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5화 (395/488)

395화

“우선 진정하십시오, 남작님. 정신이 돌아오는 대로 확인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아스타로가 웃으며 흥분한 올리세스를 진정시켰다. 그는 뒤에 선 호위기사에게 올리세스를 저택으로 모시라며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그러곤 조용히 문을 닫아 어두워진 공간 안에 남았다.

“리노 님.”

“…….”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형제님께선 저희의 귀빈이시니 부디 조용히 머물다 가셨으면 좋겠다고요.”

아스타로는 자신이 이 마을로 오게 된 시간을 천천히 되짚어 봤다. 그저 인상이 멀끔하고 목소리가 나긋하다는 이유만으로 올리세스에게 선발이 되어 지금껏 가짜 사제로서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언변은 날 때부터 뛰어났다. 어릴 땐 거짓말로 귀족들을 속여 그걸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돈 때문에 사람을 속였던 건 아니다. 제 별것 아닌 거짓말에 껌뻑 속아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지켜보는 것에서 아스타로는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그것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올리세스가 이런 가당찮은 제안을 해 왔을 때 주저함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제국에서 황제보다 높은 존재인 나자르. 그 나자르의 가르침을 받은 척, 가짜 사제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아스타로는 놓칠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망쳐?”

채찍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르드……. 몇 달 전에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정착했던 그놈. 보통의 인간들과 달리 커다란 덩치와 번듯한 외모 탓에 놈의 주변엔 늘 사람이 들끓었다. 이제 슬슬 다른 마을에 포교를 진행할 예정이었던 아스타로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였다.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하여 처음엔 이곳 생활을 어려워하는 듯싶다가 금세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주어지든 막힘없이 해내는 노르드의 모습은 아스타로가 그토록 바랐던 존재였다. 선전용으로 딱 알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놈을 믿고 이것저것 맡겼던 건데…….

근데 놈이 불을 지르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심지어 그렇게 떠난 게 몇 달 전인데 이제야 방화범이 놈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리석어도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다. 아스타로는 배신감과 수치심에 얼굴이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감히 나를 속여?

내가 속이는 역할이 아니라 속아 넘어간 멍청이였다고?

“놈이 네게 뭘 물어봤지?”

“난 몰라요…….”

“기억이 안 나면 기억이 나게 만들어 주는 수밖엔 없지.”

아스타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서 덜덜 떠는 리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끝으로 그를 툭툭 쳤다. 그러곤 쥐고 있던 채찍을 위로 쳐들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리노인지 노르드인지는 관계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제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

*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스완은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호랑이의 등 위에 올라탄 채, 아직도 새하얀 빛이 은은하게 퍼져 있는 소모라 쪽을 응시했다. 정화에 성공했다. 분명 정화에 성공했는데 이곳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아수라장이 됐다.

“내가 해 놓고도 믿기질 않네.”

스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되짚었다.

이엘이 정신을 차리고 며칠이 더 지나서야 스완도 의식을 되찾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스완을 보며 로빈과 뱀들은 크게 안도했다. 사실 스완이 기절했던 건 뱀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인데도, 로빈은 그것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없었던 일인 것처럼 스완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마치 그가 소모라 땅을 정화하려다 소식을 받고 달려온 뱀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일 따윈 없었다는 듯이. 오히려 전보다 더 극진히 스완을 섬겼다.

뱀의 계획엔 나자르인 스완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혼을 쏙 빼놓으려는 듯했다. 그래서 스완도 정신을 차린 뒤로는 그것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완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소모라를 정화하고 이곳을 탈출해야만 한다는 일념 하나로 끈질기게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이렇게 소모라 땅에 숨어들어 정화하는 데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이봐, 백조. 넋 놓지 말고 정신 붙들어 매라!”

스완을 태운 채 뱀의 영지를 빠져나가던 호랑이가 넋 나간 그의 정신을 깨웠다. 처음 스완과 이엘이 기절했을 때 뱀의 영지로 정찰 왔던 호랑이와 사자, 그리고 독수리가 줄곧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스완의 소모라 2차 정화 시도에 맞춰 외부에서 함께 습격해 뱀들의 진영을 뒤흔들었다.

“폐하께선 널 제도에 데려다주라고 하셨다. 그곳까진 그렇게 멀지 않으니 조금만 정신을……크어억!”

쌔액―!

호랑이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아무것도 없던 땅 아래서 뭔가가 치솟아 올라 스완을 태우고 있던 호랑이의 다리를 물어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호랑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등 위에 타고 있던 스완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윽!”

혼미했던 정신을 겨우 붙잡은 스완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뿌연 시야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얌전히 있으면 모르는 척해 주겠단 의미라는 것도 못 알아먹고 이렇게 일을 벌이다니.”

파스스― 소리와 함께 뱀의 은신이 벗겨졌다. 거대한 뱀의 머리통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빈이었다. 급한 곳이 소모라이니 곧장 그쪽으로 향할 거란 예측을 벗어나고, 로빈은 스완을 잡으러 이곳까지 직접 찾아왔다.

