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차라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정화할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뱀의 영지로 쳐들어가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레온. 진정해.”
빈 컵에 다시 물을 따르던 노아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레온을 나무랐다. 레온이 흥분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처럼 지금 뱀을 공격하는 건 더 무모한 짓이었다.
“아냐. 그 덕에 드레인을 만났으니 오히려 얻은 게 더 많았어.”
“폐하께서 쓰러졌는데 용을 만난 게 무슨 큰 이익이 있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폐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이엘이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제일 냉정했던 레온인데 속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꽤나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불쑥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조심할게.”
“…….”
“내 자신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경시 여기지 않을게.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안다. 레온이 피험체가 되겠다는 말을 했을 때 가장 속상했던 게 이엘 자신이었다. 지금의 레온 역시 그때의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목숨엔 지장이 없었더라도 멀쩡하던 사람이 피를 뿜으며 쓰러져 의식을 잃었으니 그걸 바라보기만 해야 했을 레온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건지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러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조심스럽게 이엘의 손을 잡고 검지 위 녹색 반지에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부디 그렇게 해 주십시오, 폐하.”
“그래. 근데 드레인을 만난 건 정말 큰 수확이었어. 그녀가 내게 그 소녀들을 보여 줬거든. 그리고 스완이…… 근데 다들 표정이 왜 그래?”
“폐하. 사실 어제 급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이엘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무리의 얼굴을 보며 하던 말을 끊고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노아가 손을 뒤로 뻗어 건네받은 종이를 이엘에게 보여 주었다.
“제 영지에서 온 편지입니다.”
“공작의 영지? 늑대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지에 포르 자작을 초대했습니다.”
“…….”
“편지를 보낸 이는 안드로 백작이지만, 내용을 작성한 건 포르 자작입니다.”
이엘은 말없이 편지를 받아 조용히 펼쳤다. 급보로 도착한 터라 의식이 없던 이엘을 대신해 노아와 레온이 앞서 읽었던 모양이었다. 찢어진 귀퉁이에서 시선을 뗀 이엘은 첫 줄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폐하.”
“잠깐만.”
간결한 내용이 적힌 편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확신할 순 없다고 끝말을 맺었지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는 건 사실상 거의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코르넬의 사촌 누이들이…….”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림으로만 본 데다가 코르넬도 너무 오래전에 봤던 누이들이라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요.”
“그림은 정확해. 내가 몇 번이고 보고 또 봤으니까.”
심지어 조금 전에 그 소녀들을 직접 만나고 오지 않았던가. 이엘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이 손으로 그들을 만지기까지 했다. 루벤을 통해 그렸던 그 그림은 완벽에 가깝다. 물론 노아의 말처럼 그림으로만 접했으니 그 아이들이 코르넬의 사촌이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 그렇지만.
“하지만 아예 신빙성이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코르넬의 사촌 누이들은 2차 전쟁 때 실종됐습니다. 인식표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 사라졌다고, 코르넬이 직접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트가 꽤 냉정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의 말처럼 코르넬의 친척이자 과거 이엘의 스승의 친구였다던 황실연구원 테런스 포르에겐 두 딸이 있었다. 인간 여자들이 모두 그랬듯, 두 딸도 2차 전쟁 때 죽었을 것이다.
특히 피로 물든 인식표가 남겨졌기 때문에 이종족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인식표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퍼진 독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금 전에 드레인의 능력에서 만난 아이들에게도 인식표가 없었어.”
“…….”
“하트 경의 말처럼 신빙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이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드레인을 만나 직접 확인했을 텐데. 지금 스완에게 말을 전해 봤자, 스완도 뱀의 영지에 있는 이상 드레인을 만나지 못하니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정말 그 아이들이 코르넬의 사촌 누이라면, 드레인이 말했던 그녀에게 소중했던 사람은 테런스 포르일 확률이 컸다. 테런스 포르는 황실연구원이었지만 별종 취급을 받을 정도로 이종족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만약 그가 드레인과 아는 사이였다면, 그래서 이종족에게 호의적이었던 거라면…….
“그러면 모든 정황이 말이 되네.”
“생각보다 테런스 포르가 중요한 인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코르넬은 테런스에 대해 아는 게 적어. 심지어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던 패티스 백작조차 테런스에 대해 알아낸 게 거의 없었어.”
“리노 윌터요.”
조용히 듣고 있던 노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리노의 이름을 언급했다.
“리노 윌터의 스승이 테런스 포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노아. 리노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한 건 그대야. 그곳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며.”
노아는 몇 달 전 올리세스의 마을 중 한 곳에서 리노 윌터를 만나 그와 교점을 만들었으나, 그녀에게 보고한 대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리노에게선 테런스에 관해 알아낸 게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교류가 거의 없었다던 코르넬이 말해 준 게 더 의미 있을 정도로.
