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알아야만 합니다. 패티스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제게 모든 걸 털어놓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던 이엘이 와인이 담긴 잔을 그러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 그대의 추측대로 나는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타이곤의 갈기를 찾고 있었어.”
“그 말씀은…….”
“응. 지금은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어졌거든. 그렇게 덧붙이며 와인으로 입가심을 했다. 패티스 역시 들고 있던 나이프와 스푼을 조용히 내려놓은 채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러곤 줄곧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을 내놓았다.
“로빈은 그 금서에서 세 가지가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
“생명을 살리는 일. 혹은 그 생명을 유지하는 일. 모든 것에는 마땅한 희생이 필요하며, 생명은 생명으로 치환되는 것 외에는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다, 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치환되는 것 외에는 해답이 없다고?”
“예. 로빈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을 불러들이는 도구로 쓰이는 제물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패티스의 말을 들은 이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세 가지를 구하려고 했던 건 오로지 이온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온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선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고, 그 외의 것은 오드가 준비하겠다고…….
“공작!”
“예, 폐하. 찾으셨습니까.”
그녀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르네가 문을 열고 다이닝 룸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드 님께 내가 뵙고 싶어 한다고 전달해 주게.”
“예, 폐하.”
명을 받은 르네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패티스는 안색이 창백해진 이엘의 얼굴을 살피며 저도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세 가지를 구하고 있던 건 맞지만 금서의 내용까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듯했다.
“폐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뭔데?”
“폐하께서 찾으셨던 세 가지는, 대체 뭘 위해서 찾으셨던 겁니까?”
“…….”
“폐하께서도 ‘그’를 만나기 위해 필요하셨던 겁니까?”
“아니. 난 원하는 때에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어.”
“그럼 왜……,”
“패티스. 조금 전에 그대가 내게 한 말을, 나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제가 폐하를 죽는 날까지 따르겠다는 그 맹세 말입니까?”
제 말에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패티스는 이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더니, 이내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와 간절히 바라보았다.
“목숨을 달라고 하셔도 드릴 것입니다. 다만 폐하의 안전이 확실해져야 저는 눈을 감을 수 있겠지만요. 폐하. 오랜 시간 저를 지켜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절 신뢰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신뢰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그대가 알면 충격받을 만한 비밀을 갖고 있어.”
“괜찮습니다.”
“…….”
“전 다 괜찮아요, 폐하. 설령 폐하께서 인간이 아니라 뱀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농담도 잘 치는구나.”
그제야 이엘이 웃었다. 그 미소에 패티스는 용기를 얻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 제게만은 꼭 말씀해 주십시오.”
“…….”
“미약하지만 폐하께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폐하의 고민을, 제가 함께 나누고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아나 하트처럼 전장에서 싸우지는 않더라도, 그녀에게 작은 지혜를 빌려줄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 3년을 그렇게 살았다. 이엘이 의견을 묻고 자문을 구하는 상대는 오드와 패티스가 유일했다.
“패티스. 그럼 내가 먼저 한 가지 물어볼게.”
“예, 폐하.”
“그대는 그대의 손윗누이인 조이나를 살려 낼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갑자기 조이나를?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패티스는 대답하는 것을 아주 잠깐 주저했다.
“그 질문이…… 지금 폐하의 상황과 비슷합니까?”
“…….”
“저는 살려 냅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 낼 거예요.”
결이 같다. 다른 이종족과 달리 하이에나는 그녀와 결이 비슷했다. 가족애. 특히나 암컷 형제를 향한 가족애는 인간의 것보다 더 강하다. 그러니 이 질문은 오직 하이에나에게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던 셈이다.
“역시 폐하께선 죽은 형제를 살려 내실 생각이셨군요.”
패티스는 로빈과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많은 가정과 가설을 세워 왔다. 만약 이엘이 정말 그 세 가지를 찾고 있다면 대체 뭘 위해서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금서에 따르면 생명을 살리는 일, 혹은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 주목적이라고 했으니 아마 선황이 ‘그’를 만나려 했던 건 불사가 목적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니엘은 다르다. 그녀는 선황처럼 오래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 전 제게 던져진 질문으로 패티스는 해답을 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인 황자를 살리려던 게 목적일 것이라고.
“왜입니까? 이미 죽은 자를 살리는 건 신의 흐름에 반하는 짓입니다. 폐하께선…… 그렇게까지 해서 황자를 살리고 싶으셨습니까?”
“그러게. 난 왜 그렇게까지 해서 이온을 살리려고 했을까.”
“…….”
“신의 흐름에 반하는 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살아난 이온이 이와 같은 세상을 반길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난 정말 어리석고 이기적이었어. 나만 홀로 겪어야 하는 고통이 억울해서, 신의 품으로 편히 가야 할 형제를 살려 내려고 했어.
“폐하.”
