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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5화 (375/488)

375화

“비슷해. 너희가 보기엔 움직임이 빠른 것처럼 느껴지는 식이지. 실제로는 내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아주 느린 거지만.”

“시간을 느낄 수가 있다고?”

“이래 보여도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단다, 꼬마야.”

“알고 있어. 신께서 널 만드셨다는 얘길 들었으니까.”

“…….”

이번엔 킨이 입을 다물었다. 밀로가 얘기했나? 용의 한쪽 눈썹이 아주 조금 위로 틀어졌다.

“너처럼 오래 살면 그 정도는 잔재주로 부릴 수 있는 건가?”

“나처럼 오래 사는 게 가능할 것 같아? 지금 너희 세상은 멸망 직전인데.”

“그건 모르는 일 아닌가? 난 되도록 오래 살 생각이라서.”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패티스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공격은 번번이 빗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빗나간 게 아니라 킨에게 닿지 않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공격이 오기도 전에 킨은 뒤로 물러난 상태였으니까.

“내 재주가 부러우면 네 형처럼 내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지, 이렇게 무례하게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습관이야?”

“글쎄. 난 그런 예의 같은 건 배울 길이 없었거든.”

“귀공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쾅쾅쾅! 폭발에 가까운 폭음이 들려오자 성에서부터 정찰병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듯했다.

“뭐야. 끝이야? 더 공격 안 해?”

“간단한 테스트는 끝났어.”

“으잉? 무슨 테스트?”

킨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에 제게 쏟아진 공격들과 테스트가 무슨 상관…… 아아. 날 테스트했다고?

“내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테스트했다는 소리야?”

“용의 능력이라고 해 봤자 고작 날씨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한데, 그런 건 전쟁에서 써먹지도 못해.”

“재밌네. 땅에 있는 것들이 내 능력을 평가하는 꼴이.”

“공중전에서 써먹으려고 해도, 너흰 본체로 돌아가는 시간과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다른 종족들에 비해 월등히 느리잖아.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수준이야.”

신랄하구만. 킨은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사이 성에서 정찰을 나온 근위대와 기사단이 두 사람의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패티스도 그쪽으로 힐끗 눈길을 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도 2차 전쟁 땐 인간이고 이종족이고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다 죽여 버렸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건지 궁금했어? 그래서 네가 내린 내 평가는?”

“아주 쓸모없지는 않는 것 같군.”

패티스의 대답에 킨이 배꼽을 잡고 푸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의 기이한 웃음소리를 듣던 패티스는 그대로 돌아서 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피시를 함부로 대하며 제멋대로 훈련을 하고 있는 놈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차갑게 식고 나니 용의 능력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은 본질적인 궁금증이 일었다.

2차 전쟁 때 극소수의 용들이 이곳에 내려왔다. 그러나 그 극소수의 용이 저지른 피해는, 몇 십 년에 걸쳐 인간들이 이종족에게 가한 학살보다 더 큰 피해를 낳았다. 전쟁광이라고 악평이 자자한 유클리드마저 용이라면 혀부터 내두를 지경이었다.

사실 정말 궁금한 건 저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궁금한 건, 대체 용이 왜 저렇게 되었을까였다. 지금은 수컷과 암컷이 따로 존재하지만, 원래는 보통의 이종족들처럼 한데에 모여 함께 지냈다고 했다. 근데 대체 무슨 이유로 따로 살게 된 거지?

그리고 왜 암컷인 드레인은 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데 놈에게선 성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스완을 통해 듣기론 암컷 용이 성력을 사용하는 건 마치 성전기사단이 오드로부터 성력을 빌려 쓰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이야 어쨌든 예전엔 신과 함께 살았던 수컷 용들도 성력을 쓸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젯밤 밀로에게서도, 그리고 조금 전의 킨에게서도 성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오랜 시간 스완과 함께 지내며 가장 가까이서 성력을 느꼈던 자신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헐레벌떡 달려온 하이에나들이 엉망이 된 주변과 킨을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린 채 패티스를 살폈다. 난잡하긴 해도 절단된 지면이 깔끔한 걸 보면 능력을 사용해 공격을 퍼부은 건 저희들의 영주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란 듯, 하이에나들의 안도한 표정을 보며 패티스는 품 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저놈에게 붙인 감시를 배로 늘려라.”

“폐하의 손님이라 각별히 신경 쓰고는 있습니다. 하트 경께서도 그렇게 명령하셨고요.”

“저놈이 폐하와 함께한 지는 얼마나 됐지?”

“재규어의 영지에서부터입니다. 폐하의 친우라던 분과 함께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위대 중 한 마리가 대답을 들으며 골몰했다.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뀐다는 저 용이, 능력과 힘에 제한이 생기는 이곳에 왜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걸까. 이쯤 되니 암컷 용에 대한 집착이 단순한 살육에 대한 욕구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나? 저놈이 저지른 짓이라던가.”

“예. 제게 감시가 붙었다는 걸 알고 몸을 사리는 건지, 아니면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는 건지. 그동안엔 딱히 별일 없었습니다.”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백작님?”

