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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81화 (381/488)

381화

씁쓸하게 비늘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 정도 저주는 저주라고 보기에도 어렵다. 감히 신의 것에 손을 대고도 여태 살아 있지 않던가. 한때 아꼈던 종족이라 신께서 봐주고 계신 걸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피식 웃던 밀로는 비늘을 든 채 이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근데 킨이 이걸 나타니엘에게 줬어.”

“맞아. 이걸 내게 주면서, 드레인과 만나게 해 달라고 했지.”

이엘의 대답에 패티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 용의 지독한 집착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하지만 그걸 받은 이엘의 반응도 의문이었다. 밀로의 말에 따르면 비늘은 용에게나 의미가 있지, 그녀와 같은 인간에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할 텐데. 워낙 특별한 것이니 보석과 비슷한 가치는 있겠지만 이엘은 사치품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내가 왜 그 거래를 받았는지 의문인 모양이구나.”

“예, 폐하.”

“이 비늘은 용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붙일 경우, 그 개체를 영원히 잠들게 해. 그리고 영원히 뗄 수 없대.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거래를 받았을 뿐이야.”

“그 비늘은 네가 갖고 있기에 위험해, 나타니엘. 킨 놈에게 돌려주고 거래를 파기해.”

밀로가 소리를 높여 그녀를 말렸지만 이엘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비늘, 잠, 열매, 스완, 성력, 드레인, 밀로……. 남은 세 사람이 비늘과 열매에 관해 열띤 논쟁을 펼치는 동안에도 이엘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 정리를 마친 그녀가 밀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미르. 열매를 가지고 올 수 있어?”

“여기에?”

“응.”

“…….”

“방법을 찾은 것 같아.”

“뭐?”

“아니. 찾았어.”

상상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드레인이 싫대요.”

“…….”

“헛소리하지 마라면서. 눈에 띄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던데요?”

스완의 입을 통해 그녀의 살벌한 전언을 들은 패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 그는 스완을 통해 드레인에게 킨의 말을 전해 주었다. 당연히 패티스도 드레인이 킨의 말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벌인 일이다.

킨의 요구를 떠올릴수록 어이가 없었다. 드레인더러 자신의 꿈에 나와 달라니. 그건 직접 만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던가. 암컷의 능력이 꿈인데. 드레인이 거절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두 번째 대답은?”

“주제를 알라던데요.”

“…….”

“그 정도도 이미 많이 봐주고 계신 거라고.”

킨도 드레인이 저와의 만남을 거절할 것을 예상한 건지, 다른 질문도 하나 더 전달해 달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관하여.

‘후회하나? 신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훔쳐 달아난 것에.’

‘후회? 내가? 글쎄.’

후회하냐는 패티스의 질문에 킨은 박장대소하며 웃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 과거에 미련을 붙잡고 있을 리 있겠냐는 반응이었다. 근데 왜 그런 걸 물어봐 달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패티스의 표정에 킨은 어깨를 으쓱이며 해명했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

‘…….’

‘우리가 없는 그곳은 여전히 평화로운지. 예전과 똑같은지. 신께선 변함없으신지.’

‘…….’

‘여전히 따스한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밀로의 말처럼 킨은 여전히 성력에 집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했지만 그 용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을지도. 살아온 시간 중 신과 함께한 시간이 누구보다 길었을 당사자니까.

“아무튼 드레인의 표정이 안 좋았어요. 수컷들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나 봐요.”

“그녀가 원치 않으면 만날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스완.”

“네?”

할 말을 마치고 나가려던 스완을 패티스가 불러 세웠다.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만 뒤로 돌려 패티스를 바라보던 스완이 침묵이 길어지자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할 말 있으시면 하세요. 백작님답지 않게 왜 뜸을 들이세요?”

“억지로 보낼 생각은 아니었어.”

“네?”

“뱀의 영지에. 억지로 가게 할 생각은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가기 싫으면 말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테니까.”

참 나. 언제는 책임지라고 하더니……. 스완은 패티스를 퉁명스럽게 쳐다보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니까.”

“…….”

“걱정 마세요. 제 몸 하나 지켜 내는 건 그렇게 안 어려워요. 근데 그것보다…….”

“그것보다?”

“……아니에요. 별 얘기 아니었어요.”

“뭔데. 말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거참, 사람을 왜 이렇게 못 믿어요?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아주 뱀의 영지를 탈탈 털어서 올 테니까.”

대체 뭘 믿고 저렇게 호언장담하는 건지 모르겠다. 패티스는 여전히 철없는 고니에게 한 마디를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서 쉬기나 해. 내일이면 출발하잖아.”

“알겠습니다. 그럼 패티스 님도 쉬세요.”

