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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6화 (396/488)

396화

도망가라는데 뜬금없이 능력을 어디까지 쓸 수 있냐는 스완의 말에 호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들의 앞에 있는 뱀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이는 놈들의 주변을 불로 장벽을 만들어 둥그렇게 감싼다고 해도 화력이 떨어질 것이다. 거리도 있는 데다가 능력을 넓게 펼칠수록 화력이 분산되는 건 당연했으니까.

“불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란 소리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지속 시간은 떨어지고 화력도 약할 거다. 차라리 이 앞에 불의 장벽을 높게 세워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게 더 나아.”

“아니. 내 말대로 해 줘. 시간은 아주 짧아도 돼. 화력이 낮아도 상관없어. 일단 불로 울타리를 세우기만 하면 내가 알아서 할게.”

“성력은 살의를 담으면 안 된다고……!”

“너 내가 무슨 종족인지 잊었어?”

“…….”

“성력은 도망치는 데 사용할 거고, 여긴 내 종족의 능력을 쓸 거니까 상관없어.”

고니의 능력이라면 환각?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어려울 텐데……. 호랑이는 아주 잠깐 갈등하는 듯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와 일단 스완을 등에 태웠다.

“내가 셋 하면 능력을 쓰는 거야.”

“알겠다.”

“하나. 둘.”

“…….”

“셋! 지금이야!”

온 힘을 다해 뻗어 나간 불길이 순식간에 뱀들의 주변을 울타리 치듯 둘러쌌다. 모여 있던 뱀들이 스완과 호랑이를 쳐다보는 순간, 스완이 눈을 크게 뜨며 그들에게 환각을 걸었다.

말도 안 되는 화력으로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는 것을 목도한 뱀들은 갑자기 우왕좌왕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건 은신으로 숨어 있던 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간다!”

스완이 소리를 지르며 이동을 위한 성력을 썼던 타이밍에 무언가가 스완의 목에 날아들었다.

“크헉!”

공격을 받고 스완이 호랑이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호랑이는 당황하지 않고 떨어지는 스완의 옷을 이빨로 물어 낚아챈 뒤, 공격이 들이닥친 곳을 향해 화염을 폭탄 던지듯 분출했다. 그와 동시에 스완의 성력이 발동하며 둘은 뱀의 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스완!”

경계 끝에서 스완과 호랑이를 기다리고 있던 르네와 동맹족들이 둘을 발견하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호랑이는 내내 물고 있던 스완을 바닥에 내려 주고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처음 로빈이 타고 있던 뱀에게서 공격받은 다리 쪽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였다.

“괜찮나?! 대체 이게 무슨……!”

르네는 목을 붙잡고 꺽꺽거리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스완의 상태부터 살폈다. 뭔가가 목덜미 부분을 스친 것 같은데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으로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걸 보면 뱀의 독이 직격으로 닿은 것 같았다.

“일단 갖고 있는 해독제를 다 가져와라!”

“예!”

“그리고 나머지는 저 녀석의 상태도 살피고!”

“알겠습니다!”

혼란에 빠진 무리들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찾은 르네가 빠르게 명령을 전달했다. 그의 지령을 받고 일부는 쓰러진 호랑이를 챙겨 막사 쪽으로 향했고, 나머지는 응급처치를 위해 약을 가지러 이동했다.

“괘, 괜찮, 괜찮습니다…….”

“괜찮긴 무슨. 가만히 있어라. 움직이면 독이 더 퍼질지 몰라.”

르네는 로빈의 독을 맞고 쓰러져 몇 달을 누워 있던 노아를 떠올리며 일어나려는 스완을 다시 눕혔다. 그러나 스완은 완강했다. 그의 손을 밀치고 상체를 세우더니 자신의 손을 환부에 갖다 댔다.

그 순간이었다. 아주 새하얀 빛이 스완의 손에서 뻗어져 나와 그 희고 가는 목을 감싸더니 이내 주변까지 드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르네마저 놀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하아, 진짜 죽다가 살아났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확실히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조금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었다. 스완의 치유 능력을 처음 본 르네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막사가 있는 곳을 검지로 가리켰다.

“너와 함께 왔던 녀석과 부상당한 동맹족 일부가 저곳에 있는데 그들도 치료할 수 있나?”

