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정말로 나자르를 데려올 줄은 몰랐는데.”
“약속은 지켜라. 네가 소모라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나자르로 무슨 짓을 벌일 생각인지에 관해 말하기로 했던 것. 지키길 바라.”
“좋아. 폐하께선 ‘그’를 언제든 원하는 때에 만나실 수 있지?”
“그래.”
“하지만 우리는 달라. ‘그’를 만나려면 특수한 조건이 필요해. 제물로 바쳐야 할 것들.”
아마도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타이곤의 갈기를 이르는 말일 터였다. 금서에 쓰여 있었듯. 노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간을 좁힌 채 끊어진 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제물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고결한 피.”
“…….”
“더러움이 물들지 않은 정결하고 깨끗한 피가 필요하거든.”
더러움이 물들지 않은 정결하고 깨끗한 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죄를 짓고, 누구나 더러움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단 하나. 혼탁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존재가 있었다.
나자르…….
‘로빈의 말에 따르면 그 금서는 신과 ‘그’에 관한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빈이 발견했을 때부터 훼손된 상태였다고 했어요. ‘그’는 신성제국에서 알려져선 안 되는 존재였으니 누군가가 일부러 ‘그’에 관한 부분만 없앤 것 같다고 했죠. 그래서 자신도 금서의 내용을 다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들었던 패티스의 말을 떠올렸다. 제도에 머물렀던 패티스는 황궁도서관에 침입해 금서를 가져와 그 안을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앤디가 알아낸 정보로 중요한 단서가 될 책 한 권을 찾아냈다고.
그 책을 기증한 자는 다름 아닌 로빈이었다.
그 얘길 들으니 모든 게 맞춰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 1제국 연구소를 습격해 상당량의 자료를 들고 도망쳤던 뱀. 단순히 렉토스와 리노의 증언만으로는 도출해 내기 어려운 가설들. 그 중심에 금서가 있었기 때문에 로빈은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때 제도로 왔던 로빈이 제게 말해 준 게 끝일 리 없습니다.’
‘요컨대……,’
‘예. 로빈이 숨기는 정보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저에게 다 말해 줬을 리 없죠. ‘그’에 관한 자료는 소실된 게 맞을지는 몰라도, 분명 불에 타기 전의 내용은 지금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노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완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백조는 제 목숨 하나는 거뜬히 지켜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막대한 짐을 스완에게만 지우는 건 싫었다. 노아 역시, 할 수만 있다면 뱀을 흔들어 모든 정보를 손에 쥘 생각이었다.
“……나자르를 제물로 쓸 생각인가?”
“예상했던 거잖아?”
“나자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겠지. 그들은 신의 대리자다. 그들을 죽였던 선황이 어떤 말로를 맞았는지 잊었나?”
“하지만 선황은 ‘그’를 만나는 데에 성공했어.”
“설마 선황도…….”
“맞아. 선황도 나자르를 숱하게 죽이며 ‘그’를 만나려 노력했지.”
그 당시엔 나자르를 죽이는 게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황가에 반한다는 이유로, 이종족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이유를 대며 나자르인들을 죽였다.
그런데 ‘그’를 만나기 위해 제물로도 사용했었다니.
“내가 소모라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궁금하다고 그랬지?”
“…….”
“우리 같은 자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선 제물뿐 아니라 특별한 장소가 필요해. 정화되지 않은, 더러움으로 오염된 곳.”
“…….”
“마치 1제국 때의 제도처럼.”
현재의 제국은 오드의 정화로 곳곳이 깨끗해진 뒤였다. 심지어 가장 더럽다던 모리아마저 오드의 성력으로 깨끗해진 터라 오염된 곳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아니라면.
뱀의 영지는 다른 종족과 인간들의 영지처럼 성전이 없었다. 로빈은 때마다 제도로 올라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늉을 했지만, 여전히 그의 안엔 신을 향한 신앙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언젠가 이곳으로 잡혀 왔던 이엘이 너무도 쉽게 ‘그’를 불러낼 수 있었던 것처럼, 이곳은 악으로 가득 찬 곳이었고 1제국의 제도와 많이 닮은 곳이었다.
“생각해 보면 선황은 참…… ‘그’를 만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단 말이야. 인간들이 아무리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해도, 신의 대리자인 나자르들만큼은 두려워했었는데. 그런데도 선황은 거리낌 없이 나자르들을 죽여 왔잖아.”
“…….”
“거기다 저가 원하면 언제든지 이종족의 몸에서 제물이 될 만한 것들을 빼 올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타이곤의 갈기……. 이엘은 황자를 살리기 위해 이종족의 목숨을 뺏을 수 없어 그것들을 포기했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아비는 아주 오래전부터 습관적으로 이종족을 학살해 왔다.
나타니엘에겐 어려웠던 것들이, 그녀의 아비에겐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노아. 웃기지 않아? 선황은 불사를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정말, 코앞이었는데.”
“…….”
“아이러니하게도 2차 전쟁이 놈의 계획을 망쳤다는 게.”
‘그’는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 왔을 것이다. 신이 만든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이 세계를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이 만든 세상을 세우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이다.
