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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80화 (380/488)

380화

패티스의 만면에 웃음이 드리워졌다. 킨의 말을 스완을 통해 전해 주기로 약속하고 그 대가를 받았다. 용의 비밀을 하나 알아낸 것이다.

“그게 신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 중 하나라며.”

“…….”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의 고유한 영역을 가진 열매.”

패티스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밀로는 긴 한숨을 쉬며 손으로 제 머리를 잡아 뜯었다.

“아, 망할 킨!”

“미르. 미안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폐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캐물었고, 킨이 대답했어.”

“…….”

“탓하려면 나와 네 동족을 탓해.”

패티스는 그녀의 사과가 달갑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이엘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일을 벌인 건 자신이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패티스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설령 상대가 용이 아니라 제 종족이었다 할지라도, 패티스는 가루가 될 때까지 탈탈 털었을 것이다. 그게 제게 주어진 임무였으니까. 폐하의 아이를 지켜 내는 것.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어디까지 들은 건데.”

한참 만에 입을 연 밀로는 들어올 때보다 표정이 더 좋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이엘이 고개를 흔들며 일어섰다.

“아냐. 이만하자. 됐어, 그만해.”

“폐하.”

“스완 때도 그랬어. 그 애는 동족에 관해 말하는 걸 꺼려했는데 내가 말해 달라고 하니까 억지로 말했다고. 똑같은 짓을 밀로에게 강요할 순 없어.”

“억지로 말한 건 아닙니다. 스완이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놈인 건 맞지만, 고집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폐하께 말한 걸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 스완은 그렇다 쳐. 하지만 밀로는? 제겐 무엇이든 줄 것처럼 구는 밀로였지만 용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일절 꺼내지 않았다. 아마 그가 무리를 이끄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겠지. 제 무리를 지키기 위해서.

게다가 고니의 저주처럼 용의 비밀이 신과 관련되어 있다면, 섣불리 털어놓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잘못하면 종족 전체에 문제를 가져올지 모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할게. 셋 다 돌아가.”

“맞아. 훔쳤어.”

“…….”

“우리가 아득히 먼 옛날, 암컷처럼 신의 영역에서 함께 살았을 때. 눈앞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열매를 훔쳐서 도망쳤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하기엔 욕망이라는 이름이 더 컸다. 어쩌면 인간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앞서 행했던 종족이 용이었는지 모른다. 신의 영역에 손을 대려 했던 것이다. 인간과 똑같이.

“그 열매가 뭔지는 킨이 말해 주지 않았지?”

“그걸 알아내려면 암컷 용과 직접 만나게 해 달라더군.”

패티스는 킨이 드레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해 주고, 그 대가로 아주 적은 정보를 얻었다. 용의 수컷들이 훔쳐서 달아난 건 어떤 나무의 열매였고 그로 인해 저주를 받아 성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너희가 원래 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건 킨이 말해 줬어.”

“그래, 맞아. 암컷이 성력을 쓰는 것처럼 우리도 한때는 성력을 쓸 수 있었어. 신의 영역에 함께 살았으니까.”

한순간의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들만 가질 수 있었던 영원한 능력을 빼앗겼다. 그리고 정착할 수 없이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저주까지 받게 됐다.

“하지만 웃기게도 훔친 열매는 신의 권역을 벗어나는 순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어. 썩지도, 상하지도 않은 이상한 상태로 보관 중이고. 결국 우린 얻은 건 없고 잃기만 했지.”

“그럼 킨이 암컷 용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던 건……,”

“그래. 킨은 신이 만들었던 최초의 용들 중 하나니까. 성력을 가장 강하게 썼던 용 중 하나였거든. 그러니 성력에 관해 굉장히 민감한 편이야.”

“…….”

“아마 그 암컷 용을 만나면, 그녀를 죽일지 몰라. 아니. 죽일 거야, 확실히. 지금은 아닌 척해도 막상 그녀를 보면, 그녀가 성력을 사용하는 걸 보면. 질투로 눈이 뒤집혀서 죽여 버리겠지.”

그래서 스완의 존재도 킨이 알아선 안 됐던 것이다. 성력을 사용할 줄 아는 스완은, 암컷 용만큼이나 킨을 자극하기에 좋은 상대일 테니까.

“우리가 신의 열매를 훔쳤다는 걸 킨이 알려 줬다는 건, 너 역시 그만한 대가를 킨에게 지불했다는 의미일 텐데. 부디 그게 킨과 암컷을 만나게 해 준다는 약속은 아니길 바라.”

“걱정 마, 그건 아니었으니까. 말만 전해 준다고 했어.”

“좋아.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고작 내 종족이 숨어 살고 있는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테고. 정확히 뭘 원하는데.”

“내 추측으론, 너희가 훔친 그 열매가 보통의 열매는 아닐 것 같아서.”

패티스의 예리한 지적에 밀로의 눈썹이 움찔거리며 위로 틀어졌다. 신의 권역을 벗어나면서부터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걸 앞서 언급했음에도 패티스는 열매를 다시금 화두에 올렸다. 목표는 열매였군. 밀로는 지독한 놈에게 걸렸다는 생각에 혀를 차며 상황을 설명했다.

