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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9화 (379/488)
  • 379화

    피시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자 스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아까 나한테 진 게 퍽이나 분했던 모양인데, 쯧쯧. 하여간 육지 놈들이란. 어리기 짝이 없다니까. 스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피시를 쳐다보며 저 나름의 위로를 건넸다.

    “너 이렇게 소심해서 어떻게 살래? 인마, 살다 보면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는 거야.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니.”

    “으응.”

    “너무 그렇게 낙담하지 마라.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멋있는 우논이 될 수 있을 거야. 아,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날 이길 순 없겠지만 말이야.”

    스완의 허풍에도 피시는 히죽 웃을 따름이었다. 히끅! 딸꾹질까지 하는 피시를 쳐다보던 스완이 흥미를 잃고 뒤로 벌러덩 누웠다. 풀벌레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상쾌한 풀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침대에 눕듯 편하게 누운 스완은 새카만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뭇별이 마치 그림처럼 콕콕 박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육지의 밤하늘 풍경은 스완을 설레게 한다.

    조금 전에 피시더러 뜬금없는 감성이라며 핀잔을 줬던 건 잊어버린 채, 스완은 넋이 나간 듯 하늘만 쳐다봤다. 이런 건 여기서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작은 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크게 뜬 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가 살던 호수는 언제나 안개로 뒤덮여 있어, 하늘을 쳐다봐도 별을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너도 누워 봐.”

    “스완도 우리 영지에 반했구나?”

    “반한 것까진 아닌데…… 뭐, 나쁘지는 않다고 말해 줄게.”

    상기된 얼굴로 시큰둥한 척 대답한 스완을 쳐다보며 피시가 까르르 웃었다. 그러곤 마찬가지로 스완의 옆에 벌러덩 누워 드넓은 하늘을 감상했다.

    “그래도 우리 아까 멋있지 않았어?”

    그 감상을 깨뜨린 건 자아도취에 빠진 스완의 한 마디였다. 그는 밤하늘에 시선을 붙박고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 위로 자꾸만 그려지는 조금 전의 자신과 피시의 모습에 뿌듯함을 감추지 못한 채 종알거렸다.

    “아까 폐하의 표정 못 봤어? 그렇게 놀라신 얼굴은 진짜 처음 봤다니까?”

    “응. 맞아. 엘이…… 아니, 폐하께서 그런 표정 짓는 건 나도 처음 봤어.”

    “솔직히 나도 너한테 좀 놀랐어. 약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폭발적인 힘은 진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거거든.”

    “그렇게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 난 내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또 부정적인 생각 한다. 잘했다니까? 물론 내가 더 잘해서 문제였지만.”

    피시는 엷은 미소를 지어 주고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그녀의 명령대로 넓은 평야로 나온 피시와 스완은 꽤 먼 거리에서 마주 보며 대치했다. 두 사람의 주변엔 위험을 막기 위해 여러 종족의 우논들과 오드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실 피시와 스완의 거리가 제법 멀었기 때문에 피시가 제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날뛴다고 해도 스완이 위험해질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 막히는 긴장감에 피시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오랜 시간 훈련을 거듭해 왔지만 그 상대는 자신을 억제해 줄 수 있는 하이에나들이나 그 이상의 이종족들뿐이었다. 고니와 같이 약한 이종족과의 대치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를 수밖에 없었다.

    ‘날 믿어!’

    그 순간 저 너머에서 소리치는 스완의 목소리가 피시를 깨웠다. 믿으라고? 어떻게 믿어? 아니. 내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이 능력은 남을 살리기보다는 죽이는 데에 더 적합할 정도로, 극도로 강했고 지나치게 유해했다.

    이 정도의 능력치는 자신이 아니라 조이나에게 갔어야 했다. 조이나가 아니면 하트에게라도 갔어야 옳다. 쓰지도 못하는 능력을 내가 갖고 있어 봤자, 오히려 폭탄을 떠안은 것처럼 동족에겐 불안함만 가져올 텐데…….

    ‘피시! 넌 내가 훈련하는 거 봤잖아!’

    ‘…….’

    ‘네가 날 믿어 주지 않으면, 여기서 누가 날 믿어 주냐?!’

    별안간 들려온 스완의 말에 피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족이 하나 없는 이 낯선 땅에서, 저 작은 고니는 열심히 살아남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가 늑대와 황제의 보호로 살아 있는 거라고 말하지만 피시의 생각은 다르다. 스완은 철저히 제 능력으로 살아남았다.

    ‘내가 뱀의 영지에 갈 수 있도록. 좀 도와줘.’

    저밖에 몰라 오만하고 이기적이었던 백조가, 처음으로 피시가 내민 손을 잡고 다른 종족과 친구가 되었다. 그때부터는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타인의 결점을 감춰 주기 위해 모르는 척 눈을 돌리는 법도 배우게 됐다.

    그래서 어렵지 않았다. 피시에게 부탁하는 것도, 피시의 신뢰를 얻어 내는 것도. 스완에겐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피시는 스완의 첫 번째 친구니까.

