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
“아……!”
“괜찮으십니까, 폐하?!”
“폐하!”
회의를 진행하던 이엘이 별안간 제 배를 붙잡으며 고통을 호소하자, 그 주변에 있던 자들이 놀란 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노아는 이미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린 후였다.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내려 줘.”
“쉬셔야 합니다. 폐하의 몸 상태가 다른 것보다 중요하니까요.”
노아의 굳건한 대답에 결국 이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말았다. 레온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회의실 문을 열고 안내했다.
“공작님. 폐하를 모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하여 셋이 텅 빈 복도를 지나치는 이상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램프를 들고 빠른 길을 안내하는 레온의 뒤로 노아가 그녀를 품에 안아 들고 따랐다.
“오드 님을 부를까요?”
“아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노아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이엘이 웃으며 제 배에 손을 올렸다. 달손님으로 인한 통증이 이렇게 심한 줄 몰랐다. 달손님을 겪은 시간보다 겪지 않았던 시간이 더 길었으니 잊고 살 만도 하지. 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제야 평범에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든 탓에.
“폐하, 쉬십시오. 회의 마무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공작님. 폐하의 간호를 부탁드립니다.”
침실에 들어서고 그녀가 침대에 눕는 것까지 확인한 레온은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곤 조용히 침실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응? 아니. 괜찮다니까.”
“인간 여자의 통증은 심할 경우 약으로도 통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참지 마시고 오드 님의 성력을 받으십시오.”
“아직까진 견딜 만해. 정말이야.”
침대 아래 러그에 무릎을 꿇고, 노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 주며 그렇다면 다행이란 말을 남겼다. 그러곤 이엘의 손을 붙잡아 제 입술을 그 손등 위에 마구 찍기 시작했다. 그의 어울리지 않는 애교에 이엘이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응?”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
“물론 저 역시 아이를 갖고 싶지만…… 그건 제가 모체가 아니기 때문에 갖는 욕심입니다.”
인간과 이종족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에 관계할 때도 약을 먹어 힘을 죽이고 죽여야 가능한 사이였다. 평범한 인간의 아이를 갖는 것도 어렵고 힘든데, 이종족의 아이를 갖게 되는 건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할 수밖에. 2계급인 둔 중에서 어미가 인간인 개체가 괜히 드문 게 아니다.
“폐하, 저는 폐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아이를 가지다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아이를 임신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 정말 어떡하지……. 예전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걱정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상대는 이종족이 아닌 인간, 그것도 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인간 여자다.
“갑자기 걱정이 많아졌구나.”
“현실로 다가왔으니까요.”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다시 만나 몸에 걸린 제약을 풀었다. 잊고 살았던 달손님이 찾아왔고, 이제는 평범한 사람처럼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 몸이 됐다. 그건 새로운 공포를 떠안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엘은 활짝 웃곤 노아의 손을 끌어 제 배에 갖다 대며 속삭였다.
“너무 신기하지 않아? 언젠가 내게도 새로운 생명이 찾아올 거란 게.”
“엘.”
“괜찮아. 놈이 내 아이를 노리고 있단 건, 돌려 말하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진 나와 아이 모두 안전할 거란 소리기도 하니까.”
벌써부터 설렌 듯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노아도 걱정을 뒤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다시 입술을 꾹 붙였다가 떼며 중얼거렸다.
“앤디는 벌써부터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저가 아이의 대부가 되겠다면서요.”
“이런. 테오의 대부는 이미 정해졌는데. 안타깝네.”
“벌써 정해 놓으셨습니까? 누구입니까?”
“일.”
“일이라면…….”
“응. 일라이저 러셀. 러셀 후작이 대부가 되고 싶다고 먼저 말하더군.”
일라이저의 이름이 나오자 노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노아는 일라이저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가 이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폐하께서 그에게 부탁하신 게 아니라…… 그가 먼저 말씀드린 겁니까?”
“응. 아기가 태어나면 자신이 아이의 후견인이 되고 싶다고 했어.”
“…….”
“내가 그의 아비에게 배웠듯, 내 아이가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노아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엘이 의문을 달고 그를 쳐다봤지만 노아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곤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기만 했다.
“아플 땐 좀 자는 게 좋습니다. 눈 붙이십시오, 폐하.”
“응. 알겠어.”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통증이 심했던 건지, 이엘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눈을 감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 버렸다. 노아는 협탁에 올려 두었던 손수건으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며 그 옆을 한참이나 지켰다.
