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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86화 (386/488)
  • 386화

    하지만…… 이온일 수도 있다. 이엘은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조금씩 해 왔다. 어쩌면 자신의 희생으로 깨어난 이온이 신탁대로 세상을 새롭게 만들지 모른다는 생각을, 신탁을 들은 뒤부터 끊임없이 해 왔다.

    아니. 사실 그 이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신탁을 알기 이전부터, 땅속에 숨어 살다가 ‘그’를 만나고 다시 땅 위로 올라왔던 그 순간부터. 이온은 신의 관심을 받았고 자신은 그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레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이온이 신탁의 아이일지 모른다는 생각.”

    “글쎄, 모르겠네. 확실한 건 내 관심 범위 내에 황자는 없다는 거야.”

    “…….”

    “신탁의 아이가 너라면 다행이고, 네가 아닌 황자라면. 그래서 너희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거기서 말이 끊겼다. 레온은 황자의 쌍둥이인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단어를 고심하는 듯했다. 날것의 단어를 내뱉지 않기 위해 숙고하던 그가 최대한 부드러운 단어를 선택했다.

    “난 신탁을 버릴게.”

    “레온.”

    “신은 못 버리지만, 신탁은 버릴 수 있잖아.”

    결국 그의 선택은 이엘이란 소리였다. 당연한 얘기였다. 모두가 그녀의 동맹인데 누가 아르세니온을 선택하겠는가.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모두가 이엘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나타니엘. 지금까지 진행된 걸 보면…… 신의 뜻은 바뀌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그래.”

    “…….”

    “네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나도 해. 어쩌면…… 네가 아니라 아르세니온 황자가 신탁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야.”

    “레니.”

    “하지만 난 널 포기하지 않아. 그럴 수 없어. 나타니엘. 네가 아니라 아르세니온이 신탁의 주인공이라서 네가 죽을 수밖에 없다면. 혹은 네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다면. 그걸 가정해서 미리 대비하자는 거야. 응?”

    땅속에서 이곳 지상으로 올라오기 전, 오드는 세 가지 제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그리고 타이곤의 갈기. 세 가지만 준비하면 나머지는 오드가 알아서 구할 거라 말했다.

    그러나 알아서 구하겠다는 건 결국 오드의 목숨을 이르는 말이었다.

    ‘내 목숨으로 이온을 살릴 수 있어.’

    처음부터 나자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했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목숨을 대신해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래. 오드도 한 생명인데. 내 친구인데. 내 가족인데……. 이엘은 엄습해 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제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언젠가 오드가 그랬다. 나자르는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고. 그곳은 신의 곁이기에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이라고.

    “아까 말했지만 선택은 네 몫이야, 나타니엘. 난 기다릴게.”

    “…….”

    “그냥 알아 달라고 말한 거야. 최후의 최후엔, 나도 네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최후의 최후까지 가지 않아도 넌 그 자체로 힘이 돼.”

    “넌 여전하구나. 여전히 입만 열면 예쁜 말만 해.”

    “…….”

    “그래서 미운 말, 나쁜 말만 듣고 자란 나도 예쁘고 다정한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그러니 내 보잘것없는 갈기가 네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길, 레온은 그렇게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

    젠장, 진짜 만날 수가 없잖아. 스완이 짜증을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뱀의 영지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스완이 드레인을 만나지 못한 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 거기선 암컷 용을 만나지 못할 거야. 그리고 네 성력도 지금보다 약해질지 몰라. 전에 거기서 머무를 때 오드도 그랬으니까.’

    떠나기 전에 그녀가 했던 충고들 중 하나를 떠올렸다. 뱀의 영지는 그 어느 곳보다 악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에 나자르인 오드도 버티기 힘들어 했었다고 한다.

    스완은 가만히 제 손바닥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아주 잠깐 새하얀 빛이 손 위에 타오르듯 솟았다가 힘없이 탁 꺼지고 말았다.

    “제어도 잘 안 되네.”

    이엘이 왜 그렇게 자신이 뱀의 영지에 가는 걸 반대했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스완은 긴 한숨을 내쉬다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제 뺨을 세차게 여러 번 두드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다간 뱀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카이로스 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자신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카이로스? 아, 내 이름이었지. 아주 잠깐 얼이 나갔던 스완이 눈을 깜빡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대충 아무 이름이나 가져와 둘러댔더니 한 달이 지나도록 익숙해지질 않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스완이 남자를 맞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당신이 이곳엔 무슨 일인가요?”

    “오늘은 몸 상태가 괜찮으신지, 공작님께서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리플이라고 했던가, 저 남자의 이름이? 로빈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남자는 한쪽 팔을 잘 쓰지 못하는 듯했다. 얼핏 듣기론 인간에게 당했다고 하던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지만 칭찬해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스완은 저 거대한 남자가 께름칙하게 싫었으니까.

