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3화 (393/488)
  • 393화

    *

    조르단 공작의 영지는 레온의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제도와 맞닿은 조르단 공작의 영지에 도착한 이엘과 무리는 급하게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 나온 공작과 영지 경계선에서 마주쳤다.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영지에 친림하여 주시니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

    “급보에 놀랐을 텐데 시간에 맞춰 나와 주니 고맙군. 며칠만 머무르다가 곧장 곰의 영지로 갈 생각이야. 그때까지만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최선을 다해 모실 것입니다.”

    “고맙네. 우선 눈에 띄면 안 되니 짐과 근위대장이 먼저 조르단 공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날이 밝는 것을 확인한 뒤에 영지민으로 위장하여 들어오도록 해라.”

    “예, 폐하.”

    사실상 조르단 공작과 몰래 접선하기 위해 꾸려진 인원이라 숫자가 단출했다. 조르단 공작은 미리 준비해 둔 영지민 확인 증서와 서류를 노아에게 맡긴 채, 이엘과 하트와 함께 먼저 성 안으로 향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린 터라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엘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간의 일을 먼저 전했다.

    “짐이 공작을 찾은 건, 포필렌의 유통 때문이네.”

    “예, 폐하.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이종족은 아직까진 테르 외엔 큰 피해가 없어. 게다가 상당히 오랜 시간 포필렌을 사용해 왔던 우논의 증언으로 볼 때 효과가 곧장 나타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물론 올리세스가 개량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우논과 둔에선 큰 문제가 없을 듯해. 테르 역시 우논의 통제로 막을 수 있으니 이종족이 주 문제가 되진 않을 거야.”

    이종족은 상하로 나뉘어진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계선인 우논이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포필렌으로 인한 붕괴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건 인간이다. 포필렌의 효과가 진통과 환각을 넘어선 향락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현재 포필렌의 유혹에 쉽게 무너질 종족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엘의 생각에 조르단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했다.

    “폐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인간들에게도 상용되는 속도를 늦춰 보려고 했지만 이제 곧 한계입니다. 한 번 증폭 위기를 막았지만, 또다시 포필렌을 접하게 되면 이번엔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겁니다.”

    그렇게 답한 조르단이 갖고 있던 커다란 지도를 펼쳐서 이엘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표시해 둔 곳은 전부 암암리에 열리고 있던 암시장의 거점 표시였다.

    즉위하고 암시장과 매음굴의 뿌리부터 뽑으려 했지만 이미 오랜 시간 퍼져 있던 것들을 한순간에 완전히 제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반대로 암시장과 매음굴의 관리 자체를 조르단 공작에게 맡겨, 그 숫자를 점차 줄여 가고 통제하는 쪽으로 계획을 바꿔 진행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올리세스는 암시장을 이용해 포필렌을 상용화시킬 계획을 꾸몄지만, 그 통제권이 조르단 공작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널리 유통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특히 이곳을 올리세스의 수하가 자주 오갑니다.”

    조르단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이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필 그곳이 과거에 이엘도 가 봤던 장소였던 것이다. 그녀가 밀로와 함께 처음으로 갔던 그 암시장. 거기서 주드를 처음 만났고, 자신의 반지를 팔아 그 아이를 구했던 기억이 여전히 눈앞에 선하다. 왜 하필 여기에…….

    “사실 이곳은 최근에 생긴 곳이라 바로 폐쇄하려 했는데, 올리세스의 수하가 자주 오간다는 소식에 이곳을 역이용해서 포필렌을 추적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정보를 알려 준 건 늑대의 영지에서 상황을 처리하던 안드로였다. 조르단 공작과 안드로, 그리고 제도에 있는 패티스까지. 세 사람은 이엘이 영지 시찰을 시작하던 때부터 연락을 주고받으며 포필렌을 지금까지 통제하고 있었다. 심지어 패티스가 먼저 조르단에게 도움을 청한 뒤로는 더 각별한 관계로 발전한 상태였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해독제.”

    “…….”

    “근 시일 내에 가능할 듯합니다.”

