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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85화 (385/488)
  • 385화

    입성하는 동안 일렬로 쭉 늘어선 호랑이와 사자 무리를 지켜보며, 이엘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니. 예전에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후작의 종족이 날 잡아먹기 위해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게 떠올랐거든.”

    사냥감을 찾은 것처럼 이엘을 포인팅하며 매섭게 이빨을 드러내던 그 종족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사자와 호랑이는 꼬리를 내린 채 종복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레온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아차 싶었던 건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숙였다.

    “그때의 일은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냐, 뭘 또 후작이 사죄를 하나. 짐도 즐거웠으니 그만하면 됐다.”

    그렇게 웃으며 답한 이엘이 레온의 뒤에 우직하게 서 있던 란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다시 꼿꼿하게 바로 섰다. 이엘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며 격려하자, 란트는 허둥지둥 움직이더니 그녀의 반지 위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폐, 폐하를 뵙습니다…….”

    “덩치는 산만 하면서 겁이 좀 많습니다.”

    란트의 커다란 등을 툭 치며 레온이 농담을 섞어 답하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 란트는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도 그녀가 황제인 것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에아―!”

    활짝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이엘의 걸음이 멈춰 섰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그녀의 시선이 돌아갔고, 금세 다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번엔 뒤로 넘어가지 않게 두 다리를 바닥에 단단히 붙이고 저를 향해 달려오는 엘타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오랜만이야, 엘타.”

    “에아(폐하)!”

    그녀의 품에 파고든 엘타가 얼굴을 치대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뒤로도 새끼였던 테르들이 성체가 되어 그녀를 반겼다. 여전히 이엘의 손을 타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예의 없다며 물러나라는 레온의 명령에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애교를 부렸다.

    당연히 이엘은 새끼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놔두게, 괜찮으니까.”

    “피곤하실 텐데 해후는 내일로 미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레온이 권유한 상대는 이엘이었지만, 그의 말에 눈치를 보는 건 새끼 테르들이었다. 폐하께선 피곤하시니 그만 칭얼거리란 소리였던 것이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가는 정말 호되게 혼날 것만 같았다. 결국 엘타와 테르들은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는 걸 택했다.

    “란트 경. 근위대와 기사단들이 머물 처소를 안내해 주게. 폐하께서 머무실 곳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혹 나드를 만날 수 있겠나? 이제 곧 산책할 시간인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입니다, 폐하. 나드도 폐하를 뵙고 싶어 했을 겁니다.”

    레온이 웃으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레온이 아름답게 꾸며 둔 후원의 한가운데였다. 공사를 할 때도 왔었고 완공된 이후에도 왔었지만 이곳은 올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곳이다. 과연 선대의 미적 감각을 타고났다고 불릴 만했다.

    “나드!”

    이엘이 절경에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레온이 산책하고 있던 나드를 발견하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는 제 이름을 듣고 이엘과 레온이 있는 곳을 향해 겅중겅중 뛰어오기 시작했다.

    변한 게 없었다. 나드는 여전히 새끼 이종족들보다 더 작은 아기였다. 우논이면서 말도 하지 못해,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엘이 허리를 숙인 채 나드를 향해 팔을 뻗자, 그 타이곤은 저를 부모처럼 길러 준 레온을 지나쳐 이엘의 품 안에 쏙 안겨 들었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놈입니다.”

    레온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이엘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드는 이엘이 마치 제 어미라도 된 양 그녀의 품에 코를 박고 갸르릉 울음소리를 냈다.

    “나드에게 필요한 게 있나? 제도로 돌아가면 곧장 필요한 것들을 후작령으로 보내 줄게. 무엇이든 말해 봐.”

    “괜찮습니다. 아직은 제가 다 해 줄 수 있으니까요. 지금도 충분히 넘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황궁으로 요구해. 나드에게 필요한 거라면 무엇이든 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이엘이 나드를 바닥에 내려 주자, 아기 타이곤은 넓은 정원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저 멀리 서 있던 집사가 이엘과 레온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나드가 달려간 방향으로 사라졌다.

    “레온.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야?”

    나드와 집사가 사라진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이엘이 운을 뗐다. 한 달 전에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아주 잠깐 레온과 재회하긴 했지만, 그때는 여러 상황상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서둘러 진실을 털어놓아야 했고, 레온은 그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들과 마주해야만 했다.

    이엘이 시선을 돌려 레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 예상대로 그는 안색이 나빴다. 잠을 잘 자고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사실상 대답을 알고서 던진 질문과 다를 바 없었다. 잠을 제대로 자고 있을 리 없지. 포필렌을 끊었을 텐데.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 말고.”

    “…….”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안 될까, 레니?”

