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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1화 (371/488)
  • 371화

    동시에 원래 이 역할을 맡았어야 할 알폰스의 모습을 잠깐 떠올렸다. 역시 막판에 바꾸길 잘했다. 알폰스였다면 올리세스를 속일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커다란 덩치로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 가다가 올리세스에게 말렸을지도 모르지.

    쯧. 속으로 혀를 찬 안드로는 뒤따라오는 올리세스를 확인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

    “날 애태우게 하려는 게 목표였다면 아주 훌륭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네.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해, 목이 빠져라 기다렸으니까.”

    로빈이 웃음을 머금은 채 노아를 향해 손짓했다. 노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하이에나의 영지에 도착해 그녀의 안전을 맡긴 뒤, 그는 부지런히 달려 뱀의 영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런 노아의 방문을 꽤 긴 시간 기다리고 있던 로빈이 친히 마중까지 나와 성 안으로 안내했다.

    “네가 폐하와 함께 내 영지를 떠나자마자 사라졌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어디서 뭘 한 거지? 올리세스를 만나러 간 게 아니었나?”

    노아는 답지 않게 본론부터 꺼내 드는 로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확실히 지금 관계에서 불리한 쪽은 로빈이다. 모든 걸 확신하게 된 자신과, 모든 걸 추측할 뿐인 로빈. 둘 중 우위를 점한 건 노아였다.

    “뭐가 그렇게 성급해?”

    “…….”

    “난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다고. 리플이라고 했나? 찻잔이 비었는데 차를 좀 따라 주겠나?”

    “리플. 따라 드리거라.”

    “예.”

    로빈의 뒤에 서서 제 주인을 든든히 지키고 있던 리플이 다가와 노아의 잔에 차를 따랐다. 노아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제 그쪽 팔은 아예 못 쓰는 건가?”

    “…….”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긴 채 즐거운 이야기라도 된 양, 노아는 리플의 약점을 건드리며 웃었다. 그에 응접실 안은 정적이 흘렀다. 차를 쪼르르 따르던 리플의 손이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그는 곧 마음을 정리하곤 차를 따르는 것을 깔끔히 마무리했다.

    “예, 각하. 그렇습니다.”

    놈이 주드를 죽이고 이엘로부터 얻은 상처였다. 그걸 굳이 들춰 내며 로빈을 압박하는 것이다. 네가 정말 폐하의 편에 선 게 맞냐는 의미로.

    “노아. 지금 그 얘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가……,”

    “궁금하지?”

    “…….”

    “내가 정말 올리세스의 영지에 가서 리노 윌터를 만났는지.”

    “그래. 궁금해.”

    로빈은 그렇게 답하며 리플을 향해 나가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는 제 주인의 명령대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노아.”

    “어차피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네게 진실을 말할 리 없다는 걸.”

    “…….”

    “그냥 넌 내 반응으로 네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잖아. 네 추측이 맞다면 내가 조급한 마음으로 너부터 찾았을 테니.”

    “……그래, 맞아.”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의 말에 긍정했다. 정말 리노가 살아 있고 렉토스의 말처럼 선황이 ‘그’를 만나려 했다면…… 노아는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 심각한 사안을 나누고 해결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일 테니까.

    “근데 당황했지? 내 표정이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서.”

    “…….”

    “네 말처럼 리노가 살아 있고 선황의 일이 사실이라면 폐하가 위험할 테니, 난 올리세스를 만나자마자 곧장 널 찾으러 왔겠지.”

    “노아. 지금 네 말의 뜻은…….”

    “리노는 살아 있어.”

    역시……. 노아의 말에 로빈의 눈동자에 아주 잠깐 이채가 어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네 추측과 기대와는 달리, 놈은 형편없는 상태야.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니까.”

    “놈이 올리세스의 영지에 있나?”

    “그건 대답해 줄 수 없다. 어차피 곧 내가 빼돌릴 생각이니까.”

    “뭐?”

    “로빈. 내가 이렇게 굳이 널 찾아온 건 네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야.”

    노아가 내뱉은 기회라는 단어에 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해. 왜 보호석을 수거하고 있는지.”

    “…….”

    “대체 소모라 땅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역시 내가 보호석을 수거하고 있다는 걸 아는군. 로빈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노아의 예리한 눈빛을 마주했다.

    “인간도 아닌 네가 보호석을 가져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대체 무슨 목적으로 보호석들을 수집하는 거지? 발동시키지도 않는 것 같은데.”

    파팍! 바닥에서 솟아오른 얼음이 노아의 손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이렇게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건 현재도 보호석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몇 달 전에 이엘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을 때, 보호석의 발동을 느낄 수 있는 오드마저 이곳엔 보호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명 수거된 보호석들은 소모라에 쌓여 가고 있다.

    “내가 그걸 얘기하면, 넌 내게 뭘 알려 줄 거지?”

    “글쎄. 그건 생각해 보고?”

    “…….”

    “알다시피 난 아쉬울 게 없어서.”

    로빈은 평온한 표정의 노아를 쳐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자신에게서 들은 그 충격적인 소식으로 골골대던 늑대 놈이었는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건가?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전부 억측이라는 건가?

    그러나 곧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아주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 증거로 제도에 있던 패티스가 금서를 발견해 자신을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지금 노아는 거짓말을 꾸며 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위를 점한 게 노아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노아의 말과 달리 정말 리노가 제정신이라 모든 진실을 털어놨다면 더 많은 정보량을 갖는 건 노아일 테니까. 심지어 리노를 빼돌릴 것이라 선언하기까지 했다.