    조르단이 전해 준 은밀한 소식에 이엘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포필렌의 해독제. 정확히는 포필렌이 독성을 가진 게 아니기 때문에 해독제라고 명명하긴 어려웠지만, 어쨌든 포필렌의 중독성을 낮춰 주는 성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명석한 조르단이라면 해결책을 찾아낼 거라 믿고 유클리드로부터 모리아 내전의 전말을 듣자마자 그에게 포필렌의 해독제를 만들라고 부탁했다.

    “역시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가 해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종족 중 해독 능력을 가진 종족은 많았지만 포필렌은 기존의 독초들과는 다른 타입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중독성을 낮출 순 없었다. 그래서 조르단은 코알라의 능력인 해독에,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섞어 해독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는 종류가 다양한 만큼 각각의 열매가 갖고 있는 효능도 제각기 달랐다. 거기다 신의 손이 직접적으로 닿은 덕분에 일정 부분 성력도 들어 있어 효과가 좋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축복의 나무가 여전히 많지 않은 데다가, 효과가 있는 열매는 그중에서도 한정적이기 때문에 현재로선 해독제를 만들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게 최선입니다.”

    “좋아. 잘했어, 조르단 공. 공작의 공이 커. 고맙네.”

    “어리석은 자를 믿고 맡겨 주셨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작게나마 폐하께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 부분은 계속해서 공작이 진행을 맡아 주게. 암시장 역시 기존에 했던 것처럼 통제를 해 주고, 올리세스의 수하가 오간다는 곳은 더 신경 써서 작은 실마리라도 잡으면 곧장 내게 보고하게.”

    “예, 폐하.”

    조르단이 그렇게 답했을 때 집무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공작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게.”

    그의 허락을 받고 들어온 집사가 차와 간단한 식사를 대접하고는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극도로 팽팽했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며 이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급서를 받고 놀랐을 텐데,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폐하.”

    “이전에 편지에 적었던 대로 올리세스는 반역을 준비하고 있고, 로빈은 오드 님을 노리고 있어. 둘 다 목표는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달라. 올리세스는 날 끌어내릴 생각이지만, 로빈은 나를 제 곁에 둘 생각이니까.”

    올리세스는 단번에 로빈의 사욕을 알았을 터였다. 그래서 그에게도 동맹을 제안했겠지. 하지만 뱀은 다른 이종족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로빈은 도리어 올리세스를 역으로 이용할 생각인 듯했다.

    “우린 올리세스의 영지에 있는 리노를 납치해 올 생각이야.”

    “올리세스의 동생이라던 리노 윌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는 미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도움이 될까요?”

    “지속적으로 복용하던 포필렌을 끊고, 오드의 성력으로 치유받으면 조금씩 나아질 거야. 난 그에게서 알아내야 할 진실이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폐하?”

    “구귀족 중 윌터 백작과 손을 잡지 않는 자들을 모아 주게. 병력이 필요해.”

    “전쟁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전쟁은 언젠가 터져. 지금은 간신히 입구를 막고 있지만 이제 곧 한계야. 기습하든 방어벽을 세우든, 그들보다 한발 먼저 움직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윌터 백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유서 깊은 대귀족이었기 때문에 구귀족 중 대부분이 그와 연이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면 남은 구귀족은 몇 되지 않을 테고, 그마저도 황실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인물은 별로 없다.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이 부분은 조르단으로서도 좀 더 고민을 해야 할 듯했다.

    “그리고 공작에게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

    “하문하십시오, 폐하.”

    “혹시 나의 외가 쪽 방계 중 아는 자가 있나?”

    “폐하의 외가 쪽이라면…… 론 후작가의 방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물론 2차 전쟁 때 어머니의 가문은 몰살당했으니 방계도 살아남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혹시 내 방계에 관해 아는 자가 있을까 해서.”

    “갑자기 방계를 찾으시는 연유가 무엇이십니까?”

    이엘은 드레인을 만났던 바로 며칠 전을 떠올렸다. 그녀는 돌아가려는 자신을 붙잡고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이엘이 반복해서 꾸는 그 꿈이 정말로 다른 이의 기억이 맞느냐고.