    아, 잠깐. 이렇게 얘기하면 지금쯤 쿨쿨 자고 있을 로날드 녀석이 좀 서운하려나? 이번 모임이 소집되면서 제도에 있던 로날드도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그 덕에 슈프를 비롯한 제 동족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신난 로날드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성체면서 여전히 하는 행동은 어린애와 다를 바 없는 로날드가 떠올라 스완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 네가 겁먹고 능력을 쓰지도 못할 때. 난 왜 패티스 님이 너랑 나를 지목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응.”

    “근데 폐하가 엄하게 꾸짖고 나서 네가 공격했을 땐, 솔직히 네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스완의 말에 피시가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로 죽일 뻔했다. 스완이 가진 성력이 그보다 더 강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제 눈앞엔 스완이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스완 역시 조금 전의 상황을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제 앞에 들이닥친 피시의 능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마치 곰의 능력처럼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더니 그 조각난 땅과 함께 자신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던 것이다. 겪어 본 적 없는 능력이 휘몰아쳤다.

    “능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더 강해져.”

    “그건 좋은 거 아냐?”

    “제어하지 못하면 독이 될 뿐이야. 내 몸이 감당하지 못해서 폭주할지도 모르고.”

    “뭐, 그건 나랑 비슷하네. 나도 내 몸으로 스며드는 성력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지를 못하고 있거든.”

    스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손바닥을 쳐다봤다. 처음엔 조금씩 느껴지던 성력이, 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강도로 밀려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갖고 있던 성력이 그만큼 빨리 제게 넘어오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래도 봤지? 내가 성력을 컨트롤해서 네 능력을 막아 내는 거.”

    “응. 멋있었어.”

    “후훗.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언젠간 네 능력을 잘 제어하게 된다면, 지금 근위대장인 네 형보다 뛰어나게 될지도 몰라. 야망을 가져, 피시!”

    내가 하트보다 더? 피시가 스완의 말에 말도 안 된다는 듯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스완도 반 정도는 빈말로 내뱉은 거라 피시에게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저 엄청난 능력을 잘 다듬기만 하면 그땐 정말 자신의 성력으로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짧게 했을 뿐.

    “스완. 뱀의 영지에 정말 갈 거야?”

    “당연한 소리.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너랑 대치하면서까지 성력을 보여 줬겠어.”

    “위험할 텐데…….”

    “위험하면 성력을 써서 탈출하면 돼. 그러기 위해서 혼자 가는 거니까.”

    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성력을 완벽하게 사용하진 못한다. 아직도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위험에 빠지면 도망칠 수 있는 수준은 됐다. 좁은 거리이지만 오드처럼 성력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뭣하면 도망치면 되니까. 걱정 말라니까?”

    스완의 자신감에 피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스완의 처지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백조는 성력을 사용하는 것이 점점 능숙해지고 있지만, 피시는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제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이엘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피시는 계속 벌벌 떨기만 했을 것이다.

    “확실히…… 실전이 중요한가 봐.”

    킨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 용의 훈련을 받은 뒤로 능력을 활용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킨은 용이 갖고 있는 능력과 잔재주를 섞어 백조의 환각처럼 피시의 눈앞에 죽어 가는 이엘을 만들어 냈고, 그게 피시를 정신적으로 몰아세우며 단시간에 성장하게 도와줬다.

    “나도 언젠가 너처럼 폐하께 도움이 되는 날이 오겠지?”

    “당연하지. 너도 곧 밥값 하는 날이 올 거야.”

    “응. 그랬으면 좋겠어.”

    누워 있던 곳에서 일어선 피시가 제 다리를 끌어 모아 앉은 채, 그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금 전에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이엘의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그 침실은 암묵적으로 누구의 출입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는데…….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그 늑대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몇 년 전에 뱀의 영지에서 도망쳤던 이엘이 이곳에서 몸을 의탁할 때, 그녀의 침실에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위치가 뒤바뀌었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되어 그녀의 침실에 들어갈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선택을 받아 노아처럼 초대될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다…….”

    나도 노아 님처럼 폐하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할 텐데……. 하루라도 빨리 성장하고 싶은 욕구뿐이었다.

    *

    똑똑. 예의상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밀로였다. 그는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엘과 패티스, 그리고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모여 있는 인원을 보니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 것 같다.

    “킨도 데려올까?”

    “아니. 킨은 됐어. 일단 앉을래, 미르?”

    “응.”

    평소와 다르게 밀로의 표정이 진중했다. 이틀 전,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 저 장난기 많은 용도 뭔가 생각이란 걸 하게 된 모양이지. 패티스는 차를 마시며 제 맞은편에 앉는 밀로를 주시했다.

    “미르.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알겠니?”

    “응. 그렇잖아도 나 역시 너와 이야기하고 싶었으니까. 근데 얘네까지 여기 있을 거라곤 예상 못 했네.”

    밀로가 웃으며 패티스와 노아를 가리켰지만, 그 웃음이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천성이 고민과 먼 종족인데 답지 않게 깊은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 여러 가지로 복잡한 듯했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밀로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패티스 백작이 킨에게서 뭔가를 들었다고 해서 널 불렀어.”

    “킨?”

    킨이 뭔…… 무슨 얘기를 했는데? 당황으로 물든 밀로의 시선이 이엘에게서 패티스로 옮겨 갔다. 그는 이엘을 대신해 밀로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너희가 신의 물건을 훔쳤다며.”

    “…….”

    “그게 뭔지도, 대충 들어서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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