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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4화 (374/488)
  • 374화

    “예, 폐하.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패티스가 문을 닫고 나가자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조금 전보다 더 무겁게 깔렸다. 언제나처럼 오드는 그녀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오드.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말해, 나의 엘. 들어줄게.”

    “아이를, 내 아이를 꼭 지켜 줘.”

    “물론이야. 걱정 마.”

    “내 아이를 지켜 주려면 너도 꼭 살아야 하는 거 알지?”

    “그래.”

    “약속한 거야. 절대로 나와 이온, 혹은 내 아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짓은 하지 마. 그건 싫으니까.”

    오드는 가볍게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미소에 그간 쌓였던 걱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엘은 안도한 듯 숨을 길게 내뱉고는 습관처럼 제 배를 손으로 쓸었다.

    “패티스가 계책을 마련하는 대로 ‘그’를 만날 거야. 그러면 아이도 곧 만나게 되겠지.”

    “백작에게 획책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실은 네가 해답을 찾았구나, 엘?”

    “아주 조금은.”

    “…….”

    “이 거래의 맹점을 찾았으니까. 내가 수습해서 내 아이와 이온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주 최악의 경우엔…… 아이를 위해서 이온과 그녀 자신, 둘 중 하나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애초에 난 이온을 위해 희생될 목숨이었으니까, 이렇게 살 의지를 가진 것만으로도 새장을 부수고 나온 것과 똑같아.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모습을 그리자. 그 외의 일은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엘.”

    오드의 손이 불쑥 다가와 이엘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그의 하얗고 마른 손이 그녀의 손을 위로하듯 도닥거렸다.

    “끝까지 믿어. 네 자신을 믿고, 네 주변을 믿고. 그리고 너의 신을 믿어.”

    “…….”

    “너는 숱한 죽음 속에서 살아남았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똑똑한 너라면 깨달았겠지.”

    “내가 신을 버리고 ‘그’에게 넘어갔는데도? 그런데도 신께선 나를 용서하셨을까?”

    “인간이 그렇게 약하다는 걸 알고 계셨으니 나와 같은 종족을 너희에게 보내신 거야.”

    “…….”

    “비록 다른 나자르인들은 인간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엔 실패했지만, 엘.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 난 지금도 내게 주어진 것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의 엘. 두려워하지 말고, 악한 것에 휩쓸리지 말고, 네 신념으로 맞서 싸워.

    “정말 신께서 널 선택하셨다면, 네가 이길 수 있도록 준비해 두셨을 테니까.”

    끝까지 믿고, 포기하지 말고 싸워. 언젠가 패티스 백작이 네게 전해 달라고 했던 말처럼, 어떤 것도 포기하지 말고 부디 견디고 또 견뎌서 그들이 네게 안겨 줄 승리를 거머쥐렴.

    그래, 엘. 그거면 나의 소임도 다 끝날 것 같아.

    *

    한편 다이닝 룸을 나왔던 패티스는 그 앞을 꼿꼿하게 지키고 서 있던 르네와 마주쳤다. 그는 작위가 높은 독수리를 향해 묵례하듯 인사하곤 돌아서려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곤 다시 걸어와 르네의 앞에 섰다.

    “각하. 다소 무례한 질문이지만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하시오.”

    르네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패티스를 훑어봤다. 동맹이 된 이후에도 패티스와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면한 게 거의 없는 편이었다. 똑같이 황제의 곁을 보좌하는 입장이어도, 전장에서 싸우는 자신과 뒤에서 그녀를 엄호하는 패티스는 다른 역할이었으니까.

    그래서 저렇게 대뜸 제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이 궁금해졌다. 이엘을 제외하면 동족에게도 냉정하다는 저 하이에나가, 제게 무례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뭔지.

    “독수리의 눈알은 얼마 정도입니까?”

    “……뭐?”

    “과거 1제국에선 독수리의 눈알이 갖는 가치가 금보다 더 높을 때도 있었잖습니까. 웬만한 보석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

    “만일 그게 지금도 적용이 된다면, 어느 정도면 제가 구할 수 있을까요?”

    “네 목숨을 한가득 안겨 준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흐음, 그렇군요. 역시 값어치는 1제국 때보다 더 올랐겠군요. 독수리의 서열이 높아졌으니.”

    손으로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중얼거렸다. 그에 르네가 분노로 얼굴이 붉게 물드는 건 당연했다. 이젠 인간들로도 모자라 같은 이종족, 그것도 동맹이라고 자신하던 놈들에게까지 이런 수치를 당해야 하는 건가? 놈이 그녀의 최측근이 아니었다면 르네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목 졸라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아. 오해는 마십시오.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그런 식의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패티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갛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어찌 감히 독수리의 것을 탐하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덧붙이며 물러나려 했으나 이번엔 르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건 무례의 선을 넘은 듯한데.”

    “…….”

    “인간들처럼 탐욕에 찌든 건 아닐 테고. 뭔 생각으로 그딴 걸 물었는지 말해.”

    어차피 노아가 돌아온다면 르네도 알게 될 사실이었다. 미리 말한다고 문제 될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름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와서 버리지 못하고 갖고 와 버렸어요.’