“물론이에요. 오드 님처럼 완벽한 치료는 못 하지만 임시방편은 될 거예요. 제가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스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스완의 치유 능력에 감탄한 듯했다. 약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르네의 귀에 들렸다.

그러나 르네는 스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결국 뒤따라 일어난 그가 앞서 걷던 스완을 붙잡아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은 건가?”

“누구요? 저요? 괜찮은데요?”

“완벽히 해독한 건 아니지.”

“…….”

“예전에 오드 님도 노아의 몸에 쌓인 로빈의 독을 제거하지 못하셨다. 그럼 너도 지금 완벽히 치료된 건 아닐 텐데.”

쓸데없이 예리하긴. 스완은 긴 한숨을 쉬더니 르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공작님만 알고 계세요. 지금은 두 발로 서 있는 게 고작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독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뱀의 영지에서 장시간 머무른 탓에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직전엔 소모라를 정화하느라 힘을 다 썼고. 솔직히 이렇게까지 버티는 게 용할 정도라고, 스완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일단은 안에 들어가서 동맹군을 치료하고 그 다음에 쉬겠습니다.”

“됐어. 일단 넌 쉬어. 다들 부상이 심하지 않으니까.”

“아니에요. 해야 합니다.”

“대체 그런 고집은 어디서 배운 거야.”

“폐하께 배웠는데요?”

“…….”

“직접 해 봐야 돼요. 써 봐야 실력이 늘어난다고요. 치유 능력이 절실해요, 저한텐. 그래야 그 애들을 살릴 수 있으니까.”

스완은 드레인을 통해 만났던 그 소녀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직도 모자라다. 겨우 이 정도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그 애들을 만나는 날까지 성력을 더 갈고닦아야만 한다.

그의 강력한 의지를 인정한 르네는 잡고 있던 스완의 팔을 놓아 주며 말했다.

“해독제를 구해 주겠다.”

“어떻게 구해 주실 건데요? 절 공격한 게 어떤 놈인지 모르는데…….”

“저길 봐.”

르네가 가리키는 쪽을 응시한 스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 조금 전 호랑이와 자신이 도착한 곳엔 누군가의 잘려진 팔 한쪽이 덩그러니 남겨 있었다. 윽! 저게 뭐야!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눌러 참으며 시선을 돌렸다.

“맙소사. 역겹네요.”

“저게 누구 팔인지 알겠나?”

“저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널 데리고 온 녀석이 마지막에 공격을 한 모양인데. 너희가 이동하면서 잘린 팔도 딸려 온 듯하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공격까지 했다고? 스완은 저를 데려왔던 호랑이를 속으로 칭찬하며, 다시 시선을 잘린 팔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거북함이 느껴지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토막 난 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 누군지 알겠어요!”

“누군데?”

“리플. 로빈의 옆에 있는 놈이요!”

“…….”

“저 팔은 놈이 다쳐서 쓰지 못하는 팔이거든요. 예전에 누구한테 공격을 받아서 못 쓰게 됐다던데. 쯧, 결국 완전히 잘리고 말았네.”

스완의 말을 들은 르네가 잘린 팔을 빤히 바라보며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어린 늑대가 죽고 괴로워하던 이엘이 자신의 영지에 뱀이 들이닥쳤을 때, 늑대의 복수를 하겠다며 자신이 줬던 금화살을 던지려 했었다. 그게…… 저기 잘린 팔의 주인공 리플이었다.

“넌 그만 막사로 가 봐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치료하고. 네 해독제는 내가 구해다 줄 테니.”

“알겠습니다.”

스완을 돌려보내고 뚜벅뚜벅 걸어가, 비참하게 버려진 리플의 팔이 있는 곳에서 섰다. 그는 주저 없이 잘린 팔을 주워 올리더니 품에서 꺼낸 커다란 천에 그 팔을 담았다.

그녀는 놈을 죽이지 못해 괴로워했다.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대의를 위해 그 마음을 접어야 했다. 차라리 자신의 영지에서 이엘이 리플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때 자신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편했을까. 르네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복수는 결국 의미 없는 짓에 불과하다. 그건 누구보다 르네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원한의 대상이었던 루시우스 러셀을 제 손으로 죽였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던 제 과거가 그 증거였다.