    놈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로빈과는 달리, 노아는 결단력과 결정력까지 갖고 있다. 저 늑대는 그곳에서 뭔가를 보고 온 게 틀림없다.

    한참 고민하는 듯하던 로빈이 길게 이어진 침묵을 깨고 무겁게 운을 뗐다.

    “보호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나?”

    뜬금없이 보호석이 만들어진 이야기를 왜 꺼내지? 노아는 로빈이 또 어떤 헛소리를 늘어놓을지 모르니 경계할 생각으로 그의 질문을 반쯤 흘려들었다.

    “나자르가 만들었다는 것 말고는.”

    “맞아. 나자르의 생명과 성력을 쏟아 내어 만들었지.”

    “…….”

    “결국 그 얘기는 지금의 나자르가 완전하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해. 보호석으로부터 생명과 성력을 빼앗긴 거니까.”

    로빈의 하는 이야기는 노아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보호석이라는 건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이 허락하지 않은 이물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신의 대리자라는 나자르가 만들었다. 그로 인해 나자르는 멸족하게 된 것과 다를 바 없다.

    “오드 님은 보호석을 파괴할 수 있지?”

    “그래.”

    “그럼 흡수하는 건 어떨까. 불가능할까?”

    “뭐?”

    로빈의 황당한 가설에 노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미친놈이다. 애초에 뱀과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뱀은 믿을 만한 존재도,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종족인데.

    “그냥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지. 난 돌아가겠다.”

    “난 나자르가 보호석을 흡수한다면 지금보다 더 완전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헛소리. 보호석은 성력으로만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이물질로 불리는 것이다. 이미 불결하고 더러워진 흉물스러운 존재라고.”

    “뭐, 그건 그렇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저 간교한 혀에 내가 말린 건가. 벼랑 끝으로 몰리니 특유의 속살거림으로 꾀어내는 게 틀림없다. 별 소득 없이 돌아가는 건 찝찝했지만 이제 뱀에게서 더 얻을 게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노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됐어. 네놈을 믿어 보려고 했던 내가 멍청이지.”

    “걱정 마. 오드 님을 상대로 실험을 벌일 생각은 없으니까.”

    “대답할 가치도 없군.”

    “최근에 있었던 귀족회의에서 내가 아주 재밌는 걸 찾아냈거든.”

    나가기 위해 응접실 문고리까지 잡았던 노아의 걸음이 멈췄다. 최근에 열린 귀족회의는 그녀를 대신해 패티스가 주최했던 그 회의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나자르는 어떻게 찾아낸 거야?”

    “뭔 헛소리야.”

    “내가 모를 것 같아?”

    “…….”

    “제도에, 오드 님 말고 나자르가 한 명 더 있잖아.”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오드는 현재 이엘과 함께 있으니 제도엔 나자르는커녕 성력을 쓸 수 있는 존재도 없을 텐데. 기껏해야 오드에게서 성력을 빌려 쓰는 성전기사단 정도가 다일…… 아. 알겠다.

    노아는 로빈을 등진 채 한숨을 집어삼켰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꽤나 오랫동안 숨겨 왔던 것 같은데.”

    스완이로군. 어쩌다 스완의 정체를 눈치챈 모양인데……. 문제는 그게 패티스와 스완의 의도적인 미끼였는지, 아니면 예상치 못하게 로빈에게 들킨 건지를 노아로서는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 제도에 들러서 확인해야 할 듯하다.

    “아까부터 뭔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 나자르를 나한테 줘.”

    “…….”

    “그 대가로 알려 줄게. 내가 소모라 땅에서 뭘 하려는지.”

    로빈은 노아가 그 나자르를 숨기고 있는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돌아서 마주한 로빈의 얼굴엔 조금 전의 조급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

    이엘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스푼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반응을 즉각 알아챈 패티스가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

    “…….”

    패티스를 보는 게 오랜만인 건 이엘만이 아니었다. 하이에나들 역시 자신들의 영주를 반년 만에 만나는 터라 화려한 연회를 열고 싶어 했으나, 패티스는 그것들을 미루고 이엘과 단출한 식사 자리를 청했다.

    애초에 제도를 지키라는 그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이곳에 온 패티스다. 은밀하고 급하게 전해야 할 소식이 있기 때문이란 건 이엘도 짐작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낼 줄은…….

    “그 사실을 누구누구 알고 있지?”

    “일단 앤디 경과 저, 그리고 스완과 피시, 로날드입니다.”

    “…….”

    “더는 폐하께 속이고 싶지 않아서 솔직히 고합니다.”

    그랬구나. 그 금서가 황궁도서관에 있었구나. 그곳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모르는 새에 로빈이 그 금서를 도서관에 두고 간 듯했다. 그리고 그 책을 꺼내 읽은 건 패티스와 스완이었고.

    늑대의 기름, 독수리의 눈알, 타이곤의 갈기. 결국 그것들을 모두 알아냈구나. 이엘은 아주 잠깐 침묵하며 눈을 감았다.

    “폐하. 저는 죽는 날까지 폐하만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인생의 유일한 주군은 오직 폐하뿐이십니다.”

    “…….”

    “단지 암컷을 섬긴다는 종족의 습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스완과 접촉하는 용의 암컷에게도 집착했을 테니까요. 제겐 폐하뿐입니다.”

    “…….”

    “그러니 제게만은 진실을 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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