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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7화 (397/488)

397화

마주 본 이엘의 녹색 눈동자에 약간의 설렘이 담겨 있었다. 왜 선물을 받는 이보다 주는 사람이 더 설레는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다. 르네는 피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특별히 세공에 신경을 썼어. 그대가 가보로 간직하겠다고는 했지만 비상시엔 곧장 쓸 수 있게 실용성도 중요하니까.”

“…….”

“어때?”

르네는 워낙 감정 표출이 적은 편이라 표정만 봐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닌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이엘이 슬쩍 물었을 때.

“……의미를.”

“응?”

“만들어 주시면 어떡합니까.”

르네의 손과 눈길이 닿은 곳은 금화살의 끝 부근이었다. 깃이 있는 곳 앞쪽인 윗마디에 아주 작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화살 자체가 매우 가늘었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야 그곳에 뭔가가 새겨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력이 좋은 르네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꽃이다. 자신과 이엘의 추억이 담긴 그 꽃. 제겐 이미 의미로 차고 넘칠 만큼 그득한 그 꽃 그림이 윗마디에 새겨져 있었다. 그 꽃만 갖고 있는 독특한 외양 때문에 단번에 알아봤다.

“마음에 안 드는구나?”

르네가 중얼거리듯 말한 터라 그녀가 오해한 모양이었다.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더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이엘을 향해 르네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폐하. 활과 화살이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눈이 멀 뻔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과장된 칭찬에 이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공은 그런 농담이 어울리지 않는대도…….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뻤던 건지 이엘은 르네의 앞으로 조금 더 다가와 활과 화살을 가리키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이 화살 끝에 아주 작은 폭약이 들어 있어. 어딘가에 꽂힐 정도로 강하게 쏘는 게 아닌 이상 터지진 않지만, 그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니까 되도록 소장 용도로만 쓰기를 바라.”

“물론입니다. 가문의 가보로 영원히 남을 겁니다. 이 화살을 쓸 일이 없도록 안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어서 가도록 해. 스완이 기다리겠구나.”

“예, 폐하. 그럼 다시 뵙는 날까지 부디 몸조심하시길.”

이엘이 내민 손을 잡고 그녀의 반지 위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가 떨어진 르네는 케이스를 챙겨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광활한 하늘로 날아올랐다.

*

뱀의 영지에서 탈출한 스완은 르네에게 부탁해 자신이 살던 호수에 도착했다. 리플에게 당한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라 이대로 제도로 향하면 내리 며칠을 앓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왕 요양할 거면 몸과 마음이 편한 동족의 호수가 더 나을 거라 판단했다.

“아버지!”

르네와는 숲 어귀에서 헤어진 뒤 홀로 호수가 있는 곳까지 향했는데, 어쩐 일인지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보통 때였으면 미리 알고 호숫가 근처까지 나와서 저를 놀려 댔을 분이신데.

“아버지?!”

“스완이니?”

“어? 아저씨가 웬일이에요?”

흑조 한 마리가 안개를 뚫고 스완이 있는 뭍을 향해 유유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고니들은 웬만해선 뭍 근처까진 오지 않는다. 보호석이 바다에서부터 떠오르기 시작한 이후로는 인간들의 출입이 잦아진 탓에 경계가 더 심해졌다.

게다가 스완이 계약을 맺고 뭍으로 올라가면서 고니들의 존재를 흐릿하게 해 주던 나자르의 보호가 약해졌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경계가 강화된 시점이었다.

그런 와중에 무리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 흑조의 등장에 스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호수에 풍덩 빠졌다. 금세 커다란 백조의 모습으로 돌아간 스완이 다짜고짜 흑조를 보챘다.

“아버지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일단 따라와.”

“아버지한테 무슨 일 생겼죠. 무슨 일인데요? 네?”

“타이밍이 좋았네.”

“그게 무슨……,”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흑조는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이 유감이란 표정이었다. 스완은 고니의 무리 중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그의 아비인 빈센트는 모든 이종족이 그렇듯 제 아들을 유별나게 키우진 않았다.

다만 그 관계는 꽤 돈독해서 부자지간보다는 형제지간에 더 가까울 정도로 살뜰한 사이였다. 그 탓인지 스완은 고니 무리가 모두 아끼는 막내였다.

“얼마 안 남다니요?”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아버지가 어디 다쳤어요? 갑자기 생이 무슨…… 우논이잖아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하더라도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스완은 당황한 건지 그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며 파동을 일으켰다.

“자세한 건 네가 직접 빈센트에게서 듣도록 해.”

“아저씨!”

흑조는 그 말만 남기곤 스완을 등진 채 호수 깊은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뒤에 남겨진 스완은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한 배신감을 느끼며 숨을 간헐적으로 헐떡였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지? 우논은 별일이 없다면 영존한다. 그건 고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간혹 영원히 살 수 있는 생을 끊어 내고 테르들처럼 노화와 함께 늙어 가기를 자처하는 우논도 있었다. 그럼 아버지가 그 길을 선택했다는 건가?