“결국 돌고 돌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폐하.”

잘린 팔 부위는 불로 지져 있었다. 아마 호랑이의 능력인 화염이 놈의 팔을 자를 정도로 강력하게 터졌던 모양이었다. 잘린 부위가 이 정도라면 그 대상도 살아 있지는 못할 터였다. 지금쯤 죽었겠군. 이엘이 하지 못했던 복수가 결국 이렇게 돌고 돌아 이루어졌다.

“각하. 그 흉물을 가져가실 겁니까?”

“그래. 선물로 드릴 것이다.”

“네? 누구한테요?”

르네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상할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 두 개나 이엘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하나는 갑작스런 피시의 방문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뱀의 영지에서 무사히 탈출했다던 스완으로부터 받은 누군가의 사체 일부였다. 정확히는 르네가 스완을 대신해 가져온 거였지만.

소모라를 습격하는 것에 성공했고 정화하는 것 또한 성공했다. 게다가 뱀들이 허가 없이 가져가 쌓아 두었던 보호석들마저 모두 탈취했다. 그런 승전보 속에서 르네는 다소 뜬금없는 사체를 가져왔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이엘마저 미간을 좁힌 채 르네의 해명을 바랐다. 뱀의 영지에서 탈출하는 것에 성공한 스완은 제도로 가려던 예정을 바꾸어, 자신이 살고 있던 호수에 들르겠다고 했다.

달라진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이엘이 머물고 있던 곰의 영지로 향한 르네는 그날 수거했던 리플의 잘린 팔을 함께 들고 왔다.

“지난날, 제가 폐하의 복수를 방해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복수라면…….”

“예. 제 영지에 뱀이 급습하여 폐하께서 늑대와 함께 도피하실 때, 풀숲에서 화살을 던지려던 폐하를 제가 막았던 그 일 말입니다.”

르네의 부연 설명에 이엘도 잊고 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쥔 그녀는 르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앞에 바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공작이…… 처리했나?”

“아닙니다. 조금 전에 보고드릴 때 언급했던 스완과 호랑이를 공격했다던 놈이 그놈이었습니다.”

“…….”

“이동 중에 잘린 팔이 함께 딸려 온 모양입니다.”

리플의 팔이라고? 살짝 덮여 있던 천을 걷어 내고 나니 불에 그을려 절단된 사체를 두 눈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주드를 지키지 못했던 밤에 자신이 검을 찔러 넣어 놈의 인대를 끊어 놨는데, 이렇게 받은 사체에선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새카맣게 불에 탄 탓에.

“호랑이의 공격을 받았나 보군.”

“아마 죽었을 겁니다.”

“…….”

“늦게나마 폐하의 마음의 짐을 덜어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마음의 짐이라……. 르네의 말을 곱씹으며 마음에 묻었던 주드와의 추억을 되짚었다. 이제는 그 애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그 애가 죽고 난 이후의 시간이 더 길어졌는데, 왜 자신에겐 그때의 짧았던 시간이 생의 전부였던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손에 받아 든 사체의 일부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리플을 마주할 때마다 그를 죽여 주드의 복수를 완성하고 싶단 생각을 몇 번씩 하곤 했는데. 결국 돌고 돌아 이렇게 내 손으로 들어왔구나.

“노아 공.”

“예, 폐하.”

“불에 태우게.”

“알겠습니다.”

노아 역시 그 사체가 리플의 것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제게 리플의 팔을 건네주는 그녀의 표정이 오묘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르네 공. 쉬었다가 갈 건가?”

“아닙니다. 바로 복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니와 호수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알겠어. 스완을 잘 부탁해.”

“폐하께서도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잠깐만, 르네.”

이엘이 독수리로 변하려던 르네를 붙잡아 세웠다. 그녀는 뒤에 있던 하트에게서 뭔가를 받아 르네를 향해 내밀었다.

“이건…….”

“약속했잖아. 그대에게 주겠다고.”

이엘이 혼자 들기에도 버거울 만큼 커다란 금색 케이스였다. 르네는 혹시나 이엘이 다칠까, 서둘러 케이스를 받아 양손에 들었다.

“열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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