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2화 (392/488)
  • 392화

    “간신히 막고 있던 포필렌이 유통되기 시작했어. 이종족 쪽은 안드로 백작이 유통 속도를 잘 제어하고 있지만 문제는 인간들이야. 원래 포필렌은 인간에게 더 효능이 강한데, 올리세스가 만든 건 개량된 포필렌이니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질지도 몰라. 올리세스의 공격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이를 수 있어.”

    “준비하겠습니다.”

    “동맹족을 소집하고 영지 시찰 속도를 높인다. 그리고 조르단 공작에게 연락해서 그곳을 먼저 들르겠다고 전해.”

    조르단 공작은 이엘이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 귀족이었다. 그는 이엘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녀를 적극 지지했고, 즉위한 이후에도 이엘이 종종 찾아 자문을 얻는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자였다.

    원래대로라면 조르단 공작의 영지는 영지 시찰의 마지막이 되었을 테지만 상황이 좋지 않으니 그곳을 먼저 들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레온의 영지는 내일 새벽을 타서 떠난다. 근위대 몇과 2기사단, 그리고 일라이저만 이곳에 남고 일부만 나와 함께 조르단 공작의 영지로 향하자. 그를 만나서 상의를 해야겠어.”

    “예, 폐하.”

    상황이 대충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이엘이 안정을 찾을 차례였다. 비록 안전한 곳에 있었다고는 해도 사흘 가까이 정신을 잃은 상태로 잠에 빠져 있었으니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터였다.

    게다가 새벽에 떠나려면 쉴 수 있는 시간도 고작 몇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걸 알아챈 모두가 그녀의 침실을 나가 주었다.

    “노아.”

    “예, 폐하.”

    “그대는 여기 남아 줘.”

    “알겠습니다.”

    방문을 닫고 나가려던 레온이 이엘과 노아의 대화를 들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알고 있는데도 매번 이렇게 제외되는 게, 생각보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후작님.”

    “예, 오드 님.”

    “잠깐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던 레온을 부른 건 오드였다. 언제나처럼 선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대화를 청하는 나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상황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래도 위로를 받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까 낮에 나드를 만났답니다.”

    레온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며, 오드가 넌지시 나드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까지도 레온의 머릿속엔 온통 이엘과 노아의 생각뿐이라, 레온은 자신이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잊고 있었다. 나드의 이름이 거론되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혹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드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라도…….”

    “아니에요. 오늘 낮에 산책하고 있던 나드와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답니다.”

    “그러셨군요. 나드는 전에도 한 번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예. 건국 초에 후작이 내게 데려왔었죠.”

    건국 초, 치료의 손이 필요한 자들이 하나둘 제도로 몰려들었다. 대부분은 인간들이었지만 아주 드물게 이종족들도 있었는데 그중 귀족은 레온이 유일했다. 모두가 레온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아마 그들은 타이곤인 레온이 스스로를 돌연변이라 생각해, 오드를 찾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레온이 먼 길을 수고하며 오드가 있는 성전을 찾았던 건, 그의 품에 안긴 어린 타이곤 때문이었다.

    “나드를 고쳐 주고 싶었거든요.”

    “그 마음의 뜻을 이뤄 드리지 못한 게, 저 역시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닙니다. 오드 님께선 최선을 다하셨으니, 나드도 그 마음을 알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레온이 주변에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우논은 저 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꽃은 피었다 지고, 다시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데 그게 결국 영존하는 우논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드도 마찬가지다. 보통의 평범한 우논들은 천천히 성장하다가 자신이 가장 강해지는 시점에서 성장이 멈춘다. 그게 어떤 개체에겐 청년의 모습일 수 있고, 또 어떤 개체에겐 장년의 모습일 수도 있다. 레온만 보더라도 소년과 청년의 경계선에서 성장이 멈춘 채 지속되고 있다.

    그게 나드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아주 어리고 어려서, 말도 할 수 없고 제대로 된 사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아기의 모습. 성장의 마침이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게 속상함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드 님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언젠가 죽어요. 영존할 수 있는 우논이었지만 갈기가 빠졌기 때문에 수명도 점차 줄어들었거든요. 나드의 곁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합니다.”

    지금이야 타이곤인 레온이 무리의 수장이 되었기 때문에 차별이 줄었지만, 레온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타이곤과 라이거는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암컷이 없어 후손을 낳을 수 없는 환경이 되지 않았더라도 두 종족은 이른 시간 내에 멸종했을 터였다.

    “제가 죽고 난 뒤에 나드를…… 누가 지켜 줄까 그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예.”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겠죠. 이종족의 세계는 원래 약육강식의 세계니, 약한 자가 먹혀 사라지는 게 아주 당연하니까요. 근데 전, 제가 실험실에서 아득바득 살아남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생의 집착이 강한 편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온이 살짝 웃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주제에, 생을 향한 집착은 지독해서. 우논다우면서도 우논답지 못한 가치관이었다. 영존할 수 있는 우논들은 생에 집착이 없고 시간을 죽이며 살다가, 삶이 질리면 쉽게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생의 길이가 정해진 우논인 레온은 제게 주어진 시간을 꽉꽉 채우고 갈 생각밖에 없었다.

