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빈센트는 아내 소피아의 말에 무심히 새끼를 돌아봤다. 막상 태어났어도 우논의 새끼는 어릴 때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완전히 성장하기 전까지는 자식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데도 소피아가 행복해하는 게 눈에 걸려서 갓 태어났던 작은 스완을 돌아봤던 게 화근이 됐다.
작고 여린 생명체. 우습게도 빈센트는 인간들이 으레 제 자식을 처음 봤을 때 그렇듯, 눈동자에 눈물이 왈칵 차오르고 말았더란다. 자신과 소피아를 반씩 섞은 새끼 백조의 모습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함을 느꼈다. 우논답지 않게 인간처럼 새끼에게 감정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도 얼마 가지 못했다. 스완이 태어나고 몇 년 뒤에 1차 전쟁이 터진 것이다. 그 사건으로 상당수의 고니들이 가족을 잃었다. 그때만큼은 나자르의 보호도 소용이 없었다.
미래를 볼 수 있었던 빈센트는 제 친구였던 하이에나 시모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듯, 동족의 암컷들이 학살당하는 것 역시 막지 못했다. 그리고 아내 소피아도 그때 잃었다.
“넌 할 수 있어, 스완.”
암컷은 모조리 죽어 더 이상 자식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태. 그때 아주 잠깐 쓸데없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여기서 스완이 더 자라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면. 자신이 갖고 있는 이 성력을 전해 줄 대상이 없어지면. 그럼 성력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되는 건가? 어쩌면 운명이란 게 바뀌는 게 아닐까?
하지만 여태 그러했듯 달라지는 일 따윈 없었다. 자신이 본 미래에 스완이 인간과 계약을 맺어 뭍으로 나갔고, 끝끝내 성력을 제게서 가져가 버렸으니까.
그때서야 절감하고 받아들였다. 아, 그래. 나는 정말 아니었구나. 예감하고 있었으면서도 줄곧 작은 기대감을 버리진 못했던 모양이다.
시모네와 아내를 지키지 못한 이후로 미래를 보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싫어서 눈알을 다 뽑아 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모순적이게도 어느 미래를 기점으로 그 후를 볼 수 없게 되자 아쉬움으로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끝내 스완이 인간과 계약을 맺어 뭍으로 가게 되었던 날. 빈센트는 고요히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줬다. 재밌게 다녀오라고. 내 몫까지 즐기라는 말은 차마 못 했지만.
“말 돌리지 말구요. 아버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우논으로서의 생을 포기한 것도 아니라면서 대체 왜……!”
“말했잖아. 내 역할은 자식에게 성력을 전수해 주는 거라고.”
“그거랑 이게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내 성력이 네게 다 넘어가면, 난 내 몫을 다한 셈이 되거든. 내 역할이 끝나는 거야.”
“무슨…….”
“내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다는 의미지.”
그제야 스완은 빈센트의 말을 이해했다.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다는 건…… 죽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서, 성력을 나한테 다 주면…… 아버지는 죽는다고요?”
“그래.”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싫어요. 필요 없어요. 안 그래도 부담되고 걱정돼서 나도 미치겠는데. 차라리 아버지가 도로 가져가요, 제발!”
“스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빈센트는 진지했던 표정을 거두고 다시 특유의 생글거리는 낯으로 돌아왔다. 제 눈엔 아직도 아이 같은데, 언제 커서 이렇게 든든히 제 몫을 해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빈센트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을 뻗어 새하얀 백조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받던 스완도 견디지 못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빈센트의 손을 쳐 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성력을 갖고 싶어서 갖는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다 떠넘기고 아버지는 죽는다는 건데요.”
“네 할아버지도 그랬어.”
“…….”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랬고.”
말도 안 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우린 우논이잖아. 이래서는 인간과 뭐가 다르단 말이야. 우논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이자 선택인 우리의 수명과 생명이, 성력이 넘어감과 동시에 끝난다니. 이래서는 둔이나 테르보다도 짧은 생이잖아.
“스완.”
“…….”
“너와 황제가 했던 계약이 얼마 안 남았지?”
“……네.”
“그걸 어떻게 할지에 집중해.”
“네?”
“네가 저주 때문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넌 황제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잖아.”
그러고 보니 정말 이엘과의 계약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한 터라 그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계약이 끝나면 자신은 다시 뭍으로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럼 폐하와 드레인은 어떻게 되는 거지? 드레인의 능력 속 아이들은?
폐하의 아이는?
“아버지. 알려 주세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너도 보게 될 거야. 그때 네가 잘 판단해.”
“하지만……!”
“아까 나자르의 예지와 고니의 예지의 차이점에 관해 물었지?”
빈센트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건지 말을 돌렸다. 그는 몸을 뒤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듯 수면 위에 둥둥 뜬 채 스완의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상당히 정신없는 행동이었지만 스완은 빈센트를 보채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주 조금은 달라진 스완의 모습에 빈센트가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자르는 미래를 확실히 보지만, 넌 아니야.”
“그럼…….”
“아주 여러 가지가 보일 거야, 처음엔. 그중에서 진짜인 걸 찾는 것에 집중해.”
“그걸 어떻게 찾아요?”
“사실 이건 조언이랄 것도 없어.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거든.”
“…….”
“네가 자꾸 마음이 쓰이고 너를 자꾸 조급하게 만들고. 유난히 네 신경을 거슬리는 것들이 근 시일 내로 일어날 거야. 사실 처음엔 잘 몰라. 그게 정말 예지인지, 아니면 상상인지. 혹은 꿈인지.”
