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일레나가 태어난 지 삼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노아는 그 애의 이름을 잊지 못한다. 그 이름은 자신이 지어 줬으니까. 우습게도 이엘로부터 만나게 될 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기도 전에, 노아는 루시우스의 아이 이름을 먼저 지어 주었다.
일레나는 루시우스 부부에게 있어 큰 기쁨이었다. 그 아이의 탄생으로 러셀 부인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던 셈이니까. 루시우스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곧장 노아를 찾아와 부탁했다. 첫째의 이름은 네가 지어 주었으면 좋겠다며.
“하하…….”
아무렇지 않게 걷던 노아가 걸음을 멈추고 허탈하게 웃었다. 인간 여자아이가 살아가기엔 험난하겠지만, 끝까지 강하게 살기를 바라며 지어 주었던 이름이었는데. 그 애는 고작 성년을 조금 넘긴 어린 나이에 눈을 감았다. 자신들이 만든 2차 전쟁에 희생되어서.
루시우스는 미워했어도 그의 자식을 미워한 적은 없었는데. 오히려 첫째 일레나는 오래 살기를 바랐다. 대부도 아니었으면서 마치 대부라도 된 양, 그 어린아이를 귀엽게 생각하며 측은한 마음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봤자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꼴이 되었지만.
모르겠다. 일라이저가 제 아이의 대부가 되겠다고 하니 기분이 복잡해져서 이러는 걸까.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되었나 싶어, 자꾸만 마음이 갑갑했다.
*
“어서 오세요, 포르 자작.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백작님.”
그렇게 말한 것치곤 코르넬은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안드로는 제 앞에 선 코르넬 포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일라이저와 3기사단장인 라니에로의 오랜 친구이자 이엘이 신임할 만큼 영특한 인재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겁쟁이로밖에 안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코르넬을 영지로 불러들여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예? 코르넬이라면…… 포르 자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폐하께서 부탁하셨다.’
스완을 로빈의 땅에 넘기고 잠시 늑대의 영지로 돌아왔던 노아가 안드로를 보자마자 대뜸 코르넬을 언급했다. 안드로는 자신들의 영지에 인간이 들어오는 게 불쾌했지만 이엘의 부탁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코르넬은 이미 폐하의 편이지 않습니까?’
‘코르넬은 제 친구인 일라이저와 라니에로가 아니면 마음을 열지를 않아. 그건 폐하와 단둘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폐하는 코르넬의 지혜가 필요하시다. 그 역할을 네가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저보다는 앤디가 더 잘 어울릴 듯한데요.’
안드로의 대답에 노아도 동의한다는 듯 대꾸가 없었다. 이종족과 인간 모두에게 넉살이 좋은 앤디나 할 수 있을 법한 과제를, 하필 상극인 안드로에게 맡긴 것에 노아조차 의문이었다. 상대는 이종족만 봐도 겁을 지레 먹는 코르넬인데.
아무튼 그런 연유로 안드로는 코르넬을 자신들의 영지에 초대했다. 물론 그 초대장에 코르넬이 흔쾌히 답한 건 절대 아니다. 코르넬 포르는 주기적으로 황제와 함께하는 귀족회의에도 병을 핑계로 불참하곤 했으니까.
지난번 귀족회의는 주최자인 패티스가 반강제로 끌고 왔으니 참석했다지만, 지금처럼 사적인 초대에 그가 쉽게 응할 리 없었다.
“그런데…… 라, 라니에로 페루츠 후작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까부터 주변을 왜 그렇게 살피나 했더니 제 친구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드로는 진땀을 빼고 있는 코르넬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후작님께선 이곳에 안 계십니다.”
“예? 편지에선 분명히 라니에로도 참석한다고…….”
“페루츠 후작께선 제도를 지키셔야 하기에 불참하신다고 반려하셨습니다.”
“…….”
“오는 길이 고되었을 듯하니 처소를 먼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코르넬은 이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늑대는 이엘의 최측근이었지만 그래 봤자 코르넬에겐 두려운 이종족 중 하나일 뿐이다. 라니에로가 있다는 말만 믿고 왔는데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혼자만 덜렁 남겨졌단 생각에 숨이 막혔다.
“아, 그 전에 자작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네?”
“마침 우리 영지에 뛰어난 화공이 한 명 머물고 있는데, 괜찮으면 자리를 마련해 줄까요?”
안드로의 제안에 코르넬의 딱딱했던 표정이 점차 느슨해졌다. 아, 참. 그는 인간입니다. 안드로의 덧붙여진 말을 듣고 코르넬의 긴장은 눈 녹듯 사라졌다.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늑대밖에 없는 이곳에 인간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그 누구라도 바랄 게 없는 상황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귀족 청년의 모습을 지켜보며 안드로는 속으로 웃었다. 왜 폐하께서 제게 코르넬을 맡겼는지 알 것도 같다. 올리세스로부터 포필렌이 늑대의 영지에 상용화되는 데에 힘을 실어 주는 대가로 화공 루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 역시 이엘이 루벤과 그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계획한 일이었다.