“말했잖아. 어차피 그건 신의 영역을 벗어나면 의미가 없어진다니까?”

“그럼 드레인, 그러니까 암컷 용의 능력 안에선?”

“……뭐?”

“거기서도 불가능해?”

젠장. 그게 뭔지 대충 눈치챘구나. 패티스의 확신에 찬 물음에 밀로는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엘을 쳐다봤다. 분명 이엘도 알고 있을 텐데,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닦달하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믿는 걸까? 내가 말해 줄 거라고.

“밀로. 우리에겐 중요한 사안이다.”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침묵만을 고집하고 있던 노아가 어렵게 운을 뗐다.

“그 일에 신이 엮여 있다면 언급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만큼 절박하다.”

“…….”

“도와줬으면 좋겠어. 네 힘이 절실하게 필요해.”

맙소사. 저 냉랭한 늑대가 지금 나한테 도와 달라고 부탁한 거야? 내 힘이 필요하단 소리를 했다고? 밀로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입을 쩍 벌리고 노아를 쳐다봤다.

그러다 또 한참을 고민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면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주저하는 밀로를, 노아가 한 번 더 불렀다.

“밀로. 부탁한다.”

“어디까지나 우리 종족의 일이야. 너희와는 관계없는 일인데 왜 그렇게까지 알고 싶어 하는 거야?”

“넌 이해 못 하겠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상황이거든.”

밀로는 패티스의 단호하지만 간절한 대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늑대는 그렇다 쳐도 하이에나까지 저렇게 매달리는 걸 보면…… 정말로 나타니엘과 관련됐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이엘의 일은 밀로에게도 중요했다. 그 역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동족을 처리했을 정도니까. 한참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밀로가 긴 한숨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열매는……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열매야.”

“만들어 낸다고?”

“정확히 말하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어.”

“…….”

“생명을 넣는…… 그러니까 창조의 열매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그게 가능해?”

“신의 나무니까. 신의 권능이 담긴 단 하나뿐인 나무.”

대충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런 열매가 있다니……. 킨이 던진 아주 적은 양의 정보로 대충 눈치채고 가설을 세웠던 패티스마저 놀란 낯이었다. 그는 충격과 당황,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설렘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밀로는 계속해서 설명을 덧붙였다.

“죽은 시체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도 있고, 이런 물체에 생명을 줄 수도 있어. 말 그대로 살아 있게 만들어 주는 열매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니까 훔쳤지.”

“…….”

“당시에 우린 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고,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았으니까. 우리는 모든 걸 할 수 있었어. 그 어떤 이종족보다 강했고.”

“…….”

“그런 우리가 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 열매와 같은 신의 일부 능력들이었지.”

용은 보통의 이종족과는 다른 종족이었다. 이종족들의 계급에 둔이나 테르가 있는 것과는 달리, 용은 모든 개체가 우논이었다. 인간이나 타 종족과의 결합이 전혀 없었고 그 사이에서 번식하는 경우도 없었다. 인간보다 더 신의 사랑을 받았던 특별한 종족이었다.

그래서 오만했는지도 모른다. 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종족이라는 자만에 빠져 신을 배신하는 짓을 하고 말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뭐에 홀렸던 것도 같아. 그 나무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서 훔쳐야겠단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

“어쩌면 그것만 있으면 신처럼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인간들이 한 짓과 다를 바 없군.”

“맞아. 인간들이 했던 짓을, 우리가 먼저 했었지. 그래서 벌을 받았고.”

그 말을 마친 밀로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세 사람 앞에 내밀었다. 그건 새카만 빛을 내는 비늘이었다. 이미 킨에게서 그 비늘의 존재를 확인했던 이엘은 담담했지만, 패티스와 노아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라 인상을 찌푸렸다.

꺼림칙한 색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검은색보다 새카만 것 같았다. 순간 소름이 끼친 패티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늘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뭔데?”

“우리의 몸엔 이 비늘이 하나씩 달려 있어. 이걸 떼면 깊은 잠에 빠져들게 돼. 물론 다시 붙이면 깨어나지만.”

“그럼 네가 동족을 죽이고 왔다던 얘기가 그거였나?”

“똑똑한데? 맞아. 일종의 비유였어. 나랑 킨이 놈들의 비늘을 떼서 여기로 내려왔거든.”

비늘만 뗐다는 건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기 위해 비늘을 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폐하 때문에?”

“빙고. 넌 제법 머리가 굴러가는구나?”

밀로가 패티스를 향해 엄지를 올리며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를 치켜세웠다.

“내가 예전에 사자의 영지에 갈기를 가지러 간 적이 있었거든? 놈들이 나한테 나타니엘의 목숨을 들먹이며 타이곤의 갈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갔던 거야.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됐지. 이틀 전에 나타니엘이 얘기해 줬던 그 세 가지 제물. 그걸 내 동족 놈들이 알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그것까진 정확히 몰라.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놈들이 아르세니온 황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거야.”

“그래서 미르가 잠깐 내 곁을 떠났던 거고.”

이어진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 갔다. 그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저 용이 이곳을 떠나 제 종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또한 이엘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 비늘은 우리의 유일한 약점이야. 원래는 갖고 있지 않던 건데 저주를 받아 생긴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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