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89화 (389/488)
  • 389화

    코르넬은 루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든 모습. 미완성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림이 명확하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코르넬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감쳐물었다.

    왜 누님들 같지?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조작됐을 확률이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두 소녀의 잠든 모습은 코르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백작님을 만나야겠어…….”

    닮았다. 아주 잠깐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림 속의 소녀들은 전쟁 통에 죽었던 제 사촌 누님들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숙부였던 테런스 포르의 사라진 두 딸들을 꼭 닮았다.

    *

    레온의 영지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처럼 아주 고요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할 일이 마땅히 없었던 이엘은 평소처럼 어린 사자와 호랑이의 글자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컥!”

    “폐하!”

    “폐하!!”

    그러나 웃으며 아이들을 지켜보던 이엘이 입에서 피를 뿜더니 바닥으로 쓰러진 건 순식간이었다. 주변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하트와 일라이저가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와 쓰러진 이엘을 부축했다. 일라이저가 황급히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맥박을 쟀다.

    “잠깐 기절하신 듯합니다.”

    “갑자기 왜…… 스완인가?”

    원인을 찾던 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멀쩡하던 그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질 만한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노아가 레온과 함께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하트는 급한 대로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엘을 제 등에 태웠다.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습니다.”

    “피?”

    노아는 하이에나의 등에서 눈을 감고 쓰러져 있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입가에 묻은 피가 상황이 나빴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노아에겐 익숙했다.

    “스완에게 문제가 생겼다.”

    노아 역시 스완을 지적했다. 몇 년 전, 뱀의 영지에서 이엘이 자해를 시도했을 때 스완을 바로 코앞에서 봤었다. 그때의 스완과 지금의 이엘의 모습이 똑같았다.

    “젠장. 레온, 넌 오드 님을 폐하의 침실로 모셔 와. 그리고 근위대장, 경은 인원을 추려서 뱀의 영지로 떠날 준비를 해라.”

    “백조에게 문제가 생긴 게 맞습니까?”

    “지금으로선 그것 말고는 예상되는 게 없어.”

    뱀의 영지에서 성력을 사용하는 게 힘들다고 투덜거리긴 했어도, 스완은 매일 이엘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상황을 보고해 왔다. 오늘 아침까지도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 말라고 했었다는데…….

    노아가 그 걱정스러운 고니를 뱀의 영지에 홀로 두고 올 수 있었던 건 놈의 성력을 믿어서였기도 하지만, 스완을 대하는 로빈의 태도가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빈은 스완을 언젠간 죽일 생각이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닐 터였다.

    “……아니면 폐하처럼 스스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노아의 시선이 뱀의 영지가 있는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목숨이 달한 상황이라면 성력으로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예전의 이엘이 자해를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자처한 위험이 아니라면.

    “하트 경. 정찰대를 두 개로 나눠서 하나는 곧장 뱀의 영지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독수리의 영지로 보내도록. 독수리가 능력을 쓸 수 있으니 뱀의 영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 있을지 몰라.”

    “알겠습니다, 각하.”

    만약 스완이 이엘처럼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며 상황을 꾸민 거라면, 그때 이성을 잃고 쳐들어가려 했던 자신의 모습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외부에서 정황을 확인하고 이성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이엘이 쓰러진 지금으로선 스완과 연락이 닿을 만한 수단이 전혀 없으니까.

    하트는 제 등에 있던 이엘을 노아의 품에 안겨 주곤, 정찰병들을 소집하기 위해 근위대와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노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제 등에 이엘과 일라이저를 태운 채 레온의 성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기절하긴 했지만 상태가 악화된 건 아니었다. 이엘이 자살을 시도했을 땐 정말로 죽었던 거라 스완의 숨도 잠깐 멈췄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의식을 잃고 기절한 듯했다. 침대에 이엘을 눕힌 노아는 타월에 물을 묻혀 그녀의 뺨을 닦아 주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일라이저가 침실에 고요한 침묵이 찾아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엘이 어떻게 될까 답답하고 두려웠던 건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일라이저의 경우는 이런 상황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탓에 더 놀란 듯했다.

    “아마.”

    “아마라니요. 그게 무슨……!”

    “백조와 폐하의 영혼이 이어져 있다는 건 후작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폐하께서 뱀의 영지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을 때, 스완이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거든.”

    일라이저는 노아의 입 모양을 보며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때 자신도 뱀의 영지에 있었다. 이엘을 만나기 위해 성 안으로 숨어들었고 뱀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그녀를 만나는 것에 성공했다. 그때 일라이저는 이엘의 목덜미에 생긴 상처를 발견했었다.

    힘이 탁 빠진 듯, 일라이저가 주변에 있던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지금은 스완이……,”

    “아마도. 확신할 순 없지만 스완이 무슨 짓을 벌인 듯하다.”