그리고 코르넬이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걸 알고, 일부러 루벤과 코르넬이 만날 수 있게 만든 모양이었다.
“백작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걸어오던 루벤이 안드로를 발견하곤 공손히 절했다. 그는 안드로의 부탁으로 공작성의 한쪽 벽면에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다.
성이 워낙 큰 탓에 벽을 가득 채운 그림을 그리는 게 힘들 텐데도 루벤은 비교적 평온한 안색이었다. 오히려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조카의 세작 일을 지켜봐야만 했을 때보다 안정적으로 보였다.
“이쪽은 코르넬 포르 자작이다. 러셀 후작님과 페루츠 후작님의 오랜 친구이며, 그림에 관심이 많다고 들어 그대를 소개시키기 위해 불렀다.”
“그러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포르 자작님.”
코르넬은 얼쯤얼쯤 루벤의 인사를 받고는 안드로의 눈치를 살폈다. 냉기가 흐르는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던 안드로는 의외로 자신들을 배려해 주기 위해서인지, 두 사람을 소개해 주곤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 버렸다. 갖고 온 짐은 침실에 둘 테니 편히 이야기 나누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그림에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보잘것없는 잔재주이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한 루벤이 먼저 웃으며 자신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코르넬을 데리고 향했다.
늑대의 영지는 안팎으로 단단한 곳이었다. 최상위 포식자이며, 인간과 이종족 모두가 선망하는 종족이니 안전하기로는 여기만 한 데가 없었던 것이다.
먹고 자는 것이 안정적이니 자연히 마음도 차분해졌다. 게다가 황제가 제 가족을 구해 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 덕에 루벤은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중이었다.
한편 화공이라는 노인의 뒤를 따라가던 코르넬은 큰 기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불편한 늑대보다는 같은 인간을 대하는 게 편한 터라 군말 없이 노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곧 바뀌었다.
“이건…….”
“아직 미완성이라 조금 부끄럽습니다.”
부끄럽다는 건 인사치레로 하는 겸양인가. 코르넬은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대한 폭포와 금방이라도 향기가 퍼질 것만 같은 꽃밭.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절경이 공작성에 펼쳐져 있었다.
“당신이 그렸습니까?”
“말씀 편히 하십시오. 저는 평민입니다, 자작님.”
“이건 정말…… 작품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군요.”
“과찬이십니다.”
“당신은…… 아, 이름이 어떻게…….”
“루벤 단이라고 합니다.”
“루벤 단…….”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을 곱씹던 코르넬이 손뼉을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1제국 궁정화가였던 그 루벤 단입니까?!”
“그걸 어떻게…….”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럴 수가……. 믿기지 않아요. 당신을 직접 만나는 날이 오다니…….”
어릴 때부터 다재다능했던 코르넬이 예술에 관심이 많은 걸 알게 된 일라이저는, 제국이 세워지자마자 이엘에게 부탁해 코르넬이 황실도서관을 왕래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덕에 코르넬은 그곳에서 여러 책을 접하게 되었고 루벤 단의 업적도 보게 됐다.
눈을 반짝이며 곳곳을 돌아보는 코르넬의 모습에 루벤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받는 순수한 관심이라 묻어 두었던 옛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아주 옛날, 권력이나 명예에 욕심이 없던 소년 시절엔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즐거워 이것저것 그리곤 했는데……. 궁정화가로 임명되고 난 뒤로는 이런 풍경화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 돈 되는 초상화에만 전념해 왔으니까.
“혹시 더 볼 수 있을까요? 부탁드릴게요. 조금만 더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저 청년의 순수한 눈동자를 외면하지 못하겠다. 결국 루벤은 고개를 끄덕이곤 코르넬을 데리고 자신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선 루벤은 그것을 걷어 내고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그렸던 그림 몇 가지를 코르넬에게 보여 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땅한 그림이 별로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영광인걸요.”
코르넬은 언제 벌벌 떨었냐는 듯, 이곳에 왔을 때의 두려움은 다 잊고 아이처럼 신난 표정으로 루벤의 그림을 둘러보았다. 모두 미완성의 그림이었지만 제 눈엔 그 어떤 작품보다 완벽한 그림들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구석에 있던 그림 하나가 코르넬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코르넬은 그 그림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자작님?”
갑자기 조용해진 코르넬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루벤이 그에게 다가갔다.
“아, 그건 폐하께서 부탁하셨던 그림의 스케치입니다.”
“……네?”
“스케치했던 것들 중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것이지만 완성작은 따로 있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예?”
“완성작이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 수 있습니까?”
미간까지 좁힌 채 진지하게 묻는 코르넬을 바라보며 루벤이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전까지 코르넬의 시선이 붙박였던 그림은 다름 아닌 황제의 부탁을 받아 그렸던 초상화의 스케치였다. 황제가 아주 세밀하게 요구를 해 왔던 터라 미완성의 스케치가 몇 점 있었는데 그중 완성작에 가장 가까운 스케치만 보존하고 있었다.
“완성작은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이라면…….”
“늑대의 영지요. 아마도 백작님께서 보관하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맡기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아는 분들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