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피시. 내 말 잘 들어. 아니, 잘 듣지는 말고 그냥 흘려들어도 되는데 무시하지는 마. 아니, 주의 깊게 들을 필요까진 없는데 유념은 해 둬.”
“스완.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건 너도 알지?”
“됐고. 너 되도록 능력 쓰지 마라. 알았지?”
“왜?”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뭔 일 터지면 바로 도망쳐야 돼. 알았어?”
“싫어.”
“왜!”
“왜긴 뭐가 왜야? 너도 며칠 전엔 칭찬해 줬잖아, 내 능력.”
아, 내가 왜 그랬지……. 스완은 피시의 기를 살려 주겠다며 며칠 전에 으스대며 그를 다독였던 제 주둥이를 몇 대 때리고 싶었다. 기를 세워 줄 게 아니라 그때 기를 확 꺾었어야 했나.
“갑자기 능력을 쓰지 말라니. 앞뒤 문맥도 잘라먹고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속상해, 난.”
피시의 말에 스완의 표정이 더 굳어져 갔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 아닌 애가 속상하다는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서운한 모양이다. 스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떻게 말하겠어. 네가 능력을 쓰다가 폭주해서 엄청난 폭발과 함께 잔해에 깔려 죽었다는 걸…… 그딴 꿈을 꿨다는 걸 내가 어떻게 말하겠냐고.
“스완?”
“…….”
“왜 그러는데, 불안하게.”
“그냥. 나 올 때까진 얌전히 있으라고.”
피시가 동그란 눈을 몇 번씩 감았다가 뜨며 스완을 쳐다봤다. 스완의 입에서 얌전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어쩐지 살짝 자존심이 상한다. 얌전히 몸을 사려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스완인데.
“너야말로 사고 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기나 해.”
“내 걱정은 좀 하지 말고. 네 몸이나 조심해.”
“너나 조심해.”
“나 참. 네가 더 걱정이라니까?”
“사지로 들어가는 건 너거든?”
“아니, 넌 능력 쓰다가 폭주……! 아, 됐어. 아무튼 자중해. 제발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피시는 스완의 말에 더 반박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괜한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닌 듯했다. 게다가 폭주 어쩌고 하는 걸 보면……. 폭주라는 단어에 기세가 한풀 꺾였다. 결국 피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는 걸로 둘의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실랑이에 마침표를 찍었다.
“서운해하지 말고. 며칠 전에 말했잖아.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응.”
“그날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먹어.”
“알겠어. 근데 너도 내 말 무시하진 마. 뱀의 영지를 만만히 보지 말란 얘기야.”
“당연하지. 누가 뭐래도 난 내 목숨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데?”
씨익 웃는 스완의 표정을 보며 피시도 안도한 듯 마주 웃을 수 있었다. 사실 내색은 안 했지만 피시는 저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을 열심히 찾아 헤맨 스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면 뱀의 영지로 떠나야 해서 정신없을 텐데도 자신을 생각해 준 것에 고마웠던 것이다. 설령 그게 쓸데없는 걱정이라 할지라도.
“다시 만날 땐 각오해. 네 성력도 이길 만큼 강해져 있을 테니까.”
“오, 객기 부리는 모습이 딱 과거의 나를 닮았는데? 오늘부터 널 내 동생으로 삼아 줄게, 피시.”
“무슨 소리야.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피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강하게 부정했지만 스완은 가볍게 무시하곤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자리를 떠났다.
“그럼 동생! 다음에 보자고∼!”
“스완!”
“어어, 알겠어. 다음에 볼 땐 내가 좀 봐줄게∼”
그러나 피시도 더는 항변할 수 없었다. 저를 향해 웃고 있는 스완의 미소가 보기 좋았으니까.
뭐…… 동생이든 형이든, 형제가 하나 더 생기는 게 썩 나쁘진 않으니까. 그 생각을 하며 자신도 멀어져 가는 스완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
로빈과 마주 선 스완은 후드로 얼굴을 깊게 가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이 비에 쫄딱 젖은 덕분에 긴장으로 인한 떨림은 숨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추위 때문에 떨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약간의 시간은 번 셈이다. 스완은 간헐적으로 떨리는 양손을 뒤로 감춘 채 호흡을 정리했다.
“저런. 나자르께서 많이 추우신가 보군. 리플, 가서 모포라도 가져와라.”
“예, 각하.”
스완의 예상대로 로빈은 추위 때문이라 생각한 건지 리플에게 명령한 뒤 스완을 성 안쪽으로 안내하며 웃었다.
“나자르 님. 놀라셨을 테지만 제 말씀을 잘 따라 주시면 당신께 피해를 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전 나자르가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다 알고 모시고 온 터라 거짓말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스완은 로빈의 소름 끼치는 말을 들으며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여기 오기 전에 이엘로부터 주의를 받았음에도 실제로 마주한 뱀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소름이 돋았다. 마치 제 속내를 샅샅이 뜯어보는 것처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심장했다.
백조의 붉은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 뱀의 뒤에 선 노아에게 닿았다. 그는 제 쪽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신호를 주는 건 잊지 않았다.
노아의 허락하에 스완은 입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긴 한숨을 쉬며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백조의 분홍빛 머리색은 어느샌가 나자르 특유의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스완은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냉랭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날 이렇게 대하면 안 될 텐데요.”