    꿈속에서 그녀는 선황의 목에 졸리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목격한 어린아이는 선황을 피해 도망쳤다. 그래서 이엘은 꿈속의 여자는 어머니이고, 어린아이는 당연히 이온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도망치던 아이가……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기억은 온전하지 않으니까. 그건 이온이나 어머니의 기억이 아니라, 내 기억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어릴 때 어머니가 나를 방계로 입적하려 했다는 걸 알게 됐어.”

    “그건 맞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셨지만 승계권은 원칙에 따라 폐하와 아르세니온 황자님, 두 분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다툼을 면하시고자 일찍이 폐하를 방계로 입적하려 하셨습니다.”

    “근데 선황이 반대했었지?”

    “예, 폐하. 극구 반대하여 결국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

    “그때 당시엔 선황 폐하께서 두 아기님을 귀애하셨기 때문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자르들이 신탁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했던 거짓말로 인해, 선황은 이엘과 이온 모두를 제 곁에 두려 이엘의 입양을 반대했을 것이다. 선황 제 자신을 위해.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선황이 제 자식에게 껌뻑 죽는 아버지로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근데 듣자 하니 나와 황자가 어릴 때, 귀족 간 파벌이 있었다고 하던데.”

    “…….”

    “그게 사실인가?”

    모두 모여 서로가 아는 것들을 터놓던 그날, 패티스가 전했던 말 중 뜬금없는 말이 하나 있었다. 이엘과 이온이 어릴 때 귀족들이 두 파로 나뉘어 각각 황녀와 황자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미 이온이 어릴 때부터 차기 황제로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황녀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게 이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방치되어 자랐어. 황녀궁에서 나오지 못했고, 똑같이 승계 수업을 배워도 이온이 배우는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났지. 애초에 나는 승계권을 갖고만 있을 뿐, 승계 후보에 들 수도 없는 존재였는데. 근데 왜 구귀족이 파를 나뉘어 나를 지지했지?”

    “…….”

    “그것에 관해 아는 바가 있나?”

    조르단 공작은 1제국 당시 백작이었으나 그 위세는 지금보다 더 대단했다. 그야말로 대귀족이라 불릴 만한 자였으니 다른 사람들에게서 듣는 것보다 그에게서 듣는 게 낫겠단 생각에 물어보는 것이다.

    “그즈음 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어떤?”

    “사실 황녀와 황자가 바뀐 것 아니냐는.”

    “…….”

    “쌍둥이 중 먼저 태어나신 분이 폐하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 부분은 패티스가 먼저 은밀하게 그녀를 찾아와 말하기도 했다. 확실하지도 않거니와 딱히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라 생각해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꺼냈던 말이었다.

    그래서 이엘도 반쯤은 흘려들었다. 패티스의 말처럼 이제 와선 누가 먼저 태어나고 나중에 태어나고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선황후 폐하의 산실에 들었던 자들이 모두 퇴궁하였다는 것. 그리고 선황후께서 폐하를 적극적으로 방계에 입적시키려 하셨다는 점. 그것들이 소문의 근거가 됐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엘은 조르단의 말을 들으며 언젠가 이카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를 아주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이카르는 이엘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고 말했다. 그 탓에 지금도 자잘한 병을 달고 사느라 매번 노아가 그녀의 몸을 걱정할 정도였다.

    선황후는 그걸 염려했을 것이다. 쌍둥이를 두고 정치적 문제가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이온과 이엘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몸이 약한 황녀는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가 권력 싸움에 희생되고 말 테니, 그걸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방계로 입양을 보내려고 했겠지.

    하지만 선황 때문에 모두 불발되고 말았을 것이다.

    “황손을 지지하는 구귀족의 대립이 심해질 즈음 폐하께선 황자님을 황태자로 내정하셨습니다. 거의 공식적으로요.”

    “…….”

    “황자님께서 먼저 태어나셨으니 황태자가 되시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황녀 전하를 지지하는 세력의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전 중립의 입장이었으나 솔직히 황녀님을 지지하는 세력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정말 이온보다 먼저 태어났을 수도 있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엘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눈치챈 조르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황자는 죽었고, 이엘은 황제가 되었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황자보다 먼저 태어났다면 도리어 이엘의 황위에 정당성이 더해질 테니 좋은 일이 아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