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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84화 (384/488)
  • 384화

    ‘킨. 네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면 정말 미르와 함께 떠날 거야?’

    ‘그거야 이유를 들어 보고 결정해야지. 가뜩이나 지금 암컷한테 까여서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내가 왜 고생해서 거기까지 갔다가 와야 돼? 가고 싶은 놈만 가면 되지. 안 그래, 폐하?’

    그러고는 다시 소파에 벌러덩 누운 채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킨의 추태에 밀로는 한숨을 쉬더니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젠장, 저 미친놈. 확 비늘을 떼고 재워 버릴까? 차라리 잠든 짐짝이 되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면 킨의 비늘을 떼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밀로의 생각을 읽은 건지, 이엘이 먼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그녀는 킨의 앞으로 다가가 눈 감은 그의 얼굴 위에 제 그림자를 덮었다. 갑자기 감은 눈 위로 기척이 느껴진 탓에 킨은 미간을 좁힌 채 눈을 떠야 했다.

    ‘좀 나오시죠, 폐하? 아무리 폐하라고 하셔도 잠자는 용의 심기는 건드리는 거 아닙니다.’

    ‘열매를 가져와.’

    ‘뭐?’

    ‘너희가 신의 권역에서 도망칠 때 가져갔다던 그 열매.’

    ‘…….’

    ‘그걸 갖고 오라고.’

    애초에 킨은 패티스와 거래할 때부터 저희가 훔친 신의 열매에 관해 이엘도 알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뜸 요구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황제가. 킨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이엘을 뚱하게 쳐다봤다.

    ‘그게 뭔지는 알고 가져오래?’

    ‘필요해.’

    ‘누가. 네가?’

    ‘그래. 내가 필요해.’

    ‘허, 이것 참 웃기는 인간이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난 네 수하가 아니야. 네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가져와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 열매는 신의 권역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썩지도, 상하지도 않은 상태라고 들었는데.’

    어라. 이건 내가 말 안 했는데. 이엘의 말을 듣고 킨의 눈동자가 밀로를 향했다. 네가 다 까발렸냐? 종족의 수장이란 놈이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야, 쯧. 그렇게 매서운 눈동자로 밀로를 한참 동안 쏘아보다가, 결국 포기한 건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무용지물이야. 차라리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과실이 더……,’

    ‘아직도 모르겠어?’

    ‘…….’

    ‘신의 권역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썩지도, 상하지도 않았다는 그 열매. 그걸 내가 왜 너에게 가져오라고 하는 거겠어.’

    ‘너 설마……,’

    ‘알아들었으면, 그게 네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된다는 것도 인정하지?’

    갑자기 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 열매는 오직 신의 권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 그런 열매를 갖고 오라고 말한 건, 결국 신의 영역에 열매를 갖고 가겠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신의 영역으로 간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암컷에게 빌어먹지 않아도 신을 만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정말 어쩌면 직접 신을 대면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순식간에 생각 정리를 마친 킨은 알겠다는 말을 남기곤 밀로의 멱살을 잡고 저희 종족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 얘긴 이엘이 하이에나의 영지를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는 소리였고, 이제 곧 레온의 영지로 입성할 예정이란 뜻이다.

    “폐하. 레온 후작님의 영지에 도착했습니다.”

    킨을 떠올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던 이엘의 정신을 깨운 건 그녀가 타고 있던 하트였다. 하트는 제 영지에서 푹 쉬고 근위대와 함께 다시 그녀의 곁에 복귀했다. 패티스 역시 비워 두었던 제도로 돌아갔으며, 르네와 독수리들도 오랜만에 자신들의 영지로 향했다. 줄곧 부재했던 2기사단장의 자리에 일라이저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기사단을 정리하던 일라이저가 그녀의 안색이 나빠졌다고 생각한 건지 걱정을 달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엘은 괜찮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웃어 주며 도리어 일라이저를 격려했다.

    “이렇게 있으니 영지 시찰을 처음 출발했던 시간으로 돌아간 듯하구나.”

    “죄송합니다. 제멋대로 기사단장의 자리를 두고 돌아갔습니다. 직위에 걸맞지 않은 짓을 저질렀사오니 무슨 벌이든 폐하께서 내리시는 것이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 됐다. 오히려 후작이 몸 상태를 회복해서 돌아왔으니 그거면 충분해. 그 얘긴 그만하자.”

    이엘의 괜찮다는 말에도 일라이저의 낯은 좋지 않았다. 그녀의 곁으로 복귀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돌이 올려진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일라이저는 영지로 돌아가 아버지와 르네의 여동생이었다는 공녀의 관계를 떠올리며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아직은 그게 어려웠다.

    그러나 더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스완과 함께 뱀의 영지로 떠난 노아와 그 외 다수의 늑대들이, 포필렌 유통으로 인해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엘의 옆에 복귀해야만 했다.

    “러셀 후작.”

    “예, 폐하.”

    “조급해하지 마라. 전력은 전혀 줄지 않았어.”

    “알고 있습니다.”

    “노아 공도 곧 합류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후작의 부담도 덜겠지.”