    레온은 시선을 모로 틀며 이엘의 눈을 피해 버렸다. 그녀의 말처럼 솔직히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몇 년간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었던 안락함을 이제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란 두려움 때문에 매시간 숨이 막힐 것 같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닙니다. 폐하의 말씀처럼 요새는 나드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나드와?”

    “예. 그랬더니 포필렌을 복용하던 때만큼은 아니어도, 이전처럼 고통으로 인한 불면은 사라졌습니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 위에 웃음이 번진다. 레온은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이엘의 웃음을 좇았다. 웃기지, 별 갖은 노력을 해도 밤이 무섭기만 했는데. 저 웃음 하나에 그 밤을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겼으니 말이야.

    “폐하.”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응?”

    “전에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고민을 했습니다.”

    “무슨 말?”

    “폐하께 필요하단 거요.”

    이엘은 레온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했던 게 무엇인지, 그녀는 작은 머리로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 갈기요.”

    용기가 생겼다.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우논이면서 언젠가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다 감당할 용기가 생겼다.

    “드리고 싶습니다.”

    “레온.”

    “일단 제 말씀 좀 들어 주세요. 화내지 마시구요.”

    “하아…….”

    “나타니엘, 그냥 얘기야. 내 얘기. 응?”

    언제나 달래는 건 이엘의 몫이었는데, 지금은 레온이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이엘은 직면하기 싫은 문제를 맞닥뜨린 것처럼 레온의 눈을 피했다. 이럴 줄 알았다.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그리고 타이곤의 갈기……. 모두에게 그것에 관해 밝혔을 때, 셋 중 하나는 이런 생각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기에, 이엘은 한숨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내가 할 거야. 네 마음대로 갈기 뽑지 마.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할 거면, 나 다시는 너 안 봐.”

    “응, 진짜.”

    “…….”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난 네 의견을 따를게.”

    레온은 웃었지만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웃지 마, 레니. 약간의 짜증이 섞인 그녀의 말투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곤 달래듯 변명을 붙여 설명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수명이 정해져 있어. 실험실에서 태어나서 계속 갈기를 뽑혔거든.”

    “그 갈기는 뽑힌 만큼 수명이 줄어들잖아. 내 말이 틀려?”

    “맞아. 그래서 한 번 뽑힌 것과 두세 번 뽑힌 것엔 네 말처럼 수명 차이가 존재해.”

    그래서 안 된다고 거절했던 거였다. 갈기는 뽑히는 순간부터 생명의 빛이 꺼지는데, 뽑히면 뽑힐수록 그 속도가 빨라진다. 그렇게 갈기가 다 뽑히면 타이곤은 죽게 되는 것이다. 심하면 갈기가 남아 있어도 죽을 수 있다.

    이 종족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갈기가 다 뽑히면 맥없이 죽어 버리는 존재였다.

    “사실 나도 성체가 된 뒤로는 본체화를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 근데 많이 남았을 거야. 아니, 많이 남았어. 그러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레니.”

    “너도 살 거고, 네 오빠도 살릴 거고, 네 아이도 살릴 거라며.”

    “…….”

    “근데 알고 있잖아. 셋 다 살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게 존재할 리 없다는 걸.”

    정곡을 찔린 것처럼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이엘은 레온의 예리한 지적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한숨을 삼켰다. 그의 말이 옳다. 정말 많이 양보해서 살린다고 해도 두 사람이 고작일 터였다.

    한 명은 포기해야 할지 모르고……. 정말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이엘은 주저 없이 아이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온은……. 제 쌍둥이 동기를 생각하던 이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고 말았다.

    아르세니온이 살았던 시간이 고작 7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은 23년. 글쎄……. 어두움만 남겨졌다고 생각했던 땅 위에서의 생활이 마냥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었기에. 이엘은 이곳에서 사랑을 찾았고, 가족을 만들었다.

    이온이 없었던 16년의 시간이, 이온과 함께했던 7년의 시간보다 더 즐거웠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즐거운 시간을 준 건, 이온의 희생과 사랑이었다. 나만 남겨 두고 눈을 감았다는 애증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해묵은 감정은 사라지고 고마움만 남았다. 이온이 남겨 준 삶으로 인해 이엘은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을 하나하나 배우게 됐으니까.

    이건 정말 이온이 준 사랑이었다. 그의 희생과 사랑이 없이는 이엘 역시 전쟁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네가 네 오빠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또 정곡을 찔렸다.

    “왜? 신탁이 아르세니온 황자를 가리킬지도 모르니까?”

    “……레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신탁은 다음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했지만, 신탁의 아이가 이엘인지 이온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모두가 이엘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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