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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3화 (373/488)
  • 373화

    “왜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엘.”

    “…….”

    “백작. 그대가 폐하께 금서의 내용을 알려 준 건가요?”

    “예. 오드 님.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정확한 내용도 아니었을 텐데요.”

    “로빈을 제도로 불러 확인했습니다. 물론 그 뱀도 완전한 내용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부분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오드. 넌 내게 이온을 살릴 수 있다고 확언했어. 내가 준비할 건 오로지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타이곤의 갈기뿐이라고.”

    “…….”

    “그 외는 네가 준비하겠다고.”

    역시 그 세 가지는 황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제물이었던 모양이군. 패티스는 말을 보태지 않고 두 사람이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뒤로 빠졌다.

    “그랬지. 맞아, 나머지는 내가 다 준비한다고 그랬어.”

    “부디 내 추측이 억측이길 바라.”

    “엘. 내 선조들은 너와 이온을 지키기 위해 신탁을 거짓으로 말했고, 그로 인해 모두 멸족했어.”

    “…….”

    “이상하지 않아? 왜 나만 이렇게 살아남았는지. 엘, 넌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거니?”

    이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이렇게 모든 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결되어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죽을 뻔한 오드와 죽은 시체를 바꿔치기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린 꼬마 둘이 무슨 수로 나자르를 숨겨 줄 수 있었겠는가. 애초에 신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오드 넌…….”

    “응. 나는 나 혼자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

    “…….”

    “엘, 네가 살아남은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패티스는 반년 전에 오드가 제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인간들이 나자르들을 몰살시키려 했을 때, 나자르들은 힘이 약하고 멍청해서 공격을 막지 못했던 게 아니라고. 모든 게 신의 뜻이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오드 자신은 ‘끝내 신이 버리지 못한 인간’을 위해 살아 있는 거라고.

    “그게…… 나와 이온이었구나.”

    “그래. 사실은 확신하지 못했어. 그리고 지금도 모르겠어. 신탁의 주인공이 너인지, 이온인지.”

    “…….”

    “어쩌면 너희 둘 모두일 수도 있고.”

    오드는 아득했던 기억을 헤집어, 2차 전쟁이 터졌던 그날을 떠올렸다. 당시 이온은 노아의 공격을 받았고, 이엘은 르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숨이 다하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오드는 직감했다. 이 두 사람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내야 한다고. 신탁은 이 순간까지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어. 너는 살렸지만, 끝내 이온을 살리진 못했으니까.”

    “…….”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야. 그마저도 내가 없으면 이온은 죽겠지.”

    “아직까지도 네가 살아 있는 이유는…… 그러니까, 오드. 네 종족은 모두 죽었지만 아직도 네가 살아 있는 이유는 말이야…….”

    “응, 맞아. 우리 나자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종족이었어. 신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을 직접적으로 보살필 수 없어 보낸, 너희를 위한 선물.”

    “…….”

    “너희가 타락하기 전엔, 너희가 신을 버리기 전엔 말이야. 엘, 그땐…… 너희를 위해 대신 죽기도 했단다.”

    그러니까 괜찮아, 나의 엘. 나의 소임은 너와 이온을 지키고, 내 목숨을 방패로 삼아서라도 너희를 지키는 일이야. 애초에 나자르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러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거니까.

    “내 목숨으로 이온을 살릴 수 있어.”

    “……아냐. 아니야. 그건 안 돼.”

    “엘.”

    “싫어. 그게 싫어서 내가 ‘그’의 손을 잡았던 것 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엘이 고개를 흔들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녀는 저를 따라 일어선 오드를 밀어내듯 손을 뻗으며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그걸 숨길 수 있어? 그럼 내가 포기하지 않고 그것들을 찾아왔으면. 그럼 넌 네 목숨과 이온을 바꿀 생각이었어?”

    “응.”

    “뭐? 지금 응이라고 했어?”

    “응. 나의 엘. 난 당연히 그랬을 거야.”

    할 말을 잃은 이엘이 오드를 허망하게 쳐다봤다. 왜? 신탁을 지켜야 하니까? 아직도 신탁의 주인공이 나인지, 이온인지 알지 못하니까? 그래서 넌 네 목숨을 희생해 이온을 살리려는 거야?

    “나자르의 소임 같은 건 난 몰라. 난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온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엘.”

    “됐어. 어차피 이젠 필요 없는 조건이었잖아. 오드 넌 더 이상 그거 생각하지 마.”

    패티스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이젠 필요 없는 조건이라고? 그녀는 제 쌍둥이를 살리려는 마음을 완전히 접은 건가?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패티스를 충격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내가 ‘그’와 거래를 했으니까. 내 목숨으로 이온을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오드 넌……,”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폐하의 목숨으로…… 누구를 살린다고요?”

    여태 대화를 듣기만 하던 패티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의 대화는 자신과 큰 관계가 없었다. 그녀의 쌍둥이인 황자가 살아 있다는 건 충격이긴 했지만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세 가지 제물이라 해 봤자, 하이에나인 자신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고.

