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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4화 (394/488)
  • 394화

    구귀족 중 원로 몇은 이런 데에 쓸데없이 원칙을 따지고 들었기 때문에 그녀가 황위에 오르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들의 입을 닥치게 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다 조르단은 이와 비슷한 질문을 몇 달 전에 패티스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 하이에나와 조르단은 모두 황제의 동맹이었지만 둘 사이에 이엘이 없으면 교류조차 없던 애매한 관계였다.

    그런 와중에 사안이 심각해지는 걸 느낀 패티스가 먼저 조르단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그때 패티스가 조금 전 이엘이 물은 질문과 비슷한 것을 물었던 것이다. 1제국 때 귀족 간 파벌이 있었는지를.

    어쩌면…….

    “폐하.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저는 여전히 고리타분한 1제국법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불쾌하실지 모르겠으나 1제국의 장자세습법에 관하여, 저는 여전히 반대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이엘은 조르단 공작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녀가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인 조르단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시기 전, 원로들을 만나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래, 기억하네. 그대들의 반대가 극심했었지.”

    당시 몇 안 되던 원로들은 황자가 아닌 황녀는 황제가 될 수 없다며 강하게 부정했었다. 물론 이엘이 너희들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며, 강하게 밀고 나갔기 때문에 종국에는 모두가 그녀를 지지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 이엘의 황위를 지지했던 건 극소수였다.

    그리고 조르단은 그 극소수에 속했다. 이엘의 황위를 반겼던 것이다.

    “그때 공작의 지지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조금 전에 공이 했던 말을 조합하면, 공작은 신념을 버리고 날 선택한 게 아닌가? 나는 남자도, 첫째도 아닌데.”

    “사실 그것 때문에 드리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뭔데?”

    “저도 처음엔 폐하의 황위를 지지하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도 중립이었지요. 폐하는 유일한 르뷔아의 핏줄이었으나, 말씀하신 것처럼 첫 번째 황손도 아니셨고 황자님도 아니셨으니 저의 신념과는 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1제국 때의 일을 언급하더군요.”

    “…….”

    “그 당시에 파벌이 괜히 나뉘었던 게 아니라면서요.”

    조르단은 그날을 떠올렸다. 정확히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원로 중 하나가 조르단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자신은 1제국 때의 소문을 아직도 믿고 있다며, 쌍둥이 중 첫째는 나타니엘 황녀가 틀림없을 거라고. 그리고 뒤이어 적힌 것은.

    “언젠가 선황이 도망쳤던 산파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건…….”

    “네. 선황도 산실의 비밀을 파헤치려 했던 모양입니다.”

    “…….”

    “폐하와 아르세니온 황자님의 탄생에 무언가 있는 건 맞는 듯합니다.”

    조르단이 마음을 바꿔 그녀의 황위를 지지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그는 자신이 고리타분하여 제국법에 얽매여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고리타분한 과거에서 벗어날 작은 핑계 하나가 필요했다.

    이엘이 첫째일지도 모른다는 건, 그의 기준에선 좋은 핑계였던 셈이다.

    “그랬군. 그런 얘기가 돌았었구나.”

    “그때 제게 말해 줬던 원로를 찾을까요?”

    “그게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예. 편지를 통해 주고받았을 뿐,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원로인지 아닌지도 불확실합니다.”

    “그래. 그 부분은 공작에게 맡기겠네.”

    “예. 또한 말씀하신 대로 폐하의 방계 쪽 사람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전쟁 때 모두 죽었지만 사용인들이나 영지민들 중엔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선 좀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날이 밝는 대로 근위대와 기사단들도 위조된 신분증으로 영지를 통과해 들어올 겁니다. 그때까진 시간이 걸리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침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알겠네.”

    조르단의 뒤를 따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 자신이 이온보다 먼저 태어난 건지를 확인해야 했던 이유. ‘그’가 집착하는 게 첫아이였기 때문이다.

    ‘그’와의 거래는 완수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선황이 완수하지 못해 이엘에게 넘어왔던 것처럼, 이엘이 완수하지 못하면 그녀의 아이에게로 넘어가겠지.

    그런데 여기서 이엘은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그냥 아이가 아니라 첫 번째 아이를 요구했다. 그 첫 번째라는 것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혹시 첫째 아이가 핵심인 걸까. 만약 선황의 거래가 제게로 넘어온 게 맞다면, 선황에게 요구했던 것도 첫아이였던 걸까.

    오드는 선황이 불로불사를 원했기 때문에 ‘그’를 만났고, 그 계약에 이엘과 이온이 엮여 있다고 알려 주었다. 하지만 정말 자신과 이온이 모두 엮여 있는 걸까? 우리 둘 중 단 한 명,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대상은 아니었을까?

