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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90화 (390/488)

390화

이엘의 물음에 드레인은 대답 없이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그러자 스완과 이엘의 앞에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은…….”

“스완에게 건너 들었겠죠? 제가 늘 폐하의 꿈을 통해 보여 주었던 아이들입니다.”

곤히 잠든 것처럼 두 소녀는 눈을 감은 상태였다. 이엘과 스완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주고받는 새에, 드레인은 한 소녀의 옷깃을 손으로 파헤치며 그들에게 쇄골 부근을 보여 주었다.

“인식표를 제거하면서 생긴 독성이에요.”

“…….”

“제거하자마자 제 능력 안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아직까진 살아 있는 상태죠. 하지만 제 능력을 나가는 순간 독이 퍼지면서 금방 죽을 겁니다.”

“일단 데리고 나가면 오드가……,”

“아뇨.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이곳에서 독기를 제거하고 밖으로 나가야 해요. 그러려면 오드 님이 이곳으로 들어오든, 스완이 성력으로 치료하든. 확실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이엘은 두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들을 살폈다.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지만 쇄골 부근의 독기가 심각하게 번진 상태였다. 드레인의 말처럼 이곳에서 치료를 하고 나가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가자마자 죽어 버릴지 모른다.

한참을 지켜보던 이엘이 손짓으로 스완을 불렀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저를 부르는 건지 알아챈 스완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안 돼요. 아직은 위험하단 말이에요.”

“한번 해 보자는 거야.”

“…….”

“네 능력이 조금이라도 통하는지 한 번만 해 보자. 스완, 부탁할게.”

부탁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스완은 울상이 된 얼굴로 이엘의 앞에 다가가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엘은 스완의 손을 쥐곤 독으로 인해 보라색으로 변한 여자의 쇄골 부근에 갖다 댔다.

“괜찮아. 그냥 통하는지만 확인할 생각이니까 네가 조절할 수 있는 정도로만. 성력을 조금만 써 봐.”

치유의 성력은 써 본 적이 없는데……. 꿍얼거리던 스완이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긴 한숨을 쉬곤 눈을 감았다. 방어도, 공격도 아닌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성력은 정화만큼이나 어렵고 까다로웠다.

게다가 정화는 드레인의 훈련하에 몇 번 해 보기라도 했지, 치유를 시도한 적은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나도 부탁할게, 스완.”

“야, 드레인. 너까지 그러면 내가 얼마나 부담되는데…….”

“부탁이야.”

“…….”

“네가 폐하를 살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이 애들을 지키고 싶어.”

미쳐 버리겠네, 정말. 다들 왜 이렇게 나한테 거는 기대가 큰 거야! 나는 그냥 평범한 고니라고……. 이젠 거의 울기 직전이다.

스완은 울상인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다시 정신을 집중하듯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던 스완은 제 손에 닿은 여자의 쇄골을 향해 성력을 몰아넣었다.

새하얀 빛이 스완의 손바닥에서 뻗어 나가 잠든 소녀의 몸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보랏빛으로 번졌던 쇄골 부근이 느릿하게 혈색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이엘과 스완, 그리고 드레인마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나 금세 원래 상태로 돌아오고 말았다.

“……됐어. 가능성이 있어.”

아주 희미한 희망을 엿본 이엘과 드레인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스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마구 저어 댔다.

“시, 실패했잖아요! 시도했지만 결과는 실패예요. 그냥 저 말고 오드 님을 부르는 게……,”

“네가 됐든 오드 님이 됐든, 먼저 이 아이들을 살려 줘.”

“…….”

“그게 제 조건입니다, 폐하.”

드레인의 푸른 눈동자가 스완을 지나쳐 이엘을 향했다. 이엘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여자의 시선이 한데 얽히는 걸 지켜보며 방황하던 스완이 결국 입술을 삐죽거리며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도 강하게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는, 스완 역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렷이 알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엘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스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나 드레인의 이 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니까 더더욱.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폐하께서 먼저 돌아가세요.”

“알겠어. 드레인, 다음에 또 만나요. 전에 스완을 통해 사과의 말을 전하긴 했지만, 수컷 용이 무례하게 질문을 했던 것에 관해 다시 한 번 사과할게요. 그대를 난처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원치 않으면 그와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말아요.”

“그놈 이름이 킨이라고 했었죠? 누군지 잘 알아요. 왜 날 만나고 싶어 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요. 폐하께선 그 일에 관해 신경 쓰지 마세요. 설령 직접 만난다고 해도 지금의 수컷 용은 저를 이기지 못하니까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끼고 준비를 마친 이엘이 돌아가려는데, 드레인이 뭔가를 떠올린 듯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전에 스완을 통해 물어보셨죠? 어머니의 꿈을 꾸신다면서요.”

“맞아요. 하지만 그건 드레인의 능력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지 않았던가요?”

“그 꿈이 정확히 어떤 내용인데요?”

“내가 어떤 여자의 몸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리고 선황이 내 목을 졸랐죠. 그렇게 한참 목이 졸리다가 결국 그의 손에 죽으면서 꿈은 끝이 나요.”