    “죽을 때까지 나드의 곁에서 그 아이를 지킬 거지만, 제가 제게 주어진 생을 다 살지 못하거나 갈기가 빠져 죽게 되면……. 그땐 나드가 어떻게 될지 무섭더군요.”

    “…….”

    “물론 나드는 다른 우논처럼 영원히 살 수 없고 단명하겠지만, 그보다 제가 먼저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래서 무작정 오드를 찾아갔었다. 다들 안 될 거라며, 그런 건 고칠 수 없다고 충언했지만 레온은 일단 문을 두드려 볼 생각이었다. 귀족의 체면, 이종족의 부끄러움 같은 건 뒤로하고 나드의 미래만을 생각했다.

    “전 부모의 사랑 같은 건 받고 자라지 못해서, 부모가 자식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인지 잘 몰라요. 하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사랑은 알고 있어요.”

    “노아 님의 어머님이신가요?”

    “맞아요. 루나 님. 제겐 그분이 제 어머니셨어요.”

    “그랬군요.”

    “그땐 그분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게 단순히 불쌍함에서 기인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그분의 아들은 제가 아니라 노아였으니까요. 종족도 다르고 피가 섞이지도 않은, 완전히 다른 개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어린 제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죠.”

    처음엔 울기도 참 많이 울었고 제게 손을 뻗는 손길이 무서워 극도로 긴장한 채 거부만 했었다. 레온은 태어나면서부터 실험실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낯설었던 데다가 감정과 감각이 모두 예민한 개체라 변화에 민감했던 것이다. 덩그러니 늑대들의 영지에 넘겨져 소리를 빽빽 내지르는 그에게, 루나가 손을 내밀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제가 나드를 대하는 마음이 루나님과 다를 게 없더군요. 그렇게 인정했더니 나드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폐하의 마음을 존중하고 이해해요. 아마 정말로 아이를 갖게 되면…… 폐하께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 아이를 지키실지도 몰라요.”

    그래서 최후의 보루로 제 갈기까지 준비했던 것이다.

    “오드 님께서 폐하께 말씀하셨다고 그랬죠. 아르세니온 황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타이곤의 갈기와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만 있으면 된다고요. 그 외는 모두 오드 님께서 준비하신다고.”

    “네, 그랬었죠.”

    “그건 지금도 변함없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폐하를 꼭 지켜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오드 님. 폐하께도 말씀드렸지만 전 기꺼이 갈기를 드릴 수 있어요. 필요하시면 제게 꼭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후작. 그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선 같은 무게의 가치가 필요한데. 방법이 있음에도 이엘이 그 방법을 쓰지 않으려 했던 건, 결국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목숨이 희생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오드일 테고.

    “죄송합니다, 오드 님. 제가 감히 나자르께…….”

    “그런 말씀 마세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게 나자르인 저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

    “전에도 말했지만, 나자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요. 신이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 바로 우리니까요.”

    오드의 위로 섞인 대답을 들으며 레온은 시선을 그녀의 침실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불이 꺼진 침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옥죄일 줄은 몰랐다. 치기 어린 질투심에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고.

    “제가 사랑받고 자란 놈이었다면.”

    “…….”

    “노아처럼 다정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평범한 이종족이었다면.”

    그녀 앞에선 마음을 감출 수 있는데. 이렇게 돌아서면 곧장 마음이 벅찼다가 식기를 반복해서……. 차라리 고통으로 인해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 더 기다려질 정도라고 하면, 지금 내 마음의 괴로움을 대충은 알아줄까?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얘기라도 하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식을 줄 알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엘이 이성이기 때문에 이종족의 본능적 욕구로 끌리는 것일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마음이 식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종족의 사랑은, 우논의 사랑은 생각보다 질기고 지독한 터라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깊이는 깊어지고 농도는 짙어졌다.

    ‘네가 갚아야 할 것들. 나랑 같이 갚아. 네가 잡았다던 그것에게 갚아야 할 대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갚아 나가자.’

    언젠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엘이 ‘그’를 만난 이후라, 아르세니온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아이를 대가로 주겠다는 거래를 했을 때. 그로 인해 고뇌하던 때에 멋모르고 함께하잔 말을 했던 레온을 향해 이엘이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가족이 필요하고 아이가 필요한데, 레온은 절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종족이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허락되지 않는데, 마음껏 좋아할 수 없는 자신의 결핍이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오드 님. 제가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후작의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면 좋겠습니다.”

    오드가 해결해 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들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위로 쭉 편 레온이 오드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폐하께서 떠나실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오드 님도 새벽에 출발하셔야 하니 성전으로 가셔서 조금이라도 눈 붙이십시오.”

    “알겠습니다. 후작도 푹 쉬세요.”

    “예.”

    오드가 먼저 성전 쪽으로 걸음을 돌렸고 레온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자신 역시 성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온과 오드가 떠난 자리에 있던 꽃이, 그 짧은 새에 조금 자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