“소모라만 정화시키면 일이 다 해결되는 줄 알았나?”

“당신…….”

“나 외에도 ‘그’와 만나려는 자들은 많아. 그때마다 이렇게 정화하며 견딜 건가?”

올리세스를 말하는 건가? 올리세스도…… ‘그’를 만나려고 하는 거야? 스완은 급한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켜. 날 보내 주지 않으면 여기서 당신을 공격할 테니까.”

“성력은 살의를 담아서 사용하면 안 되지 않나?”

“…….”

“네가 날 공격해 봤자 겨우 회피용밖에 더 될까.”

스완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심호흡했다. 로빈의 말처럼 살의를 담아 공격하는 건 안 된다. 자신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무슨 저주를 받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의 능력인 환각을 사용하는 건 가능하다. 물론 그렇게 되면 로빈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겠지만 지금은 탈출을 우선순위에 두는 게……,

“보내 줄 테니 폐하께 내 말을 전해.”

“뭐?”

“올리세스도 ‘그’를 만나려고 할 거야. 어쩌면 만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난 폐하를 살리기 위해 그분의 아이를 희생시키려 했지만, 올리세스는 ‘그’를 불러내 폐하를 희생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그건…….”

“막아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올리세스란 소리다.”

로빈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옆으로 비켜, 부상을 당한 호랑이와 스완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갑자기 이렇게 날 보내 주는 이유가 뭐야?”

“싫나? 원하면 마음껏 공격해 주고.”

“…….”

“내 목표는 나타니엘이 ‘그’에게서 벗어나는 거다. 그녀가 놈에게 붙잡혀 있다는 걸 너희도 알고 있을 텐데 내 계획을 따르지 않고 이렇게까지 버티는 걸 보면…… 너희도 무슨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

로빈은 마지막으로 노아의 선택을 믿었다. 그는 이엘의 일이라면 이성도 잃을 정도니 그녀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제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겠지만, 결국 그도 이종족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희생해 이엘을 살리는 게 이종족다운 선택이다.

안타깝지만 이종족의 세계는 원래 그런 것이다. 인간들처럼 매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때마다 필요한 선택을 하며 사는 것. 그게 이종족의 규율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이라면 이엘을 위해 이엘의 아이를 버리는 게 맞는 일이었고. 어차피 약한 새끼는 버리는 게 부지기수인 곳이 이곳이다.

그래서 노아를 믿었다. 그가 카이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저 어린 나자르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만 하더라도, 로빈은 노아가 마음을 굳게 먹고 제 손을 잡은 거라고 믿었다.

“카이로스. 어차피 내가 물어봤자 너희 계획을 내게 말해 주진 않을 거지?”

“당연한 소리를 하네.”

“소모라는 걱정 마라.”

“…….”

“네가 깨끗하게 정화하는 바람에,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허무할 정도로 깨끗하게 정화되는 소모라를 바라보며 로빈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건 누군가의 체스판 위가 아닐까 하는. 체스 말에 불과한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하지만 제2의 소모라, 제3의 소모라는 언제든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진 말고.”

“정말 날 그냥 보내 준다고……? 이렇게 그냥?”

“어차피 공격해 봤자 네 옆에 있는 호랑이 놈만 더 다치는 거 아닌가? 넌 성력으로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로빈의 말에 스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뱀은 은신을 할 수 있으니 당장 여기만 하더라도 몇 마리나 숨어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맞붙는다면 스완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혼자라면 몰라도 부상당한 호랑이를 보호하며 도망치기엔, 제 성력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으니까.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여길 벗어나야 일행과 합류해 제도로 갈 수 있을 테니. 스완은 제게 눈빛을 보내는 호랑이의 등에 잽싸게 올라탔다. 그를 태운 호랑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꽉 붙잡아! 전속력으로 달릴 테니까.”

“알겠어!”

언제 또 공격이 올지 몰라, 스완은 계속해서 뒤를 힐끔거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보내 준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건지 뒤쫓는 뱀은 없었다.

정말 이대로 보내 준다고? 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려 하지 말라는 이엘의 충고가 떠올랐지만 정말 마음을 바꿔 먹고 이렇게 보내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스완. 잠깐 내려야겠다.”

“뭐? 갑자기 무슨……,”

뱀의 영지 끝자락에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여기만 지나면 동맹족을 만나 제도까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완은 달리던 속도를 멈추고 저를 내려 준 호랑이를 힐끔 쳐다보다가 그 너머에 잔뜩 깔린 뱀들을 노려봤다.

“넌 성력을 써서 그대로 여길 빠져나가라.”

“뭔 소리야! 그럼 넌 어쩌게!”

“네게 벌어 줄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조금이다. 내가 불로 시야를 가리면 곧장 이동해!”

“아, 정말!”

호랑이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우논이 검을 꺼내 들었다. 이런 도구를 손에 쥐는 것보다 본체의 모습에서 싸우는 게 낫지만 스완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옷을 붙잡은 스완이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너 어디까지 화염 능력을 쓸 수 있어?”

“뭐?”

“저놈들이 있는 곳을 불로 둥글게 가둘 수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