여기서 고민하는 것보다 흑조의 말처럼 직접 빈센트를 만나 물어보는 게 빠를 거라 생각했다. 스완은 서둘러 안개를 뚫고 호수의 안쪽 깊은 곳까지 헤엄쳤다.

그렇게 한참을 가서야 비로소 거대한 연잎들과 마주했다. 수많은 연잎을 헤치고 또 한참을 들어갔을 때 작게 웅성거리던 소리들이 점차 커지는 게 느껴졌다.

“안녕, 스완.”

“어서 오렴.”

“오랜만이네.”

부리로 제 털을 솎아 대던 일부 고니들이 스완을 먼저 발견하고 알은체를 해 왔다. 그들에게 대충 인사를 해 준 스완은 조금 전에 뭍으로 마중 나왔던 흑조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헤엄쳐 향했다.

“아버지는요?”

“나 찾아?”

당장이라도 시름시름 앓고 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저를 불렀다. 빈센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상체만 위로 둥둥 뜬 채 그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긴장이 풀리고 탈력감이 찾아왔다.

“아버지!”

“얘는 오랜만에 본 아빠한테 소리나 지르고. 그렇게 안 질러도 다 들린다, 아들아.”

“대체 무슨…… 아니, 아까 아저씨가 한 말은 그럼 뭐예요?! 생이 얼마 안 남았느니, 어쩌느니. 그게 다 무슨 말이냐고요.”

“얘기했어?”

“어. 네 아들도 알아야지.”

생글생글 웃던 빈센트가 제 옆으로 다가온 거대한 흑조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말 그대로야, 스완.”

“아버지. 설마 스스로 우논의 삶을 포기했다는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냐.”

“그럼요? 다쳤어요? 치명상이라도 입은 거예요?”

“잠깐 자리들 좀 피해 줘.”

빈센트의 말에 몰려들었던 고니의 무리가 하나둘 흩어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빈센트는 돌연 백조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스완을 향해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물 위에 뜬 수초들을 헤치고 지나가며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이제 말해 줘요.”

“그 전에 네 성력을 좀 볼까?”

“아니, 갑자기 무슨 성력이에요?”

“미래가 보여?”

“…….”

“보이는구나?”

“확신할 수 없어요. 그렇잖아도 아버지한테 물어보라고 해서 찾아온 거기도 하고요.”

“누가? 나자르가?”

빈센트의 물음에 스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의 곁을 떠나기 직전. 스완은 이상한 환상을 보게 됐다.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환상 속에서 피시가 피 흘리며 쓰러진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도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폭주해 버린 상태로.

그게 설마 성력을 갖게 되면서 얻게 된 예지일까 싶어 오드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오드는 도리어 빈센트를 찾아가 보라고 조언했다. 나자르와 고니의 예지는 차이가 있다면서.

“네가 예지를 갖게 됐다는 걸 확신하는 순간부터 네 예지 능력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형태로 강력해질 거야.”

“아이씨, 그럼 안 되는데…….”

“왜?”

“예지는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면서요. 아버지 다리가 그렇게 된 것처럼, 함부로 말하면 저주를 받잖아요.”

“어차피 넌 갖게 될 수밖에 없어. 내 성력이 네게로 넘어가는 거니까.”

“아직 다 넘어온 게 아니잖아요.”

“이제 곧이야.”

“…….”

“한 달 정도 남았을까.”

“한 달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한 달 후면 내 성력이 네게 온전히 다 넘어갈 거라고.”

빈센트의 말에 스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제 안으로 들어오는 성력의 속도가 벅찰 정도로 거세더니 막판에 휘몰아치려 그랬나.

드레인과 성전기사단장이 그동안 자신의 체력을 증진시키는 데에 열심이었던 게, 어쩌면 이걸 염두에 두었던 건 아닌가 싶다. 급속도로 휘몰아칠 성력을 받아 낼 신체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한편 빈센트는 제 얘기를 듣고 골몰하는 스완을 바라봤다. 원래 이종족은 다 그렇다. 특정 종족들을 제외하면 자식을 낳는 게 번식욕의 결과일 뿐, 애정을 갖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빈센트의 선조들과 빈센트는 달랐다. 갖고 있는 성력을 오롯이 전달하기 위해 낳는 자식의 개체수는 대개 한 마리였다. 그러다 보니 원치 않아도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스완은 빈센트가 어렵게 가진 아이였다. 짝을 짓고 몇십 년이 흘렀지만 좀체 새끼를 갖지 못하던 빈센트와 그의 아내가 포기할 때 즈음, 스완이 찾아왔다.

사실 빈센트는 어쩌면 자신의 역할이 성력을 전수하던 선조들과 달리, 이어받은 성력을 사용하는 역할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건 성력을 전해 줄 필요 없이 자신의 대에서 끝나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스완이 태어났을 때. 기분이 아주 조금 미묘했다.

‘빈. 우리 아이야. 그토록 원하던 우리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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