이엘의 설명을 들은 드레인이 생각에 잠겼다. 스완에게 이엘의 꿈에 관해 대략적으로 들었을 땐 그녀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꿈으로 꾸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들어 보니 꿈의 주체가 선황후였던 듯했다. 이런 경우엔 기억이 아니라 그냥 의미 없는 꿈일 확률이 크다.

“그럼 그게 당신의 어머니일 거라 단정할 수도 없네요. 반복해서 꾸는 게 걸리지만, 의미 없는 꿈일 수 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설령 정말 과거라고 해도, 내 기억이 아니라 이온의 기억일 테니까요.”

“이온이라면…… 쌍둥이 황자를 말씀하는 건가요?”

“네. 꿈속의 선황이 내 목을 조르는 걸 어떤 아이가 목격하고 도망쳤거든요. 선황이 곧장 그 아일 따라가려는 걸, 내가 필사적으로 막다가 끝내 목숨이 끊어졌고요. 그래서 내 생각엔 그 애가 제 오빠가 아닐까 했었는데…….”

이엘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건지 말이 중간에 끊겼다.

“그게 폐하의 기억이 아니라고 확신하실 수 있어요?”

“…….”

“그 아이가 정말 황자인가요?”

“아니, 잠깐만요!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폐하께선 어서 돌아가세요! 제 몸이 진짜 한계예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발만 동동 구르던 스완이 참지 못하고 이엘의 소매를 잡고 흔들어 댔다. 이엘은 드레인과 눈빛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뒤로 물러서는 걸 택했다.

“드레인.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좋아요. 다음엔 이런 방법 말고, 정상적으로 스완의 능력을 통해 만나요. 조심히 가세요, 폐하.”

“스완. 부디 몸조심하고 곧 연락할게. 너도 도움이 필요하면 곧장 연락해.”

“알겠어요.”

이엘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면서 생긴 공간의 균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완도 곧 제 몸이 있는 곳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나도 갈게. 조만간 다시 만나, 드레인.”

“최대한 뱀의 영지에서 빠져나오도록 해. 거긴 너무 위험해.”

“알아. 기회를 봐서 탈출할 거야. 걱정 마.”

“넌 뱀과 가까워지면 안 돼. 내 말 명심하고.”

“알겠다니까. 위험하면 도망칠 테니까 너야말로 여기서 기다려. 다음에 만날 땐 지금보다 더 성장해서 올 테니까.”

스완의 그 말이 이상하게 허세처럼 들리지 않는다. 예전엔 허풍만 늘어놓는 형편없는 백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에 소녀들에게 행했던 성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탓인지 드레인은 스완의 말을 아주 조금이나마 신뢰하게 됐다.

“내가 또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뭐 별수 있나. 폐하께서 저렇게 간곡히 부탁하시면 해내야지, 뭐. 그러니까 너도 우리 폐하 잘 부탁해.”

“나야말로 내 능력 안에선 못 하는 게 없어.”

그렇게 답한 드레인이 손가락을 가볍게 퉁기자 스완의 눈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스완은 경악과 함께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콕콕 찔렀다.

“이게 어떻게……,”

“어때. 이 정도면 해 볼 만해?”

눈을 감고 서 있는 남자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스완은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다가 입을 꾹 다물며 뒤로 물러섰다. 드레인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퉁기자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니까 고니 님. 그쪽도 잘 부탁해.”

“와, 너 진짜 대단하구나……. 성력에, 기본 능력에…… 진짜 이건 균형이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야? 불공평해. 왜 좋은 건 죄다 갖고 있어?”

“시끄럽고 돌아가, 그만. 그러다 뱀들한테 몸 뺏긴다.”

“쳇. 알겠어, 다음에 봐.”

스완은 돌아서면서도 아쉬운 듯 계속해서 드레인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꿈속이라는 공간의 제약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공간의 제약만 벗어나지 않으면 제한이 없단 소리 아냐. 괜히 수컷 용쯤은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생각을 하니 스완은 소름이 쭈뼛 서는 게 느껴져, 괜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 앞으론 드레인 만날 때 적당히 까불어야겠다. 안 그러면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라. 마른침을 삼키는 건 덤이었다.

*

“폐하!”

눈을 번쩍 뜨자마자 온몸이 욱신거리는 탓에 짧게 신음을 흘렸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손을 뻗었는데 그녀의 상태를 곧바로 알아챈 노아가 협탁 위에 올려놓은 컵을 건넸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미안해. 다들 놀랐구나.”

“스완과 만나셨습니까?”

“응. 스완도 무사해. 걱정 안 해도 돼.”

“뱀의 영지에 호랑이와 독수리를 보내 놓았습니다. 지금 당장 스완을 구출해서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노아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소모라의 정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화요? 설마 그 고니가 혼자 정화하겠다고 소모라로 향했던 겁니까?”

다소 무모한 행동이라 생각한 건지 레온의 얼굴 위에 균열이 생겼다. 뱀의 영지로 보낸 정찰병으로부터 보고받았을 땐 쓰러진 스완을 깨우기 위해 인간 의원까지 오가고 있었다고 했다. 인간이라면 치를 떠는 뱀이 인간의 손을 빌리면서까지 사력을 다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단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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