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
타월로 머리를 감싼 채 침실로 들어서던 이엘이 커다란 늑대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털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자신이 들어오는 걸 봤으면서도 늑대로 변한 노아는 여전히 러그 위에 엎드린 채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또 무슨 심통이 나셨을까.”
장난스러운 그녀의 말에도 늑대는 대꾸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슬픔에 젖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이엘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괜히 미안해졌다.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었다는 제 고백에, 노아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이 그녀에 관해 모르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르세니온의 존재 외에도 노아가 이엘에 관해 모르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저 가여운 늑대는 그게 서운했을지도.
“이리 와.”
머릿속을 복잡하게 떠다니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이엘은 살짝 쭈그려 앉아 노아를 향해 제 손등을 내밀었다. 새끼 강아지 취급하는 그녀의 태도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노아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습관처럼 그 손등을 핥고 얼굴을 치댔다. 늑대로 돌아가면 인간의 모습일 때보다 감정적인 부분들이 더 차분해짐에도 불구하고 지금만큼은 그녀에게 제 체취를 맘껏 묻히고 싶은 욕망만 들 뿐이었다.
“심통은 났어도 투덜대지는 않는구나, 여전히.”
“…….”
“이온이 살아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미안해. 그대가 황자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끝내 말하지 못했던 것.”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였어도 그랬을 겁니다.”
손을 뻗어 노아의 털을 쓰다듬는 순간, 이엘의 젖은 머리를 감싸 올렸던 타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새로 향긋한 장미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에 커다란 늑대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번엔 그가 손을 뻗어 이엘의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제 능력이 온도를 높여 차가운 이 공간을 데울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늑대의 능력은 정반대인 터라. 노아는 물기로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정리해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럼 왜 아직도 심통이 난 표정일까.”
웃음을 머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듣기 좋았다. 노아는 대답 없이 이엘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는 일만 반복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 말이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노아의 손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이엘이 아이 이야기를 꺼낸 탓에.
“로빈이 내 아이를 노리고 있다고 했지?”
“……예, 폐하.”
“아이에게 ‘그’와의 거래를 대물림시킬 계획이라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요.”
“노아. 예전에 내가 부탁했던 일, 기억나?”
“…….”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내 피붙이가 존재한다면, 그대가 꼭 지켜 줬으면 좋겠다고 내가 부탁했었잖아.”
노아의 표정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몇 달 전 그녀가 제 영지로 시찰을 왔을 때, 폭포가 보이는 그곳에서 이엘은 제게 부탁했었다. 사실 이 황위는 이온의 것이었으며, 만약 이온이 살아 있었다면 황제가 되는 건 응당 그였을 거라고.
하지만 당시엔 아르세니온 황자가 살아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으니, 그 뒤에 이어진 ‘그녀의 피붙이’가 황자를 가리키는 단어일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자신과 그녀의 아이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싫습니다. 제가 충성을 맹세한 건 르뷔아 황가가 아니라, 나타니엘. 당신입니다.”
“알아.”
“그런데 어떻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무리 제가 당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한들, 폐하가 아닌 아르세니온을 선택하겠습니까?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습니다.”
“맞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순순히 인정하는 그녀의 대답에 노아도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흥분할 뻔한 자신을 억누르며 길게 심호흡했다. 젠장.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은 그런 대화 말고 지쳐 있을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찾아온 건데…….
“그래서 그 부탁을 바꾸려고 해.”
“……예?”
“내 아이, 그러니까 공작의 아이를 꼭 지켜 줘.”
“…….”
“로빈으로부터, 올리세스로부터. 그리고 ‘그’로부터 나와 그대의 아이를 꼭 지켜 줘.”
“나타니엘.”
그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는 노아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엘이 엷게 웃었다. 그러곤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몸을 내밀어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우리 아이 가질까?”
“엘?”
“가능할 것 같아. 테오도로가 태어나도, 지킬 수 있을지 몰라.”
줄곧 그녀가 머뭇거렸던 건 아이가 태어나도 곧장 ‘그’가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물리적으로 이쪽 세계엔 손을 대지 못한다. 이곳은 아직까진 신이 만든 세상이기 때문에 ‘그’가 손을 뻗을 수 있는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이엘이 위험할 때 ‘그’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 숨을 수 있는 것 또한 아주 일시적이었다. 마치 백조가 물 밖에선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일환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의 멸망을 바랐던 것이다. 이곳이 아닌, 제 손으로 만든 세상에선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엘의 아이를 빼앗는 건 그 시작이 될 터였다.
“마음이 조급하고 심장이 크게 뛸 만큼 불안감이 증폭될 때가 많아. 그 얘기는 ‘그’가 만남을 요구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고.”
