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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7화 (377/488)

377화

“계속 얘기해, 노아 공.”

“네. 리노가 사형을 당해야만 했던 이유는, 그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황과 시종장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더군요.”

역시. 들어서는 안 될 비밀을 들었기 때문에 리노 윌터는 사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고 반쯤 미쳐 버린 리노를 찾으러 온 윌터 백작에게, 선황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대가로 아들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리노의 그 말을 렉토스만 들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형인 올리세스 윌터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마녀사냥이라고…….”

일라이저의 중얼거림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노아는 계속해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윌터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영지 몇 군데서 여전히 포필렌이 재배되고 있으며, 제국 전역으로 유통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제일 심각한 건 특정 마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가짜 사제입니다.”

“가짜 사제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드 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제라며, 어떤 놈을 앞세워 이교를 가르치고 있었소. 내가 갔던 마을이 그 시발점인 듯했고 그 영향이 어디까지 뻗쳤는지는 나도 잘 모르오. 확실한 건 이대로라면 이교도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거라는 것이오.”

올리세스의 계획이 생각보다 치밀하고 끈덕졌다. 외부적으로는 포필렌으로 제도를 어지럽히고, 내부적으론 인간들의 절박한 마음을 건드리며 황실과 균열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가짜 사제까지 데려왔다.

이엘은 이교도로 몰고, 정작 이교도를 만든 자신은 추앙받을 생각을 하다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지경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여론이라 대단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건국 초기인 지금만큼 그녀의 위치가 위태로울 때도 없을 테니.

“황자를 위해 마련해 놓은 발판이 되레 내 발목을 잡았구나.”

이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노아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말로 황자가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지만 걱정하지 마. 그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내가 준비하는 것들을 잘 따라오면 되니까.”

“예, 폐하.”

노아의 이야기가 끝나고, 뒤이어 패티스와 스완이 입을 열었다. 고니의 저주에 관해서 이야기할 땐 이엘이 그것까진 말하지 않아도 된다며 눈짓을 보냈지만, 이번엔 스완이 괜찮다며 아버지인 빈센트에게서 들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요컨대 지금의 넌 나자르와 비슷하다는 뜻인가?”

르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스완이 반대편에 서 있던 패티스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래도 지금 말할 타이밍이겠죠……? 다소 애처롭게 저를 바라보는 스완의 시선에 패티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있나. 내가 말하는 수밖에.

“폐하. 사실 그것에 관해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백작?”

“실은 몇 주 전에 제도에서 열렸던 귀족회의에서 뱀에게 스완의 신분이 노출됐습니다.”

“뱀이라면…… 로빈?”

“예.”

스완의 신분은 되도록 노출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처음엔 백조인 그가 뭍으로 올라왔다는 게 알려지면 그와 엮인 이엘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스완이 성력을 쓸 수 있게 되면서 그의 안전이 더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신분이 노출됐다는 게, 어느 정도로 노출됐다는 거지? 스완이 고니라는 것을 알았나?”

“아니요. 스완의 말에 따르면 로빈이 얼굴을 본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로빈과 마주치기 전에 숨었다고 했고요.”

“맞아요, 폐하! 뱀을 보자마자 곧장 도망쳤기 때문에 제 얼굴은 절대 모를 거예요!”

잘근잘근 손톱만 깨물고 있던 스완이 패티스의 말에 살을 붙여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럼 문제 될 게 없지 않냐는 그녀의 표정에 패티스가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성력을 눈치챘습니다.”

“성력을 눈치채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스완에게서 느껴지는 미미한 성력을 감지한 듯합니다. 그가 영지로 떠나고 제도 내에 정찰병으로 뱀 몇 마리가 붙었으나 앤디 경이 모두 처리했으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다만?”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반복될 것 같아, 폐하의 동의 없이 역으로 급습할 계획을 세웠고 실행할 예정입니다.”

패티스의 당당한 고백에 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를 믿는다. 스완과 자신의 목숨이 이어졌다는 걸 알고 있기에 원치 않음에도 여태 스완의 안전을 책임져 왔다. 애초에 패티스에게 제도를 맡길 때부터 제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가 해결하게 둘 생각이었다.

“그게 무슨 계획인데?”

“스완을 새로운 나자르로 착각하게끔이요.”

“나자르?”

“예. 이미 스완의 성력을 들켰는데, 로빈이 끈질기게 파헤치면 스완이 고니라는 사실까지 탄로 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역으로 정면 돌파를 하겠다?”

“예, 폐하.”

로빈이 이 사안을 가벼운 사안으로 넘기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 뱀은 쓸데없이 감이 좋기 때문에 잘못하면 스완의 정체를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 쉬쉬하고 있기는 했지만, 스완이 고니라는 걸 아는 자가 적은 숫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밟힐 꼬리였다.

그래서 고니라는 게 밝혀지기 전에 역습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스완이 나자르였다고. 도리어 덫을 놓는 셈이었다.

“로빈이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노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다.

“로빈이 제게 제안을 해 왔습니다. 저희가 숨기고 있는 나자르를 데리고 오면, 소모라 땅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소모라…….”