“하지만 아르세니온과 조이나는 차이점이 있어.”
“…….”
“조이나는 정말 죽었지만 아르세니온은 아니야.”
“예?”
“그는 살아 있어.”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하이에나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패티스는 이엘의 말을 듣고 순간 제 머릿속이 마비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내용이라.
“살아 있다니…… 폐하, 대체 무슨…….”
“16년 전, 2차 전쟁이 터졌던 그날.”
“…….”
“나와 아르세니온은 죽음의 끝에서 살아 돌아왔어.”
패티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 주먹을 쥐었다. 알고 있다. 두 쌍둥이는 황위계승권을 가진 자였고, 누구보다 먼저 죽음을 맞았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황족의 경우 가장 강한 우논들이 각각 한 명씩 맡아 처리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 틈에서 살아 나갈 순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여자였기에 몸에 인식표를 갖고 있던 황녀는 더더욱.
그러나 살았다. 인식표를 제거하면 죽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르네의 검으로부터, 그리고 인식표의 독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그 때문에 패티스도 어렴풋하게 그녀가 살아난 것이 오드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오드 님께서……,”
“응. 오드가 나와 이온을 살렸지.”
“하지만 그건 신의 뜻에 반하는…… 설마 신탁이……?”
“그래, 맞아. 조금 전에 그대가 내게 알려 주었던 마지막 신탁. 다음에 태어날 아이가 신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라고.”
“그래서 폐하께서 살아 계신…… 잠깐만요, 폐하! 그럼 지금 황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안전한 곳에 있어.”
“…….”
“숨은 쉬지만, 우리처럼 이런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야. 말 그대로 살려 두었을 뿐.”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드와 르네인 듯했다. 들어오라는 이엘의 허락에 오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저를 찾으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오드 님. 여쭤볼 말씀이 있어 뵙기를 청했습니다. 안쪽으로 오세요. 공작은 밖에서 대기하고, 패티스 백은 나를 따라오게.”
“예, 폐하.”
패티스는 그녀의 명령에 불만을 갖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르네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급하게 오드를 불러왔다는 건 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 텐데, 사실상 그 자리에 초대받지 않았다는 의미의 축객령일 텐데도 독수리는 평소처럼 명령에 순종할 따름이었다.
“패티스. 거기서 뭐 해? 들어와.”
“예, 폐하.”
이엘의 음성에 정신을 차린 패티스는 서둘러 그녀와 오드를 따라 쪽문을 넘어 안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다이닝 룸 안쪽에 있는 내실은 성인 대여섯 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작고 협소했다. 원래는 전쟁이나 바다로부터 습격을 당할 때, 가장 약한 개체와 승계권을 가진 어린 암컷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지만 정작 가장 필요했던 2차 전쟁 땐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곳이었다.
패티스는 아주 어릴 때 들어온 뒤로는 이곳에 온 적이 없던 탓에 이엘보다 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얀 벽을 손으로 쓸며 걷던 패티스는 그녀의 손짓을 따라 생각을 정리하고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만 모이는 건 오랜만이네요.”
오드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는 건지 웃으며 안부를 건넸다. 패티스는 오드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고 이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금서의 내용을 알게 됐어.”
“금서의 내용이요?”
“그래. 전에 뱀의 영지를 습격할 때 앤디가 뱀에게서 뺏어 왔던 그 종이.”
“…….”
“오드, 네가 내게 보여 줬던 그 타다 만 종이 말이야. 네 침실에 있는 걸 앤디가 다시 갖고 왔고, 그걸 너도 알고 있다며.”
“맞아요. 앤디 경이 갖고 있는 걸 봤습니다. 패티스 백, 당신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
“예, 오드 님.”
오드는 패티스의 대답을 들으며 아주 잠깐 눈을 감고 과거를 회고했다. 인간의 시간으로 따지면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이온으로부터 구해져 황궁에서 몰래 살았고, 전쟁 속에서 두 쌍둥이를 구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역시나 둘 모두를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오드는 제 심장께를 꾹 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느끼며.
“오드. 지금부터 내가 네게 묻는 것에 관해 빠짐없이 대답해 줘.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그러겠습니다, 폐하.”
“아주 오래전에. 네가 앤디에게서 그 종이를 받아 왔다고 내게 말했을 때. 네가 내게 했던 말 기억해?”
“제가 어떤 말을 했나요?”
“위험한 일이라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니 쉬울 리 없다고. 언제나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고. 분명 그렇게 얘기했어.”
이엘의 말에 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어린 그녀가 걱정할까 손에서 종이까지 빼앗으며 그렇게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게…… 네 목숨과도 관련 있어?”
어렵게 내뱉은 이엘의 말끝이 떨렸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치환된다는 금서의 내용 때문에 오드를 부른 것이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생명으로만 치환이 가능하다는 건 도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