제법 당찬 스완의 목소리에 노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저놈은 연기 하나는 타고났다니까. 예전에 세잔티노 때도 턱수염 일당을 상대로 환각을 걸며 로빈 행세를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환각에 걸렸다고는 해도 어설픈 상태였다면 백조의 능력은 금방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연기만이 아니다. 성력 역시 눈에 띄게 강해지고 섬세해졌다.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피시와 접전을 벌였을 때보다 더 성장한 스완의 모습에 노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순식간에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꿀 정도로 성력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다니. 고작 며칠 만에 또 성장했군.
“내가 나자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폭력적으로 대하다니요? 게다가 납치와 감금까지. 설마 내가 공작의 기대에 순순히 응할 거라 생각하고 벌인 짓은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 나자르 님.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저 역시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을 뵐 수 없을 듯하여, 부득이하게 폭력적으로 일을 벌였습니다.”
“부득이하다고요? 적어도 이런 방식은 쓰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난 성전 소속이에요. 자칫하면 반역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공작은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텐데요.”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반역을 꾀한 것은 아닙니다. 그 부분만큼은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자르 님.”
스완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로빈은 웃기만 했다. 그런 로빈을 한참 쳐다보던 스완이 미간을 좁히더니 벗었던 후드를 도로 머리 위로 쓰며 얼굴을 가렸다.
그때까지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노아는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후드를 쓰기 직전 스완의 뺨 위로 생긴 붉은 생채기를 포착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해 생긴 상처 같은데. 저 엄살 심한 백조가 제 몸에 난 상처에도 오두방정을 떨지 않고 차분한 걸 보면, 로빈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든 상처인 듯했다.
작전상 불가피한 전투였다. 스완을 로빈에게 순순히 데려오면 오히려 뱀의 의심을 살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노아는 나자르인 스완을 납치해 빼돌리는 식으로 작전을 꾸몄던 것이다. 그 과정에 뱀의 힘이 필요하다며 제도 외곽 쪽으로 뱀들을 불러내 그들과 연합해서 스완을 납치하는 척 이곳으로 데려왔다.
납치당한 척 끌려온 스완은 불쾌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로빈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스완을 달래듯 거듭 강조했다.
“비록 방법은 좋지 않았으나 이렇게 오셨으니 융숭히 모시겠습니다. 휴양하신다고 생각하시고, 편히 지내 주십시오.”
“내게 약속하세요. 볼일이 끝나면 날 제도로 돌려보낼 것이라고요.”
“예, 물론입니다. 극진히 대접해 드린 뒤 제도로 안전히 모셔다 드릴 겁니다.”
극진히 대접하기는 개뿔. 스완은 로빈의 능청맞은 거짓말에 기가 찼다. 이곳에 오기 전에 노아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데, 무슨.
‘로빈은 ‘그’를 불러들일 생각인 듯합니다. 선황의 계약이 폐하에게로 이어졌듯, 폐하가 지키지 못할 그 계약은 폐하의 아이에게로 전해질 테니까요. 그 뱀은 폐하의 아이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날. 모두가 저마다 안고 있던 진실을 꺼내 놓았던 그날에, 노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당무계했다. 뱀이 이엘을 살리기 위해 이엘의 첫아이를 제물로 바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말에, 모두가 기함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집착했던 건가.’
유난히 첫아이에게 집착했다. 물론 로빈의 말처럼 첫아이를 통해 끊어졌던 종족의 번식을 꿈꿨던 것도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로빈의 목표는 종족의 번식이 아닌, 이엘의 삶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게 정말 뱀이 말하는 ‘사랑’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말을 들은 이엘의 표정이 역겨움으로 뒤틀린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감정은 아닐 것이라고 스완은 추측했다.
‘문제는 그 일에 나자르를 쓸 생각이란 것입니다.’
‘나자르?’
‘나자르를 대가로 바칠 생각인 듯합니다. 보호석을 모으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인 듯하고요.’
노아의 설명에 따르면 로빈은 지금의 나자르는 불완전하며, 그 이유엔 보호석의 존재도 포함된다고 했다. 보호석은 이 세계를 더럽히는 이물질로, 그걸 만들기 위해 엄청난 수의 나자르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그걸 파괴하는 데에도 성력이 쓰이기 때문에 매번 오드가 고생하고 있었다.
로빈은 그걸 원치 않았을 것이다. 파괴하는 데 성력이 쓰여서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거라면, 차라리 흡수시켜 더 완전한 상태가 되는 게 낫지 않나. 그러기 위해 늑대들이 바다로부터 토해진 보호석들을 수거하기 전에, 한발 앞서 가져갔던 것이다.
어쨌든 정확한 목적은 모르겠지만 로빈은 지금 보호석과 나자르에 혈안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스완은 자신이 나자르인 척 로빈의 영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제 생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우선은 들어가셔서 쉬시지요. 안락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좋아요. 안내해 줘요.”
“마련된 처소로 나자르 님을 모셔라.”
“예, 각하.”
노아는 스완이 뱀들과 함께 안쪽 성이 있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줄곧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을 수 있었다. 그의 앞엔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로빈이 서 있었다. 스완을 향한 의심은 지웠지만 노아에게 뿌리내린 의심은 여전히 거두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