    “글쎄요. 오늘도 몸이 썩 좋지 않네요. 아시겠지만 여긴 정화를 해도 해도 모자라거든요.”

    모자란 걸 넘어서, 아주 숨이 막혀 죽겠다. 자신은 오드처럼 성력을 완전하게 쓰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정화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뱀들이 내뿜는 독기까지 뒤엉킨 터라 정말 숨 쉴 때마다 누가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치 너스레를 떨 듯 별일 아니라는 투로 여상히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가 언제까지 기다려 드려야 할까요, 카이로스 님?”

    “날 납치하고 감금한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협박까지 하는 건가요? 불쾌하네요.”

    스완의 퉁명스런 대꾸에 리플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같은 나자르였지만 오드와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나자르라고 대접받고 살아서 그런가. 저 꼬마 나자르는 제멋대로였다.

    “죄송합니다, 카이로스 님. 다 제 불찰입니다. 공작님께선 카이로스 님을 극진히 모시라고 하셨지만 제가 카이로스 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저 나자르의 대단한 성력을 눈앞에서 목도한 이상, 최대한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봐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리플은 그날을 떠올렸다. 나자르가 이곳에 도착하고 잠깐이지만 이곳에 성력을 펼쳐 차가웠던 공기를 순식간에 따뜻하게 변화시켰던 그날을. 못마땅한 얼굴로 모여 있던 다른 뱀들마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린 채 성력을 느끼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의 자신들이 신을 저버렸다고는 해도 본래 태생이 신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오랜만에 몸으로 스며든 성력의 온기에 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주인인 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대외적으로 황제의 뒤꽁무니를 열렬히 따라다니긴 했지만, 뱀은 명백히 그녀의 적대자였다. 그러니 호의적인 성력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일 수밖에.

    리플은 넋을 놓은 듯한 제 주인의 표정을 그날 처음 봤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로빈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씁쓸함을 자아냈다.

    “제 성력은 그렇게 함부로 쓰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전 오드 님이랑 다르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카이로스 님께서 준비되실 때까지 저희가 충분히 기다리겠단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리플의 말에 스완은 코웃음을 쳤다. 이게 어디서 사기를 쳐. 웃기고 있네, 진짜. 와, 여기 오기 전에 폐하를 만나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진짜 바보같이 속을 뻔했다. 스완은 주변을 둘러보는 리플을 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로빈이 자신을 이곳으로 납치한 이유. 제게는 척박한 뱀의 땅에 부디 나자르 님의 성력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달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자신을 죽이려는 고도의 교활한 술수였다. 나자르인 자신이 보호석을 흡수해서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가면 희생양으로 바칠 생각이겠지.

    곱게 죽어 줄 마음은 없다. 폐하께서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으셨는데 내가 그냥 죽겠냐고. 스완은 흥, 콧방귀를 뀌며 피곤하다는 이유를 들어 리플을 침실에서 쫓아냈다. 그러곤 테라스 문을 활짝 열고 그곳으로 걸어가 컴컴한 뱀의 땅을 응시했다.

    “저기가 소모라…….”

    노아에게 들은 대로 겉으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땅이다. 하지만 과거의 제도가 그랬듯, 저 소모라 땅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더러운 것들이 우글거리고 있겠지. ‘그’를 불러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스완은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길게 숨을 내뱉으며 소모라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미미하게 생겨났던 하얀 빛이 순식간에 폭발하듯 거대해지더니, 이내 소모라가 있는 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다. 몇 번이나 정화를 시도했지만 힘이 부족할뿐더러,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성력이 미치기도 전에 꺼지고 마는 것이다.

    “아, 미치겠네 정말! 이래서 내게 맡겨진 막중한 사명을 내가 해낼 수나 있을까?!”

    제풀에 지친 스완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이 딱히 스완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긴 건 아니었지만, 스완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제 몫을 해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저 소모라 땅을 정화하는 것. 이엘의 최종 목표는 뱀이나 올리세스 따위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잘라 내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선 뱀과 올리세스를 제거하는 것도 꼭 필요한 단계였다.

    소모라는 그 일환이었다. 일단 저 골칫덩어리 땅을 정리해야 심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을 것 같다.

    “여기선 안 돼. 저기에 직접 가는 수밖에는…….”

    스완은 소모라가 있는 쪽을 한참이나 노려보듯 응시했다.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소모라에 직접 가서 정화하는 수밖에.

    최대한 빨리 가야만 한다. 이제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뭍으로 나와 살 수 있는 건 계약이 시작된 뒤로 고작 5년. 그 5년의 기한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태였다. 곧 있으면 그녀와 계약이 끝나게 될 텐데……. 생각을 덧대던 스완이 미간을 좁힌 채 벌떡 일어섰다.

    “어? 근데 이 성력은 전승되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암컷이 없는 지금은 번식을 할 수 없으니 새끼를 가질 수도 없다. 그럼 내가 갖고 있는 이 성력은 어떻게 되는 거지? 스완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리며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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