 그걸 뒤에서 가만히 목도하고만 있는 노아와 하트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몇 달 전 이곳에 홀로 왔었던 노아는 그때와 다를 바 없이 깔끔한 영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제게 쏟아지는 뜨거운 눈빛에 저도 모르게 날을 세운 채 시선을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올리세스는 무구한 웃음을 지으며 노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각하. 저건……,”

    “됐어. 알고 있으니까.”

    “…….”

    “폐하께선 모르실 테니 그것만 신경 써서 조심해라.”

    노아의 주의에 뒤따르던 알폰스가 입을 다물었다. 일라이저와 하트 역시 올리세스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냥 가벼운 시선이라기엔 너무 노골적으로 훑고 간 터라 타인이 봐도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노아라고 왜 모르겠는가. 몇 달 전에 왔을 때도 지금과 같은 시선으로 저를 쳐다봤는데. 대놓고 보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음침하게 지켜본 탓에 뭐라고 따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런 건 무시로 일관하는 게 낫지. 그렇게 시선을 돌렸던 차에, 앞서 걷던 이엘과 눈이 마주쳤다.

    “…….”

    “…….”

    그녀는 빙긋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윌터 백작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모습에 노아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폐하께선 이미 알고 계신 듯한데요.”

    “…….”

    “조심해야 되는 건 저희가 아니라 공작님이신 듯합니다.”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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