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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6화 (376/488)
  • 376화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노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로빈의 영지에서 스완의 소식을 접한 후 대체 스완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확인하기 위해 제도에 들렀다. 그 과정에서도 제게 달라붙는 뱀의 추격을 따돌리느라 시간을 꽤 잡아먹은 상태였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제도에서 노아를 맞아 준 건 앤디였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노아가 그곳에 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썩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패티스 백작은?’

    ‘네? 아, 그게 지금은 출타 중이십니다.’

    ‘출타? 제도를 버리고 어딜 갔는데? 그의 역할은 폐하의 부재를 대신하여 황궁을 지키는 게 아니었나?’

    눈에 띄게 당황한 앤디에게 뭔가 더 질문하려던 노아는 그를 밀쳐 내며 스완을 찾았다. 더는 제 상관에게 숨길 수 없음을 직감한 앤디가 스완을 그 앞에 대령했다.

    ‘로빈한테 정체를 들켰나?’

    ‘흐끅!’

    별안간 놀란 스완이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변명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곧장 들켜 버렸다. 아니. 애초에 노아가 상황을 짐작하고 물어본 질문이라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대충 설명을 전해 들은 노아는 처음엔 절대 안 된다며 스완을 말렸다. 아무리 스완이 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는 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오드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정도이다.

    기껏해야 일시적인 방어 정도일까. 보호석이 있어도 제약받지 않는 게 성력이라지만 지금의 스완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는 되레 아군에게 피해만 입힐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뱀으로부터 정보를 얻어야 하잖아.’

    ‘…….’

    ‘그걸 내가 하겠다니까?’

    ‘대체 네 그 쓸데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지금 네 목숨이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건가?’

    ‘그래서 성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훈련하고 있는 거잖아!’

    ‘이, 일단 진정하십시오, 각하! 이러다 동네방네 소문 다 나겠어요. 우선 진정들 하시고 나중에 은밀하게 얘기 나누십시오!’

    보다 못한 앤디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어 갈라놓았지만, 노아는 여전히 스완의 능력을 불신했다. 스완이 그의 앞에서 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여 줬음에도 노아는 완강했다.

    그러던 차에 스완이 이엘과 연락이 닿은 것이다. 로빈의 영지에 들렀던 노아가 제도에 왔다는 스완의 보고에, 이엘이 잘됐다며 노아와 함께 하이에나의 영지로 오라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노아와 스완은 풀리지 않는 감정을 안은 채 이곳에 도착한 상태였다.

    “백작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가?”

    “저도 며칠 전에 왔습니다. 공작께서 제도로 오실 줄 알았더라면 그곳에서 공작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올 것을 그랬네요.”

    노아의 서늘한 말에도 패티스는 연신 웃는 낯으로 사근사근 대답했다. 제도를 비우면서까지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가…… 지금 그녀가 저희에게 할 얘기와 관련이 있는 걸까? 노아는 이엘의 입 밖으로 나올 얘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좋아. 그럼 시작할게.”

    그녀의 말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그런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이엘이 내뱉은 첫마디는 모두를 기함하게 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내 쌍둥이이자, 제 1르뷔 제국의 첫 번째 황자였던 아르세니온 에르네스트 르뷔아는 살아 있다.”

    “네?”

    “…….”

    “그게 무슨…….”

    시작부터 충격을 받은 건지 작게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물론 노아나 이카르의 경우엔 이온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질끈 감는 걸로 끝났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여 어안이 벙벙했다.

    “폐하. 황자가 대체 어떻게…… 무슨 말씀을…… 폐하…….”

    “소란은 됐어. 내가 하는 얘길 다 듣고 그때 물어봐도 늦지 않아.”

    “아, 알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은 온통 충격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이엘은 저를 바라보는 눈빛들에 어린 당혹을 읽으며,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꽤 무신경하게 말을 이어 갔다.

    기억이란 게 존재하던 때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자신에겐 그렇게 길었는데, 이렇게 간략하게 줄여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이엘은 최대한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담아 이야기했고,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땐 해가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뒤였다.

    “너무 길었지?”

    “…….”

    “이제 질문해도 되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 봐.”

    “…….”

    그러나 침묵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어느 정도 짐작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아니. 짐작했던 사람도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나 고니가 그랬다. 스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잠깐만요, 폐하. 정리가 안 돼서 그러는데…… 그러니까 지금 폐하가…… 폐하의 목숨이요, 폐하의 목숨이…….”

    “응. 아르세니온을 살리기 위해 버렸어, 내 목숨.”

    “왜…….”

    정말 남 얘기 하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이엘의 반응에 스완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어선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스완의 아래턱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이엘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스완, 괜찮아. 네 목숨은 내가 지켜 준다고 했잖아. 너와 나 사이의 계약이 끝난 뒤에……,”

    “지금 내가 죽을까 봐 이런다고 생각해요?!”