    이엘의 다정한 한 마디에 일라이저는 가볍게 묵례로 답하곤 서둘러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라이저에겐 전력이 줄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아직 늑대들의 합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처음보다는 인원이 적어진 상태인 건 맞다. 그나마 하트와 일라이저가 복귀했으니 근위대와 기사단은 안정을 찾았지만, 처음 출발할 때 함께했던 늑대들은 몇 마리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곧 노아가 돌아올 예정이니, 그때 아마 영지로 돌아갔던 알폰스와 여러 늑대들도 같이 복귀하겠지. 그러니 그쪽은 문제가 없지만…….

    “백조는 괜찮을 겁니다.”

    “응, 그럴 거야.”

    그녀의 걱정을 읽은 하트가 스완을 먼저 언급했다. 원래 예정대로였다면 스완은 뱀의 영지를 탈출해서 노아와 함께 이곳에서 합류했어야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일정이 꼬여 버렸다.

    노아는 다른 늑대들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는데, 스완은 뱀의 영지에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는 전언을 보낸 것이다.

    ― 죄송해요, 폐하. 정리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나중에 봬요.

    혹시 문제가 생겼냐는 제 물음에도 스완은 별일 없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로빈이 아직까진 스완을 나자르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의 염려와는 달리, 뱀은 스완을 극진히 대접하고 있었다.

    “피시는 제가 훈련시켰습니다.”

    “응?”

    “방어나 섬세함에서는 여전히 뒤떨어지는 편이지만, 적어도 전력을 다한 공격에서는 보통의 하이에나 그 이상은 한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피시와 팽팽하게 맞붙어 승리한 스완의 성력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트 나름의 위로에 이엘이 짧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곧 돌아오겠지. 우린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속히 하자. 해가 지기 전에 레온 후작의 영지로 들어가야겠어.”

    “예, 폐하.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무엇이지?”

    “아르세니온 황자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게 저였습니다.”

    “…….”

    “죄송합니다. 폐하께 의심을 품었고 그것을 감추었으며, 폐하의 허락 없이 이카르 백작님과 황자의 존재에 관해 상의하였습니다.”

    이엘이 이온의 생존을 말했을 때, 그곳에 모였던 대다수가 큰 충격에 빠졌었지만 개중엔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한 자들도 있었다. 노아와 이카르, 그리고 하트가 대표적인 예였다.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황자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했습니다.”

    “내가 경의 앞에서 실언을 한 적이 있었나?”

    “실언이 아닌, 저의 억측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따지면 억측이 아니지. 사실이었으니까.”

    “…….”

    “실언을 한 것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면, 잠결이거나 술에 취했을 때 실수를 했나 보구나.”

    이엘은 제 연인의 앞에서도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단어를 고심하여 내뱉는 편이었다. 술은 원래도 즐기지 않았고, 설령 마신다고 해도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셔 왔다. 그러니 하트의 앞에서 실언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면 자신이 그만큼 하트를 편히 여겨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실수일지도 모른다.

    “정말 내가 경을 내 형제처럼 여겼나 봐. 경의 앞에서 말실수를 하다니.”

    “송구합니다.”

    “아니야. 내 잘못인걸. 그리고 언제까지나 숨길 순 없다고 생각했어.”

    언젠가는 이온의 존재를 밝혀야만 했다. 그게 예상보다 이르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자신을 찾아들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고, 걱정되지 않는다면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를 믿기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선택을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그녀를 위해 자신의 복수심을 내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하다못해 이엘은 여기 모인 모두의 원수인 선황의 딸이었다. 거기서부터 이들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이미 포기한 셈이다.

    그런 와중에 이온의 존재를 밝혔다는 건……. 결국 그를 지켜 달라는 말과 다름없는 뜻이었다. 아마 자신이 먼저 밝히지 않았더라면, 진실을 알게 된 패티스가 이엘의 안전을 위해 이온을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충한 말씀일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저는 아르세니온 황자가 폐하의 앞길을 방해한다고 생각이 들면 그를 살려 둘 마음이 없습니다.’

    ‘알고 있어.’

    ‘혹시라도 폐하와 황자의 목숨을 두고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주저 없이 폐하를 구할 겁니다. 이건 저뿐 아니라 여기 모인 모든 자들이 동일합니다.’

    ‘그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폐하께선 제게 방법을 강구하라고 하셨으니, 최선을 다해 찾아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패티스의 얼굴이 떠올라 이엘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엔 그가 해냈다. 패티스의 예상대로 용이 가지고 간 열매가 핵심이었다. 그게 승기를 가져다줄 거라 했던 패티스의 말이 옳았다.

    물론 그것도 밀로와 킨이 열매를 가져왔을 때나 가능한 얘기겠지만.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레온 후. 오랜만에 만나는군.”

    “예, 폐하. 이렇게 친림하여 주시니, 오래도록 가문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내달려, 그녀의 목표대로 해가 지기 전에 레온의 권역을 밟았다. 저 멀리서부터 이엘을 발견하고 마중 나온 레온과 그의 종족들이 공손히 인사하며 그녀의 방문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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