“그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올리세스가 리노에게 주고 있는 포필렌 약의 복용도 멈춰야 하고요. 그러려면 리노를 이곳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가능하겠어? 괜한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게 나아. 리노는 올리세스에게 중요한 인물이야. 방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게다가 그대는 이미 얼굴이 알려져서 경계 대상이 될 거야.”
노아가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건 꽤 위험했다. 아무리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해도, 노아는 그 마을을 떠나기 직전까지 가짜 사제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니까. 방화 사건 직후에 노아가 사라졌으니 마을 사람들이 노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면 유클리드를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줄곧 침대 아래에 무릎을 대고 앉아 듣던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이엘도 유클리드의 존재를 떠올렸다. 확실히 유클리드가 가장 적합해 보이긴 한데…….
“올리세스의 마음이 어떠하든 간에 표면적으로는 유클리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다지고 있으니까요. 그 스라소니를 올리세스의 마을에 보내 동정을 살피다가 경비가 허술해진 틈에 리노를 데리고 납치하는 건 어떤가요?”
“저도 레온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제가 가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지만, 폐하의 말씀처럼 저는 신분이 노출된 터라 더 위험할 것 같습니다.”
노아는 이카르의 영지에서 봤던 유클리드를 떠올렸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클리드를 끌어들이는 것에 가장 크게 반대하던 사람이 노아였다.
‘저것들이 정말 용이라면. 절대 놓치지 마.’
첫눈에 킨과 밀로가 용인 것을 알아본 눈썰미에,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은 몰랐던 용의 진실을 언급한 것까지.
‘수컷들이 신을 속이고 도망쳤거든. 근데 걔들이 도망칠 때 뭔가를 훔쳤대.’
유클리드의 말처럼 용들은 신의 열매를 훔쳐서 달아났고 그게 불씨가 되어 지금처럼 수컷과 암컷이 따로 살게 되었다. 그 사실을 처음 언급했던 게 유클리드였다. 지금이야 밀로에게서 확언을 받아 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노아를 비롯해 이엘도 용에 관해 알지 못하던 때였으니까.
놈은 킨과 밀로의 정체를 끈질기게 추궁했다. 그 둘이 용이라는 걸 거의 확신하는 상태에서 절대 놓치지 말라는 충고까지 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용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지 그 여부에 따라 승기가 결정될 터였다.
어쩌면 유클리드는 정말로 이엘의 편에 선 걸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길 거라는 확신에 한발 다가서며.
“하지만 그 스라소니를 믿어도 되는 겁니까?”
하트가 꺼낸 묵직한 말에 레온도 고개를 흔들었다. 결정은 이엘의 몫이겠지만, 솔직히 유클리드를 제안한 레온조차 그 스라소니를 신뢰하지는 못한다.
“그럼 이카르를 함께 보내자.”
고민에 빠진 레온과 하트를 보며 이엘이 대신 해결책을 냈다.
“이카르는 몸을 작게 줄일 수 있으니까 함께 가도 눈에 띄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인간들이 사는 마을은 보호석이 상시 발동 중이지 않습니까? 그럼 몸의 크기를 줄이지 못할 텐데요.”
“이카르와 재규어들을 보호석의 발동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유클리드가 리노를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하면 함께 돌아오면 된다. 물론 이건 유클리드가 내 손을 잡고 있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엘은 유클리드를 믿고 있다. 레온이나 하트는 여전히 스라소니를 불신하고 있지만, 이엘은 그를 믿고 제 우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지금 보니 노아 역시 제 생각과 마찬가지인 듯했고.
“만약 유클리드가 배신하거나, 상황이 악화되어 리노를 데리고 나오지 못할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전쟁을 준비해.”
“예?”
이엘의 대답에 모두 놀란 듯했다. 자잘한 전투는 건국 이후로 계속 있었지만, 그건 새로 새워진 제국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필요한 과정에 불과했다. 게다가 모두 이종족을 상대로 벌어졌던 전투였다.
“그 말씀은…… 올리세스와 전쟁을 벌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차라리 영지전을……,”
“그럴 일은 없어야지. 전쟁을 벌일 생각으로 올리세스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야.”
“…….”
“어차피 리노를 빼돌려야 했고, 그 마을에 퍼진 이교도의 무리도 뽑아내야 했어. 필요한 과정이지만 그게 목적이 되어선 안 돼.”
이미 올리세스가 전쟁을 생각하고 있다. 민심을 건드리고 포필렌으로 제도 안팎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 이엘이 영지 시찰로 인해 부재한 와중에.
“처음 제도를 떠날 때 추격대를 꾸려 공격하는 척했던 것과 내가 부재한 가운데 제도를 습격했던 일, 그 모든 일은 다 눈 가리기용이고 진짜 전쟁은 내가 영지 시찰을 마치고 돌아가기 직전에 터질 거야. 올리세스는 그때를 노리고 있을 거고.”
그러니까 미리 준비해 제대로 방어를 하든가, 아니면 그 전에 먼저 습격을 하든가.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