빈센트의 말에 스완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모르겠다. 몽롱한 가운데서 봤던 것들이 정말 내 예지인지, 환상인지, 꿈인지. 통 모르겠다.
“처음엔 그냥 겪어 봐. 그래야 느낌을 알아.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성장하는 거란다, 스완.”
“…….”
“별로 큰 도움이 안 되지? 사실 내 성력이 너무 약해져서 이래저래 컨디션이 안 좋아졌거든.”
“괜찮은 거예요?”
“음, 거짓 없이 말하자면 안 괜찮아. 하나도.”
웃고 있는 빈센트의 얼굴에서 상당한 피로감을 엿보았다. 스완은 미안한 듯 제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빈센트가 호탕하게 웃으며 스완의 등을 세게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았다.
“뱀의 영지에서 독을 마셨니?”
“네. 제거는 했는데…… 완전히 안 돼서 아버지한테 부탁하러 왔던 거예요.”
“미안하게 됐네. 지금으로선 나보다 네 성력이 더 효과가 있거든. 이것도 별 도움이 안 되겠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말을 하다가 말고 머뭇거린다. 스완은 입술을 깔짝거리다가 돌연 빈센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버지. 조금만 더 늦추면 안 돼요? 나한테 주는 성력이요. 그거 조금만 늦추면 안 돼?”
“…….”
“내 가족은 아버지뿐이잖아요. 나 두고 가지 마요, 네?”
“뭍에서 인간들이랑 어울리더니 감정적으로 변했니?”
빈센트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는 손을 뻗어 저보다 큰 스완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네. 친구도 없이 지내던 우리 아들이 뭍에 가족을 만들고 말이야.”
“…….”
“난 아직도 황족과 나자르를 신뢰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네 가족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스완.”
고작 한 달 남짓 남았는데. 스완은 고작 이 한 달밖에 안 되는 기간을 빈센트와 함께할 수 없었다. 제게는 시간이 부족했고, 며칠 내로 다시 호수를 떠나 제도로 가야 하니까.
이제 가면 또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언할 수가 없는데……. 빈센트는 호수에 발이 묶여 나오지 못하니 자신이 이곳으로 와야만 하는데…….
“울지 말고. 고니는 그렇게 쉽게 우는 게 아니다.”
“안 울어요.”
“너라면 성공할 거야, 스완. 네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넌 할 수 있어.”
“당연하죠. 저만 한 백조가 어디 있다고요.”
“그래.”
스완의 허세에 빈센트가 엷게 웃었다. 그는 아직도 한참 어린 자신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보이지 않는 미래를 그려 봤다.
내가 없는 이곳에서 스완은 어떻게 될까. 부디 우리를 이 호수에 묶어 버린 저주의 형벌이 끝나고, 내 아들은 뭍에 만든 새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제 삶에 미련은 없었는데, 아들의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건 꽤 큰 미련으로 남을 듯했다.
*
“다음 영지는 윌터 백작의 영지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곰의 영지를 떠날 채비를 하던 이엘의 앞에 노아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들고 있던 겉옷을 그녀의 어깨 위에 걸치고 주름진 곳을 손으로 툭툭 털어 주었다. 이엘은 노아의 시중을 가만히 받고 있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네. 출발 전에 좀 자르자.”
“괜찮습니다.”
“내가 해 줄게. 이리 와.”
그녀는 밖에 대기 중이던 하트와 근위대 몇을 불러 자리를 마련했다. 노아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의자에 몸을 앉히고 말았다. 그런 뒤에도 한사코 사양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폐하.”
“근위대장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 있거라. 두 시간 정도 뒤에 출발할 테니 모두에게 전하고.”
“예, 폐하.”
노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근위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결국 노아는 포기한 건지 긴 한숨을 쉬며 얌전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 냈다.
이엘과 노아의 뒤에 있던 하트는 천으로 덮은 트레이를 가져와 대령했다. 이엘은 익숙하게 트레이에 놓인 가위를 집어 들고 거침없이 노아의 머리카락을 서걱서걱 잘랐다.
“올리세스의 마을에서부터 자르지 않았던 모양이네.”
“아닙니다. 나오면서 자르긴 했는데 경황이 없어 대충 잘랐더니 또 이렇게 금세 자랐습니다.”
“많이 자랐어.”
“덥수룩해서 보기 싫으셨군요.”
부러 분위기를 띄우려는 건지 노아가 볼멘소리를 내며 농담을 던지자, 이엘이 작게 웃으며 부산스럽게 가위질을 했다. 그 가위질 소리에 하트는 저도 모르게 제 뒷머리를 손으로 매만졌고, 거울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본 이엘이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공작이 끝난 뒤에 근위대장도 이곳에 앉도록 해.”
“아닙니다.”
“경의 머리카락도 많이 자랐어.”
“……알겠습니다.”
하트의 떨떠름한 대답에 노아와 이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했다. 열린 창 사이로 스며든 햇빛에 부유하던 먼지가 노아의 시선에 잡혔다. 그는 장난치듯 손을 뻗어 먼지를 잡으려던 시늉을 하다가 이엘에게 저지당했다.
“가만히 있어.”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자, 됐다. 이제 좀 깔끔하네.”
이엘이 노아의 앞으로 작은 거울을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시원해진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어 정리했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길어진 머리카락 탓에 갑갑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이제야 속이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마음에 들어?”
“예, 폐하. 진작 폐하께 말씀드렸어야 했나 생각했습니다.”
“후후. 그러게, 보기에도 좋구나. 자, 다음은 하트 경. 경도 앉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