    “…….”

    “폐하는…… 왜 폐하는…… 왜 너는…….”

    왜 너는 그동안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 왜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 거야? 스완의 커다란 눈동자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모르겠다. 관심 없다. 그의 관심은 오직 그녀의 목숨 하나였다.

    “그럼…… 폐하는 죽는 거야? 나타니엘. 넌 죽어?”

    “인간은 언젠가 죽어.”

    “그게 아니라! 제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스완. 우선 진정해. 난 괜찮아.”

    “스완만 흥분한 게 아닙니다. 저희 모두 같아요.”

    노아 역시 쥐고 있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말 중 태반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음에도, 몰랐던 내용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황자를 살리기 위해 ‘그’에게 그녀의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는 내용. 이전에 이엘은 ‘그’에게 자신의 첫아이를 바쳐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노아는 아이를 살리기 위한 방법만을 강구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거기에 네 목숨도 엮여 있었다고? 노아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이엘은 그런 제 시선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건 네가 죽음을 초연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죽음을 이겨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부디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황자를 포기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꽤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르네가 무겁게 입을 열며 제안했다.

    “어차피 그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그를 포기하고 폐하와 폐하의 아이만을 생각하십시오.”

    이성적인 독수리답게 재빠르게 해답을 내놓았다. 다수가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했다. 현재로선 ‘그’와의 계약을 깨뜨리고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두가 그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이카르는 르네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오드 앞에선, 지금까지처럼 아르세니온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 거라고 다짐했지만…….

    하지만 막상 이엘의 입을 통해 황자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다짐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으며 애써 외면하기로 한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선택은 나타니엘이다. 아르세니온과 나타니엘 중 단 한 사람의 목숨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카르는 제 신념을 무너뜨리고 나타니엘을 골라야만 한다.

    “동의합니다. 황자를 포기하십시오.”

    이카르의 무거운 소신에 어수선하던 공간이 일순 조용해졌다. 저 재규어가 어린 황녀와 황자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했는지, 여기 모인 자들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자가 죽었다면 몰라도 살아 있다는 걸 안 이상 어떻게든 황자를 살려야 한다며 날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 중에 제일 차분해 보였다.

    “그를 포기하면 다 끝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부디……,”

    “아니. 끝나지 않아.”

    그러나 이엘은 고개를 흔들며 그들의 전제를 부정했다.

    “나와 ‘그’ 사이에 있는 계약은 단순히 내가 어리석어 얻어걸린 계약이 아니야. 노아. 그대도 알고 있잖아.”

    “…….”

    “이 계약의 시작은 내가 아니라 내 아비였음을.”

    이제 노아가 진실을 털어놓을 차례였다. 이엘의 눈빛을 받은 그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그럼 제가 윌터 백작의 영지에서 만난 리노 윌터에 관해, 그리고 그에게 들은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에 앞서, 제가 윌터 백작의 아들인 올리세스를 만나러 가야만 했던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뱀의 영지를 시찰할 때, 저는 로빈과 은밀하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네, 맞습니다. 선황이 폐하처럼 ‘그’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로빈은 그 이야기를 렉토스에게 들었고, 렉토스는 리노 윌터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

    “리노 윌터는 올리세스 윌터의 동생으로, 2차 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반역에 가까운 중죄로 사형당했던 자입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그는 살아 있었고, 다만 죽은 사람처럼 윌터 백작의 저택 지하에 갇혀 살았다고 합니다.”

    노아가 만난 리노는 렉토스에게 들은 것처럼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다. 그 부분을 감안해 달라는 말을 덧붙이며 노아는 천천히 물꼬를 텄다.

    “과거에 선황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를 만나려 했습니다.”

    “그건 영원히 죽는 않는 생, 불사였고요.”

    패티스가 첨언하여 노아의 설명을 보충했다. 고개를 끄덕인 노아는 다시 이어 말했다.

    “그 불사의 대가로 ‘그’가 요구했던 건 아이였습니다.”

    “아이라면…….”

    “맞아. 나와 이온, 둘 중 하나였거나 둘 다였거나.”

    이엘이 팔짱을 낀 채 평온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 반응에 놀란 건 노아와 패티스였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많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이엘 역시 두 사람을 쳐다보며 실소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간절하게 진실을 파헤치고 있었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선황이 그 계약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날 찾아온 거야.”

    “…….”

    “만약 이번에도 내가 황자를 포기하고 이 계약을 완수하지 못하면, 다음은 내 아이에게로 향할 거야.”

    “그런……,”

    “이건 누군가 끝내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굴레야.”

    그래, 이게 대물림이었다. 선황이 저지른 일로 인해 이엘도, 그리고 이엘의 아이도 고통받게 될 영원한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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