마침내 도구가 되어 줄 선황 알렉산드로를 만났을 때. ‘그’는 환호했으리라. 드디어 신의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 알렉산드로를 이용해 나자르들을 죽였고, 신의 사랑을 받았던 인간들을 더욱더 신과 멀어지게 만들었겠지.
하지만 로빈의 말처럼 아이러니하게도 2차 전쟁이 ‘그’의 계획을 망쳐 버렸다.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신이 먼저 이 땅을 처단하고 청소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엘에게 그토록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기회를 한 번 놓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제 유일한 피붙이인 쌍둥이를 지키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를 힘껏 흔들어 대면서.
왜냐하면 나타니엘과 아르세니온, 그 둘 중 한 명은 신탁이 가리키는 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였으니까. 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가 신의 세상을 직접 무너뜨리는 것만큼, 완벽한 계획도 없을 터였다.
“……로빈. 넌 네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하나? 선황조차 그게 어려웠는데.”
“내가 폐하와 함께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먼저 제안했었어.”
“…….”
“그녀를 건드리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타니엘에겐 손대지 말라고.”
“…….”
“대신 그녀의 아이는 괜찮다고 했어. 오히려 자신에게 데려오라며, 힌트까지 줬었거든.”
역시 놈은 이중, 삼중으로 그물을 쳐 두었다. 선황으로부터 이어진 이 거래는 이엘의 말처럼 누군가가 완수하지 않으면 대를 이어 계속될 것이다.
“노아, 내 제안은 생각해 봤어?”
“무슨 제안.”
“너도 이제 알게 됐잖아. 폐하를 향한 ‘그’의 집념이 얼마나 강하고 악랄한지.”
“…….”
“그녀를 ‘그’에게서 빼내려면, 그녀의 아이가 필요해.”
아이. 이젠 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테오도로의 이름이 떠올랐다. 웃기게도, 그 아이는 아직 생기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만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는데. 이엘이 지어 주었던 그 이름이 노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다.
그 순간 노아는 이엘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짰는지 절감하게 됐다.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소망을 제게만 내비친 것. 테오도로의 이름을 제게만 알려 준 것. 그 이름에 아버지 무어의 이름을 넣어 남다른 애착을 갖게 만든 것까지.
노아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벌써부터 지독한 부성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그녀가 만든 계획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그 아이를 지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고.
‘지켜 줘. 나중에…….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내 피붙이가 존재한다면. 그게 뭐가 됐든 그대가 꼭 지켜 줘.’
……정말로 그렇게 되어 버렸잖아. 그 폭포 근처에서 했던 그녀의 부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폐하를 언제까지 ‘그’에게 잡혀 있게 할 거야. 폐하는 무언가 때문에 ‘그’에게 잡혀 있을 텐데, 죽을 때까지 그녀가 괴로웠으면 좋겠어?”
“…….”
“노아. 잘 생각해. 아이는 더 가질 수 있어. 딱 한 번만 모르는 척, 아이를 ‘그’에게 넘기자.”
이엘이 그랬다. 테오는 그녀를 닮아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갖고 있을 거라고.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그녀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자신의 아들을 묘사했다. 늘 자신이 채워 주지 못할 결핍을 느꼈던 이엘이, 테오도로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반짝이고 볼을 붉혔다.
그녀가 바라고 있잖아. 그녀가, 미래를 꿈꾸고 있잖아.
조금은 질투가 났다. 물론 그녀의 미래엔 노아 자신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이엘이 지금 이 순간 가장 바라는 게 아이라는 것에 우습게도 모난 질투가 생겼다. 하지만 동시에 노아 역시 꿈꾸게 됐다. 그녀의 미래를, 함께 꿈꿀 수밖에 없게 돼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좋다.”
“그 얘긴…….”
“폐하의 아이를 데려오지.”
“진심이야? 내가 널 믿어도 될까?”
“믿을 수밖에 없잖아, 넌.”
“…….”
“폐하께서 아이를 원하시도록, 어떻게든 노력해서 아이를 네게 데려오겠다.”
그러니까 나는 내 아들을 어떻게든 지킬 것이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테오도로를 나타니엘에게 안겨 줄 것이다.
*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흘렀다. 노아와 스완이 뱀의 영지로 떠나고, 이틀 후에 밀로와 킨이 동족에게로 돌아갔다. 물론 킨이 순순히 돌아가지는 않았다.
‘싫어. 내가 왜 돌아가? 이렇게 좋은 곳을 놔두고.’
‘잔말 말고 일어나라, 좀!’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 봐.’
밀로의 으름장에도 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 생활에 완전히 빠져 버린 듯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곳은 킨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축복의 나무가 넘쳐 나는 곳이었다. 킨은 그 나무에서 나는 과실에 심취해 종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니 축복의 나무가 없는 동족에게로 순순히 돌아갈 리가.
‘미르, 잠깐 비켜 봐.’
마침 하이에나의 영지를 떠날 준비를 위해 그곳에 들렀던 이엘이 킨과 밀로의 실랑이를 목격하곤 다가와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씩씩거리는 밀로를 제 뒤로 밀치고 이엘은 허공을 보는 척하는 킨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