이엘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뱀의 영지를 시찰하러 가면서 한 번, 그리고 로빈과 동행한 채 또 한 번, 마지막으로 렉토스를 납치하기 위해 오드와 앤디가 한 번. 그렇게 소모라를 세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그곳에 대해 알아낸 게 하나도 없었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고,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로빈이 수거한 보호석들이 착실하게 그 땅에 쌓이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폐하, 허락해 주세요.”

스완이 눈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저지른 일이에요. 제가 책임지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폐하. 폐하의 목숨이 저 고니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카르가 스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린 채 완강하게 거절했다. 르네와 레온 역시 이카르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사지나 마찬가지인 뱀의 영지로 저 약해 빠진 고니를 어떻게 보내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도망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어요! 애초에 제 능력은 그런 용도라는 걸 폐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

“폐하. 여태 제가 짐덩이랑 다를 바 없었다는 것, 저도 잘 알아요. 그나마 늑대에게 빌붙어 목숨을 연명하며 살았던 것도 인정하고요. 제 분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저예요.”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다.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했던 이 육지에서 약자인 건 당연했지만, 그래도 매번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와 계약을 해서 이곳에 올라왔는데, 심지어 그녀를 협박하다시피 몰아붙여 5년이란 제약까지 걸어 이엘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전쟁이 터지면 모두가 이엘보다 자신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스완은 지난 몇 년간 그녀에게 도움이 됐던 게 세잔티노 습격 사건밖에 없음을 깨닫는 순간,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고만 싶어졌다.

“그럼 스완의 능력을 보시고 폐하께서 판단하십시오.”

무거운 침묵을 깬 건 패티스였다. 그는 묵묵히 사태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별안간 제 옆에 서 있던 피시의 팔을 잡아 앞으로 밀쳤다.

“피시. 스완을 공격해.”

“뭐, 뭐?”

“스완. 넌 피시의 공격을 막아. 대신 네 종족의 고유한 능력이 아니라 성력으로.”

“하, 하지만 패티스……! 그건 위험해!”

“그러니까 하라는 거야. 여기서 네가 제일 위험하니까.”

입이 딱 벌어지는 제안에 피시가 난감한 듯 이엘을 쳐다봤다. 물론 그동안 노아, 하트, 그리고 킨에게 받은 훈련으로 천천히 제어를 해 나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위험하다.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안 돼. 못 해. 위험해.”

“아냐. 해 줘.”

“스완!”

늘 물렁거리듯 느슨하게 굴던 스완이 표정까지 굳힌 채 피시의 손을 붙잡았다.

“날 믿어, 피시.”

“…….”

“너도, 나도. 우리 둘 다 열심히 훈련했잖아.”

피시가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며 발만 동동 굴렀다. 솔직히 능력을 사용하라고 하면 할 수 있다. 다만 그 상대가 스완인 게 싫었을 뿐. 그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이다.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건 조이나만으로도 족하다.

“안 돼. 네가 다칠지도 몰라…….”

“다쳐도 돼.”

“…….”

“다치면서 성장하는 거랬어.”

“……누가.”

“우리 아버지가. 나보고 많이 다치래. 많이 경험하고 많이 실패하고 많이 좌절하래.”

그러면서 크는 거래, 우리는. 그렇게 덧붙인 스완은 피시의 손을 잡은 채 이엘을 쳐다봤다.

“폐하. 허락해 주세요. 피시의 공격을 막아 내면, 제가 뱀의 영지로 가겠습니다.”

“안 됩니다, 폐하.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요.”

“참 나. 다들 진짜 왜 이렇게 나를 못 믿어? 내 목숨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게 나야. 내가 언제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거 봤어?”

스완이 미간을 찌푸린 채 평소의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돌아가 소리쳤다.

“다들 세잔티노 때 기억 안 나? 그 많은 인간들을 죄다 홀리고 도망치는 데 한몫했던 게 나라고. 거기다 내가 성력까지 쓸 수 있는데, 이 정도면 내가 너희보다 낫지 않아?”

“…….”

“성력은 보호석으로도 막지 못하니까. 내가 너희보다 낫다고.”

스완의 말에 이카르가 반박하려 했으나 이엘이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곤 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패티스. 내가 예전에 훈련하던 평야로 안내해.”

“폐하!”

“피시. 넌 온 힘을 다해 스완을 공격해. 그리고 스완, 너는 성력으로만 피시의 능력을 막아.”

“네!”

“하지만 네가 정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면, 환각으로 피해도 돼.”

“…….”

“다만 그럴 경우엔 네가 뱀의 영지로 돌아가는 일은 없는 일이 되는 거야. 그땐 군말 않고 마음 접어, 스완.”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피시와 스완의 능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패티스가 건넨 제안이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패티스는 제 형제인 피시와 하트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며 아끼기 때문에 제 형제가 위험한 일을 벌일 리 없다. 어쩌면 결과가 이미 예견된 건지도 모른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스완은 곧 로빈의 영지로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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