“아냐. 아무것도.”

뭐가 됐든 암컷 용에 대한 집착이 지독할 정도다. 그게 자칫하면 스완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기에, 패티스는 촉각에 날을 세웠다. 곧 있으면 이엘이 노아를 비롯하여 최측근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엔 스완도 함께이다.

이미 스완의 위치를 로빈에게 들켰고, 그걸 역으로 이용할 계획을 짜고 있는 상태였다. 뱀이 스완을 해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용은 스완을 해칠 것이다. 그러니 더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지.

“이건 네 똘마니들이야?”

어느새 다가온 킨이 모여 있는 기사단과 근위대를 훑어보며 비죽거렸다. 이엘과 함께 영지 시찰을 하고 돌아왔던 근위대들은 그의 이죽거림이 익숙하다는 듯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마치 킨을 연행하듯 성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잠깐만.”

그러나 패티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곤 주변에 있던 근위대와 기사단을 모두 몇 미터 뒤로 물러나게 했다.

“할 얘기가 있는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이렇게 똘마니들을 다 밀어냈어?”

“너희 종족은 얼마나 남았지?”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그건 전력 누출이라 곤란한데.”

킨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 하이에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봐도 뻔하다. 한 마리의 용이라도 더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겠지.

어차피 언젠가는 전쟁이 터질 텐데,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황제를 지키려면 지금보다 아군이 더 강력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의도로 물어본 거겠지.

“그럼 너넨 왜 숨어 사는 거지?”

“딱히 숨어 살려고 한 건 아닌데, 그게 그렇게 됐네?”

“…….”

“왜. 이번에도 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모자라?”

“너와 나눈 얘기 중 의미 있는 대화는 하나도 없는 듯하군.”

“그거야 네가 일방적으로 내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지.”

습관적으로 푸른 머리카락을 배배 꼬던 킨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너희 동맹도 아닌데, 설마 내가 아무 대가도 없이 술술 얘기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좋아. 암컷 용을 찾고 있다고 들었다.”

“…….”

“그녀를 만나게 해 줄 순 없지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해 줄게.”

“너도 걜 만날 수 있어?”

살기는 없어 보이는데……. 패티스는 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문 킨의 반응을 살폈다. 밀로의 충고와는 달리 킨의 눈빛엔 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묻잖아. 너도 걜 만날 수 있냐고.”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냐. 이 거래에 승낙할지 말지나 결정해.”

고요한 패티스의 말에 킨은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안 본 지 꽤 오래 되었으니 암컷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지금도 신의 곁에서 돕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쓰는 성력이 여전한지도 궁금했다. 한때는 자신들도 쓸 수 있었던 그 성력을…….

킨은 그 생각을 하며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 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손으로 성력을 맘껏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실수를 되짚으며, 킨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 거래에 응할게. 다만 나도 모든 질문에 답하지는 않을 거야.”

“너희 용은 왜 따로 살게 된 거지? 암컷과 수컷은 왜 따로 살게 된 거냐고.”

“우리가 죄를 지었거든.”

“죄?”

“도둑질을 했어.”

뜬금없는 이야기에 패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도둑질 얘기는 왜 나오는 거지?

“암컷의 물건을 훔쳤다는 거야? 그래서 사이가 나빠졌고?”

“아니. 신의 물건을 훔쳤는데?”

“……뭐?!”

“신께서 건드리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훔쳐서 달아났거든.”

이제 패티스는 미간을 찌푸리다 못해 허, 하는 바람 빠진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가 킨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신의 고유한 영역을 우리가 건드렸지.”

“그게 뭔데?”

“이건 네 거래의 결과가 마음에 들면 얘기해 주지.”

“…….”

“참고로 이 내용은 밀로에게서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거야. 아무리 협박하고 괴롭혀도, 놈은 절대 얘기해 주지 않을걸.”

그러니 듣고 싶으면 얼른 제게 결과를 가져오란 소리였다.

“알겠다. 네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건 뭐지?”

패티스의 대답을 들은 킨의 눈이 반짝거렸다.

*

노아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5일이 지난 후였다. 로빈의 영지에서 이곳으로 곧장 돌아올 줄 알았던 노아가 제도에 왔다는 소식을 스완에게서 들은 것이다. 다행히 스완이 이엘에게 노아의 방문을 알려 주었고, 그녀의 명령대로 스완을 태운 노아가 제도에서 하이에나의 영지로 빠르게 달려왔다.

“오드. 결계를 부탁해.”

“네, 폐하.”

마침내 모두가 자리에 모였다. 그녀의 동맹 종족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최측근만이 모인 터라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물론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온 레온과 이카르, 그리고 일라이저도 오랜만에 얼굴을 비치었다.

이엘의 명령대로 오드가 모인 공간에 성력으로 결계를 쳐서 외부에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차단했다.

“내가 그대들을 이곳에 부른 건……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야.”

“…….”

“그러니 내 이야기를 듣고 그대들도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말해 주었으면 해.”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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