아무것도 몰랐을 땐 ‘그’를 자주 찾았다. 어쨌든 ‘그’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의 생각이 어떠한지 이엘도 정보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뱀의 영지를 떠나기 전, 로빈의 말을 들은 뒤로는 ‘목소리’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폐하. 페널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뱀이 그런 말을 괜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빈은 뭔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보호석과 같지요. 나자르의 목숨과 성력을 깎아 만든 보호석. 무엇이든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엘은 자신이 원하는 때엔 언제든지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성력이 강한 곳, 이를 테면 오드가 곁에 있거나 성전이 근처에 있을 경우엔 ‘그’를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로빈이 말하는 대가와는 관계가 없는 부분이다. ‘목소리’의 힘과 신의 힘이 충돌하여 생긴 반발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그녀에게 있어 대가란…….
‘육체의 수명 쪽보다는…… 영혼 쪽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올 때면 가슴이 옥죄는 것처럼 갑갑하게 느껴진 건 기분 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제 영혼이 그에게 좀먹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로빈의 말처럼.
그래서 그 이후론 ‘목소리’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닥쳤다.
“곧 ‘그’가 날 찾아올지도 몰라. 피한 지 꽤 됐으니까. 아마 내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을 테지.”
“놈을 다시 만날 겁니까?”
“응. 그래야 돼. 테오를 만나려면 ‘그’가 내게 건 제약을 해제해야 하니까.”
거래의 조건으로 달거리가 끊겼다. 단순히 달거리가 끊긴 게 아니라 몸 안이 아예 바뀐 상태였다.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러니 모든 걸 다시 처음으로 돌려야 한다. 그게 단지 테오도로를 갖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엘은 이제 제 몸과 영혼에서 ‘그’를 빼낼 준비를 할 생각이다. 완전히 끊어 낼 준비를.
“제가 같이 갈 수는 없습니까?”
“공작이?”
“위험한 곳에 폐하 혼자 보내기 싫습니다.”
“걱정도 많아.”
이엘이 웃으며 노아의 뺨을 검지로 콕콕 누르자, 그가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이로 손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폐하와 테오, 그리고 트리시를 지킬 겁니다.”
“응.”
어느새 노아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 채였다. 이윽고 단숨에 이엘을 품 안에 끌어안고 들어 올린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세 사람이 눕기에도 거뜬할 만큼 그녀의 침대는 커다랬다.
“으음. 아이를 가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엘이 놀리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제게 부딪쳐 오는 그의 입술을 옆으로 슥 피해 버렸다. 그에 노아의 미간이 아주 잠깐 좁혀지는가 싶었지만 그는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다정한 인사로 시작을 준비했다.
“지금은 아이 말고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나타니엘. 응?”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텐데. 오늘은 그냥 푹 쉬는 게 어때.”
“폐하께선 정말 가끔씩 제가 우논이라는 사실을 잊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그의 대답에 이엘도 더는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늑대의 적극적인 관심에 화답하듯, 긴 팔을 뻗어 그의 목 뒤에 걸고 감쌌다.
“아무리 우논이라 해도 피로가 쌓였을 테니, 오늘은 살살 할까.”
“폐하께서 제 편의를 봐주시는 겁니까?”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 잘근잘근 씹던 노아가 멈칫하며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벌써 상의를 벗어 던진 그를 올려다보며 이엘이 푸스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가 봐주지 않으면 누가 봐줘?”
“그럼 오늘은 봐주시지 마십시오. 이날만 손꼽아 기다려 왔는데, 그렇게 배려 깊은 명령은 도리어 제가 상처군요.”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커다란 손이 이엘의 몸을 감싸고 있던 가운의 끈을 능숙하게 잡아당겼다. 그러곤 느슨해진 가운 사이로 파고들어 열기로 후끈해진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근데 내 머리카락이 아직……,”
“금방 마를 겁니다.”
침대 시트 위로 축축한 물기가 번져 갔지만, 노아는 그녀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않게 재빨리 차단해 버렸다. 그러곤 작은 틈이라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가 빠듯하게 맞춰 들어갔다.
*
“왜. 나한테 져서 화났어?”
“누구…… 아, 스완이구나.”
“청승맞게 거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는데.”
스완이 툴툴거리며 피시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두 사람은 아까 그렇게 살벌한 싸움을 벌인 것치고는 꽤 평온한 낯이었다. 스완이 앉는 것을 확인한 피시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감상평을 남기듯 중얼거렸다.
“달빛이 참 예쁘지?”
“뭐야, 이 뜬금없는 감성은?”
“그냥. 예뻐서.”
“야. 너 술 마셨니?!”
“응, 쪼오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