    선황후가 쌍둥이가 태어나던 산실에 있던 사용인들을 모두 황궁에서 나가게 했다. 그로 인해 정말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는 사실상 미지에 남겨진 셈이었다. 선황후의 말처럼 정말 이온이 먼저 태어났을 수도 있고, 혹은 일부 세력의 의심처럼 이엘이 먼저 태어났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가 두 아이를 모두 지키기 위해 했던 일이, 도리어 선황의 발목을 잡았던 건 아닐까. 선황은 자신의 첫아이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알아내기 위해 안달이 났을 테지. ‘목소리’와의 거래 조건은 첫아이였을 테니까.

    가뜩이나 드문드문 남아 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사실은 전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제 꿈에서 선황을 피해 도망치던 아이가 이온이 아니라 자신일 확률도 있을 듯해서. 이엘은 그것 때문에 조르단을 찾았던 것이다.

    “그럼 쉬십시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설렁줄을 당겨 주시면 사용인들이 곧장 찾아뵐 겁니다.”

    “여러모로 고맙네, 조르단 공.”

    “폐하.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이엘은 입고 있던 겉옷을 하트에게 건네며, 침실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선 조르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뒤에 선 하트를 곁눈질로 슬쩍 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폐하의 동맹의 범주엔 들었지만, 폐하께선 여전히 저보단 이종족을 신뢰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불충한 마음이지만 사실 처음엔 폐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이종족의 편에 서서 도리어 인간과 대치하시는 모습을, 제국에 충성을 다했던 저로선 이해하지 못했지요.”

    조르단 공작가는 다른 구귀족들에 비하면 이종족에 덜 배타적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덜 배타적이었을 뿐, 이종족과 결을 같이 하지 않았다. 그도 인간과 이종족 사이엔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패티스 백작이 먼저 제게 교류를 원하는 서신을 보내왔고, 뒤이어 늑대의 영지에서 안드로 백작으로부터 화친의 서신까지 받게 되었을 때. 저는 제 아집을 버리고 한번 폐하의 마음이 되어 보고자 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랬군.”

    “그제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아주 오랜 시간 갇혀 있던 편협한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지금 당장은 늑대나 하이에나처럼 폐하께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진 못하지만, 제가 폐하의 동맹이 아니라 폐하의 사람이란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지금 당장 말씀하시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제게 꼭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르단의 진심이 담긴 말에 이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조르단을 스승처럼 생각하고 의지하고는 있지만, 그의 지적처럼 그를 노아나 하트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그’와의 거래, 선황의 거래와 신탁 등, 일부를 조르단에겐 말하지 않았으니까.

    “인간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폐하께서 저를 통해 알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선 남자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조르단은 이엘이 즉위하기 전에도 그녀의 황위를 지지하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모두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때에도 이엘을 부드럽게 바라봐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미소는 그보다 더 인자하고 푸근하게 느껴졌다.

    “그럼 쉬십시오, 폐하.”

    기분이 묘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의 외조부처럼, 아니. 어쩌면 외조부보다 더 자애롭고 애틋하게 보는 조르단의 시선 때문에. 이엘은 아주 잠깐 그리움에 잠겼다.

    *

    “리노.”

    “…….”

    “리노!”

    서슬 퍼런 목소리에 바닥에 쭈그린 채 누워 있던 리노가 몸을 일으켰다.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떠서 시야를 확보하기도 전에 누군가 제 멱살을 잡아챘다.

    반쯤 보이는 시야로 그 사람이 자신의 형인 올리세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무슨 일일까……. 웬만해선 여기까지 오지 않는 형인데.

    “형…….”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

    “너 그 자식이 누군지 알지?”

    “누구?”

    “너한테 약 주러 왔던 놈. 노르드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그의 이름이 노르드입니다.”

    올리세스가 제 뒤에 있는 아스타로에게서 노르드란 이름을 확인하곤, 다시 시선을 돌려 정신을 못 차리는 리노의 멱살을 흔들었다.

    “그놈 정체가 뭐야.”

    “나, 난 몰라…….”

    “왜. 널 여기서 구해 주겠대? 그 자식이?”

    올리세스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리노는 정말로 ‘노르드’라는 사람을 잊고 있었다. 여기서 구해 주겠다고? 누가?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나?

    ‘마을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널 데리러 올게.’

    ‘나를?’

    ‘그래.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면 안 돼, 리노.’

    ‘아, 알겠어.’

    약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리노가 그와의 대화를 겨우 떠올렸다. 그래, 맞아. 그 남자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기다렸다. 창문 하나 없는 이 좁은 탑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남자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리노는 그날 이후로 노르드를 만나지 못했다. 예상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 탑에 갇힌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남자도 날 잊었겠지.

    “그 이름이…… 노르드였나…….”

    히죽 웃으며 중얼거리는 리노를 불쾌하게 쳐다보던 올리세스가 바닥에 있던 커다란 물통을 들어 그의 얼굴 위에 부어 버렸다. 촤악! 차가운 물이 맨살과 부딪쳐 나는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리노가 다시 바닥 위로 쓰러져 버렸다.

    “정신 차려!”

    “…….”

    “그 자식이 네게 뭐라고 했어. 왜 널 찾았지? 놈이 약을 가져다주긴 했나?”

    “…….”

    “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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