    그러나 오드가 그 황자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대목에서부턴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꼈다. 거기에 방점을 찍은 건 이엘이 제 목숨으로 황자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폐하. 제가 지금 오해하는 거겠죠?”

    “아니. 제대로 들었어.”

    “그러니까 그게 왜…… 왜요?”

    “…….”

    “왜 폐하께서 그 황자를 살리기 위해 그런 일을 해야 합니까?”

    “그대도 조금 전에 그랬잖아. 조이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라고.”

    “저와 폐하가 같습니까?”

    “왜 다르지?”

    “…….”

    “그대는 그대의 목숨과 맞바꿔서 조이나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럴 것 아닌가?”

    왜 하필 이 질문을 제게 하십니까? 차라리 늑대나 뱀에게 했더라면 가차 없이 아니라는 대답을 했을 텐데. 종족애가 남다르고 형제애가 각별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금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에서 형제가 죽었는데, 그 형제를 되살릴 수 있다면 이엘이나 자신이나 선택은 똑같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지만 폐하……. 제발 그 마음을 접어 주십시오. 조금 전에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드 님의 희생을 원치 않으신다고요.”

    “백작.”

    “그 마음이 제게도 동일하다는 걸, 왜 알면서 모른 체하십니까?”

    “패티스. 진정해. 우선 자리에 앉자.”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진정시켰다. 자신이 알게 된 이래로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패티스는 처음이었다. 그가 제게 순종적이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까지 매달리는 건 아니었는데.

    아마도 조금 전 자신의 말이 그를 동하게 한 걸지도 모른다. 조이나의 이야기를 괜히 꺼냈나, 아주 잠깐 후회했다.

    패티스는 자리에 앉는 그 짧은 순간에 수만 가지의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부터, 어떻게 하면 그 황자를 먼저 처리해서 일 자체를 무를 수 있을지까지. 그 안엔 끝내 자신이 그녀를 설득하지 못해, 주군이 바뀌게 되는 결말까지 함께였다.

    “설마 폐하께서 계속 부정적인 여론을 만드셨던 게…… 황위를 그 황자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던 건 아니었겠지요.”

    “…….”

    “폐하. 정말로…… 정말로 황자를 살려 그에게 황위를 양위하실 계획이셨습니까?”

    목소리 끝이 떨리기까지 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앤디와 나눴던 불안한 예감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이엘이 황위를 고집하여 제국을 건국했지만, 그녀의 고집은 거기서 끝이었다. 황제가 된 순간부터 황위를 고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언젠가는 훌훌 떠날 것 같다는 앤디의 말처럼, 황위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응. 그랬어.”

    “폐하. 대체 왜…….”

    “그 애는 내 전부였어. 이온이 나였고, 내 이상향이었고, 내 세상이었어. 불행히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투영하는 게 혼탁한 황궁 생활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아. 살기 위해……. 그녀의 불우했던 과거를 아는 패티스로서는 더 이상 캐물을 수 없는 주제였다.

    “나는 살고 싶었지만, 살고 싶지 않았고. 죽고 싶었지만, 죽고 싶지 않았어. 내 양가적인 마음을 그대는 모르겠지.”

    “…….”

    “하지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어. 그러니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예?”

    “살 거라고. 그깟 계약은 내가 어떻게든 깨뜨려서 살아남을 거야.”

    “…….”

    “그리고 그 세 가지. 그것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 그것에 관해선 백작도 그만 잊어. 금서의 내용은 이제 의미가 없어.”

    이엘이 웃으며 패티스를 안심시켰다. 단순히 그를 달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패티스의 말처럼 이 모든 게 짜여진 퍼즐판 위라면, 이 그림을 완성시킬 사람은 자신뿐이다. 신께서 선택하신 신탁의 주인공은 자신일 테니까.

    “어딘가 맹점이 있을 거야. 그 거래는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내가 눈치채지 못한 맹점이 어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폐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결의에 찬 패티스의 갈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엘이 심호흡을 길게 했다. 더는 숨길 수 없고, 숨길 필요도 없다. 어쩌면 패티스처럼 노아나 다른 사람도 이엘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노아가 돌아오는 대로 곧장 모여. 모두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테니, 그대도 아는 것을 전부 일러 주도록 해.”

    “예, 폐하.”

    “그리고. 그대는 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다.”

    이엘의 단호한 목소리에 패티스가 그녀에게 집중했다.

    “나와 내 아이를 살릴 방도를 획책해 내.”

    “명령이십니까?”

    “그래, 명령이야.”

    “…….”

    “나의 세 번째 그림자인 백작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명령이란 단어에 패티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주군의 명령이라면 무엇이 됐든 복종하는 종족의 습성을 이렇게 이용하시다니. 그녀가 완전한 하이에나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패티스의 얼굴에 빚은 듯한 아름다운 미소가 그려졌다.

    “명을 받잡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겠습니다.”

    반드시 해낼 것이다. 자신의 주군이 은밀하게 내린 명령을, 패티스는 반드시 해내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오드. 넌 나와 잠깐 얘기 좀 해. 패티스 백, 자리를 비켜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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