    별안간 앤디의 그 말이 떠올랐다. 종이는 모두 없애라는 그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앤디는 그 낱장의 종이에 적힌 ‘늑대의 기름’에 시선이 빼앗겼단다. 늑대에게 기름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패티스는 앤디를 통해 알게 된 셈이었다.

    그와 마찬가지이겠지. 저 독수리에게도 눈알은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패티스 백. 내 말이 우습나?”

    “목숨만큼 큰 가치겠군요, 당신들에게 눈알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눈치가 빠른 독수리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지만 패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의 이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그리고 타이곤의 갈기.

    그녀는 더 이상 세 가지가 필요치 않다고 말했지만 패티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게 제물이 되고, ‘그’를 불러올 만큼 가치가 된다면……. 어쩌면 그걸 이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 독수리는 내 목숨을 한가득 줘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지만, 내 목숨이 아니라 폐하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 달라질 것이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위해서라면 저 독수리는 제 눈알이 아니라 목숨이라 할지라도 선뜻 내놓을 자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각하.”

    “백작.”

    “어차피 곧 알게 되실 겁니다.”

    “…….”

    “조금 전의 제 말은 잊어 주십시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때 생각해도 당신에겐 버거울 테니, 벌써부터 생각하지 마십시오. 패티스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마지막 말은 입 안으로 삼켜 둔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훈련을 받고 있다던 너른 평야였다. 원래 피시의 훈련 담당은 하트였으나 그가 황제의 근위대장이 된 뒤로는 전처럼 훈련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시찰로 오랜만에 하트가 영지로 돌아왔으니, 아마도 피시가 그를 졸라 훈련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패티스는 저 멀리 보이는 두 인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패티스의 걸음이 빨라졌고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저게 지금 뭐 하는…….”

    예상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능력을 쓰고 있는 건 피시였지만, 그의 앞에서 지도하는 건 하트가 아니었다.

    곱슬거리는 푸른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 꼬며 뭐라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남자. 슬림한 체격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가 피시의 앞에 서 있었다.

    “다시 가둬 줘? 거기서 네 황제가 죽는 꼴을 또 봐야 능력을 쓸 거야?”

    “아, 아냐. 아냐. 다시 할게. 제발 그건 싫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구 도리질을 치던 피시가 저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패티스를 발견했다. 평소보다 더 서늘한 표정으로 옆에 선 킨을 노려본 채였다. 피시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보다 패티스가 더 빨랐다.

    “그럼 어디 네 잘난 실력이나 볼까.”

    조곤조곤하게 말한 패티스가 별안간 킨을 향해 능력을 썼다. 땅이 으드드득 갈리는 소리가 귀에 채 들리기도 전에, 조각난 땅이 하늘로 솟아올라 그대로 뚝 떨어져 킨을 공격했다. 순식간이었다. 그가 있던 자리는 커다란 바위와 땅 조각이 처박혀 엉망이 되어 버렸다.

    “패티스!”

    당황한 피시가 그제야 소리를 질렀지만 한참 늦었다. 조금 전까지 제 앞에서 이것저것 지시하던 킨이 돌덩이에 파묻혀 버린 것이다.

    “킨! 킨! 괜찮아?!”

    역시 용이었군. 패티스는 킨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맨손으로 바위를 들춰 내려는 피시를 가만히 쳐다봤다. 용이 왜 피시의 훈련을 봐주고 있는 거지?

    “킨!”

    “그만해. 손 다치니까.”

    “하지만 킨은……!”

    “그게 용이란 건 너도 알잖아. 이 정도로 안 죽어.”

    패티스는 무거운 바위를 치우느라 손끝이 피로 물든 피시를 밀쳐 내고, 다시 능력을 사용해 공격했던 것들을 죄다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용이란 건 어떻게 알았어?”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목소리에 패티스는 재빨리 몸을 틀며 커다란 바위로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공격은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 마. 네가 아무리 공격해도 내가 널 공격할 일은 없으니까.”

    킨은 어깨를 으쓱이며 패티스와 피시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조금 전, 기민한 감각으로 제게 닥칠 위험을 느낀 킨은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공격을 피했다. 보통의 이종족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킨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잔재주였다. 그는 신이 이 세계를 만든 시간부터 오래도록 살아온 용이니까.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걸 보니 밀로와도 친분이 있는 듯한데. 걔한테 내 약점 못 들었어?”

    “…….”

    “여긴 우리가 살던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능력과 힘의 제약이 커. 그나마 밀로는 좀 나은 형편이지. 놈은 우리 중 가장 강하니까.”

    “피시. 먼저 성으로 돌아가.”

    “하지만……,”

    “용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 넌 돌아가서 혼자 연습해.”

    패티스의 서늘한 말에 피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두 형제의 모습을 킨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쟤 형이야?”

    “…….”

    “아님 쟤가 네 형인가?”

    사라져 가는 피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킨이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대답이 아니라 뜬금없는 무차별 공격이었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다시 하늘 위에서 바위와 딱딱하게 뭉쳐진 흙덩이가 킨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뭘 확인하고 싶어서?”

    흥분할 법도 했지만 이까짓 공격은 우습다는 듯, 용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또다시 패티스의 공격을 피해 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동 능력이 있는 건 아닐 테고. 어떻게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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