한참을 조잘거리던 스완이 패티스의 축객령에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며 복도를 왔다 갔다 정신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안에서 큰소리 떵떵거렸던 모습은 어디 가고 불안으로 잠식된 표정이었다.

“아,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왜 하필 이럴 때 그런 꿈을 꾼 거야…….”

분명 아버지가 그랬다. 나자르처럼 성력을 쓸 수 있고, 나자르처럼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아버지가 갖고 있던 성력의 상당 부분이 이미 제게 흘러들어 온 상태였다. 그렇다면 자신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미래를 보게 될지 모른다고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긴 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웠다. 이게 정말 미래인지, 아니면 꿈을 꾸는 건지……. 심지어 스완은 꿈에서 드레인을 만나 훈련에 시달리는 터라, 요즘엔 그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꾼 꿈이 너무도 기분 나빠서.

“스완.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아……. 오드 님!”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던 스완의 앞에 나타난 건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오드였다. 그 순간 스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지더니 재빨리 오드의 손을 잡고 그를 끌어당겼다.

“오드 님. 잠깐만 저한테 시간을 내 주세요.”

“백작님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스완은 혹시나 누가 엿들을까 오드를 붙들고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고 나서도 연신 고개를 내민 채 주변을 살피며 혹시 모를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럴 때마다 처음 이엘과 계약하고 안하무인처럼 굴던 그 백조와 동일 인물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다. 오랜만에 스완의 과거를 떠올린 오드가 아주 짧게 소리 내 웃더니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결계를 칠까요?”

“아, 네. 부탁드릴게요. 제가 아직 그 정도까진 못해서.”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스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오드는 능숙하게 주변에 결계를 걸어 두었다. 아주 미세한 파동이 온몸에 흐르는 걸 스완은 놓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성력을 자신만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언젠가 자신이 결계를 치는 날을 고대하며 조금 전에 느꼈던 감각을 기억하려 애썼다. 확실히 체험해 봐야 제 것으로 만들기 쉬운 듯했다.

“이제 안심해도 좋아요. 말하세요, 스완.”

“사실은…… 제가 뭔가를 봤는데요. 그게 꿈인지 아니면 제 상상인지, 그것도 아니면…….”

“미래의 일인지요?”

“네.”

꼴깍. 스완이 침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에 오드가 풋, 짧게 웃음을 터뜨렸고 스완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우, 웃지 마시구요…….”

“미안합니다. 놀리려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그랬어요. 무슨 꿈을 꿨길래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은 건가요?”

“말해도 괜찮은가요?”

“조금 전에 스완이 그랬잖아요. 그게 꿈인지 상상인지, 그게 아니면 예지인지 모르겠다고요.”

당사자조차 확신이 없는 예지는 말한다고 해서 페널티를 받는 식의 문제는 없을 거란 소리였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이 순간 오드에게서 확신을 얻게 되면, 앞으로 스완은 꿈인지 예지인지 모를 환상들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게…….”

“스완. 당신의 아버지를 만나 보세요.”

“…….”

“나자르의 예지는 스완이 보게 될 예지와 결이 좀 달라요. 빈센트도 처음엔 당신과 같았을 거예요. 그를 찾아가서 물어보도록 해요. 그게 정확할 테니.”

오드의 말에 스완이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여기서 그 얘길 꺼냈다가 그게 정말 예지가 맞다면…….

안 돼. 그렇게 되면 피시가 위험해져.

“알겠습니다. 아버지에게 물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오드 님!”

스완은 오드를 향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결계를 깨뜨리고 나왔다. 그러곤 후드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며 주변을 한껏 경계한 채 피시를 찾아 나섰다.

“근데 대체 얘는 어디 있는 거야.”

설마 오늘도 훈련 중인가? 안 되는데. 걔 훈련 봐주는 게 그 미친 용이라고 했었단 말이야. 킨인가 뭔가, 그놈이랑은 절대 마주치지 말라고 폐하께서……,

“스완?”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돌렸다. 눈앞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피시가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저를 보고 있었다.

“야! 찾았잖아!”

“나를?”

“그래! 일단 내 방으로 가자. 그 용은?”

“킨? 킨은 잠깐 영지 밖으로 나갔어. 배고프다면서.”

킨은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만 보면 사족을 못 썼다. 용이 사는 곳에선 절대 먹을 수 없는 열매라며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 덕에 하이에나 성에 비축해 두었던 열매가 동날 지경이라 패티스가 이엘 이외엔 누구도 먹지 말라며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킨은 이따금 축복의 나무를 직접 찾아 나서려 영지 밖을 나가곤 했다.

지금만큼은 그놈이 축복의 나무에 미쳐 버린 것에 고마워해야겠네. 그 생각을 하며 스완은 피시의 팔목을 덥석 잡고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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