    무모한 짓을 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그때의 이엘은 자신의 목숨이 ‘그’에게 달려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지만, 제 목숨이 누구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스완이 구태여 그런 시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스완은 안전한 건가요? 서둘러 데려와야 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정찰병을 꾸렸잖아. 기다려. 우선은 폐하께서 의식을 찾으시는 게 우선이야.”

    근데 조금 이상하다. 그때 스완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도 바로 눈을 번쩍 떴는데……. 물론 안정을 되찾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이렇게 의식이 완전히 날아간 상태는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 노아가 그 말을 읊조렸을 때,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오드가 들어섰다.

    “오드 님.”

    “폐하께선 어떠십니까?”

    “목숨엔 지장이 없으시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계십니다.”

    “잠깐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예.”

    아쉽지만 노아와 일라이저는 함께 들어왔던 레온을 따라 침실을 나가야 했다. 세 사람이 나가고 적막만 가라앉은 침실 안에서 오드는 손을 뻗어 이엘의 이마에 얹었다. 온기도, 한기도 느껴지지 않는 체온에 안도한 오드가 주변에 성력으로 결계를 쳤다.

    “아주 잠깐 시간을 벌어 줄게.”

    오드와 스완, 그리고 드레인까지. 세 사람이 각기 다른 공간에서 펼친 성력으로 인해 어둡고 사악한 기운이 잠깐이나마 물러날 것이다.

    한편 정신을 잃은 이엘이 눈을 뜬 건 익숙한 공간 안에서였다. 감각이 예민한 편이라 한 번 머물렀던 곳은 기민하게 알아차리곤 했다.

    “드디어 눈 떴네.”

    “폐하아!”

    여자의 목소리 위로 스완의 뒤집힐 것 같은 비명 소리가 덧입혀졌다. 스완은 눈을 뜬 이엘을 냅다 끌어안으며 엉엉 우는 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자, 잠깐만……. 여기가 대체 왜…….”

    “미안해요, 나타니엘.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서.”

    스완이면 몰라도 이엘에게까지 이런 식의 괴팍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드레인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우는 시늉 중인 스완을 이엘에게서 강제로 떨어뜨리곤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드레인은 스완이 뱀의 영지로 갔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평소처럼 고니의 꿈에 파고들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좀처럼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 마치 이엘을 직접적으로 만나고 싶은데 그녀의 곁을 맴도는 ‘목소리’ 때문에 방해받았을 때처럼.

    그리고 때마침 스완이 사고를 쳤다. 소모라 땅에 몰래 숨어들어 그곳을 정화하려다 뱀들의 공격을 받고 기절한 것이다.

    “너 괜찮아?”

    “응, 괜찮아요. 폐하는 괜찮아요?”

    “난 네가 죽는 줄 알았어.”

    스완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이엘은 안도했다. 아주 옛날, 내가 로빈의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을 때 스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원치 않은 죽음을 갑자기 경험해야 했을 그때의 스완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여긴 어디예요?”

    “스완의 꿈속이자, 제 능력 안이에요. 예전에 폐하를 만났던 그때 그곳.”

    “아.”

    “밖에서 나자르 님이 시간을 벌어 주고 있긴 하지만, 오래는 못 버틸 거예요. 폐하와 스완의 영혼이 뒤섞인 잠깐의 틈을 파고든 거라 금방 깨질 겁니다.”

    “드레인. 할 말이 있어서 우릴 부른 건가요?”

    “맞아요. 저는 밖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지 못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저 어림짐작할 뿐입니다.”

    드레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푸른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더니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네요.”

    ‘그’에게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면서 동시에 약속은 깨뜨리지 않는 것. 아마도 눈속임을 할 생각인 것 같은데……. 사실 그건 도박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드레인의 생각을 읽은 건지 이엘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녀를 설득했다.

    “……미안해요, 드레인. 당신에게 먼저 동의를 구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라…….”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이엘의 대답에 드레인은 다시 입을 다물며 고민에 빠졌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전적이 있다. 제 친구의 소중한 아이들을 살리겠다는 이유로 자신의 능력 안으로 끌어들였지만, 그 아이들은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깊은 수마에 빠진 상태니까. 드레인은 손톱을 잘근거리며 계속해서 고민에 잠겼다.

    “드레인.”

    “함부로 시도할 수 없어요. 폐하의 아이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제 능력 속에 갇힌 아이들처럼요.”

    “이 방법이 아니면 나와 내 아이는 모두 죽을 텐데요.”

    “…….”

    “드레인.”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스완이 초조한 듯 왔다 갔다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 없다. 로빈의 영지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육체에도 한계가 왔다. 이제 곧 잠에서 깨어나 정신이 그곳으로 돌아갈 텐데, 어쩌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스완이 침묵을 유지하는 두 사람을 불렀다.

    “폐하, 드레인. 시간이 별로 없어요!”

    “드레인.”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