대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무슨 마음일까. 자신은 그녀가 낳을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도, 아이의 대부가 될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이는 무조건 자신의 아이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라이저는 아니겠지. 그는 아비가 아닌 대부를 선택했다. 그게 일라이저가 살아가는 방법이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노아는 그녀가 조금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커튼을 쳐서 침실을 어둡게 만들어 주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나오자마자 극도의 피로가 쏟아졌다.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마주친 하트도 노아의 안색이 좋지 않다고 여긴 듯했다.
“각하. 돌아가셔서 쉬십시오.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럼 부탁하겠네.”
하루 정도만 쉬었다가 복귀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피로한 눈가를 꾹꾹 누른 채 돌아섰던 노아의 앞에, 조금 전까지 제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대상이 나타났다.
“각하. 폐하께서 쓰러지셨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시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경비를 위해 영지 너머를 둘러보러 나갔던 일라이저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뛰어온 모양이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것을 보며 노아는 무겁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오. 피로가 쌓인 탓인지, 지금은 곤히 주무시고 계시니 후작은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다행이군요. 알겠습니다.”
“러셀 후작.”
“예.”
“…….”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완 전혀 다른 말투였다. 일라이저는 차갑게 굳은 낯으로 용건을 빨리 말하라는 듯 노아를 보며 살짝 눈짓했다.
“……후작은 형제가 많았던 걸로 아는데.”
“질문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가족에 관해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일라이저가 대놓고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며 묻자, 노아는 열었던 입을 닫고 아주 오래된 기억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일라이저의 아비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루시우스는 우연히 신분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곧고 우직한 남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지만, 사랑에 빠진 뒤로는 가문도 저버리고 떠나 그 여자와 살림을 차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선대 후작, 그러니까 일라이저의 친조부였던 당시의 후작은 제 아들인 루시우스가 신분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실 인간들 사이에서 작위가 있고 없고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당시에도 귀족과 평민의 혼인은 비일비재한 편이었다.
다만 러셀 가문은 오래도록 황실에 충성했던 가문인 터라 그녀의 신분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그랬던 선선대 후작이 아들 내외를 다시 가문으로 받아들였던 건 첫째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후작이 그토록 원하던 손자는 아니었지만 꽤나 똘똘한 손녀를 얻게 되어 러셀 가에는 기쁨이 넘쳤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도 딸이 한 명 더 있었고.
노아는 루시우스의 두 딸이 태어나는 걸 모두 지켜봤었다. 이종족이기에 아이들의 대부가 될 순 없었지만 그의 딸들이 자라면서 필요한 것들은 노아가 채워 줄 정도로, 그때의 노아와 루시우스의 사이는 좋았었다.
물론 일라이저의 탄생부터는 관계가 소원해졌기에, 노아는 막내의 이름이 일라이저란 것도 건너 들었을 뿐이다.
“아무 뜻 없이 하신 말씀이시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일라이저.”
“…….”
“그대의 이름은 누가…… 아니오.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붙잡아 둬서 미안하게 됐소.”
“뜬금없이 죽은 제 누님들에 관해 궁금하신 건 아닐 테고,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물어보시는 것에 대답하겠습니다.”
노아를 향해 묵례하고 돌아서려던 일라이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갑자기 저를 보자마자 죽은 누나들을 묻는 것이 처음엔 불쾌했지만 모른 척 넘어가기엔 묘하게 찝찝했던 것이다.
자신과 노아의 사이가 예전보다는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대화 한 마디 나누기 어려운 상대인 건 똑같은데. 게다가 서로의 가족관계는 암묵적으로 금지된 화제이지 않았나. 그렇다고 노아의 상태가 약에 절었거나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맨정신에 저런 얘기를 꺼내는 게, 그냥 가볍게 넘기기엔 상당히 찝찝했다.
“별것 아니었소. 그냥 헛소리가 나왔나 보군.”
“제 이름에 무슨 비화라도 있습니까?”
“…….”
“아니면 제 누님들입니까?”
“…….”
“공작님이 관심 갖고 계신 게. 제가 아니라?”
노아는 제 동기들이 언급되어 불쾌해진 일라이저가 다소 무례하게 쏘아붙였음에도 그의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온통 루시우스를 닮았지만 유일하게 닮지 않은 다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노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후작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는지 궁금했을 뿐이오. 별 얘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 쉬시오.”
“첫째 누님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아…….”
“그게 궁금하셨던 겁니까?”
“아니오, 피곤해서 헛소리를 많이 하게 됐군. 먼저 돌아가겠소.”
노아는 짧은 탄식을 내뱉고는 먼저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첫째라면…… 일레나 러셀. 그 아이가 지어 준 이름인가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