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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0화 (370/488)

370화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밀로에겐 최강의 아군이었다. 킨이 있었기 때문에 그 대단한 동족들을 반 정도 해치우고 내려올 수 있었던 거니까. 그리고 그곳에 남겨 두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지는 지상으로 데려와 감시하는 편이 더 나았다.

“폐하껜 허튼짓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어.”

“퍽이나 그 약속을 지키겠군. 넌 참 낙관적이네. 난 그놈이 폐하께 해를 끼칠까 벌써부터 두려운데.”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어쨌든 킨이 폐하를 해칠 일은 없어. 내가 그렇게 두고 보지도 않을 거고. 다른 곳이면 몰라도 여기서 나와 일대일로 붙으면 자기가 진다는 걸 킨도 알고 있으니 함부로 나서지도 않을 거야.”

“…….”

“그러니까 스완이랑 암컷을 지켜. 그거 말하려고 했던 거니까.”

그 말을 들은 패티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밀로는 멀어져 가는 패티스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아무도 없는 정원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고민해 봤다. 이엘이 암컷 용의 능력 안에 사람을 숨기는 게 가능하냐고 물어봤던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물론 가능하다. 그게 용의 암컷이 가진 능력이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장시간 꿈속에서 사는 건 어려울 텐데……. 기껏해야 현실의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도피처 정도일까.

게다가 암컷 용의 능력이 불완전한 상태라면 영원히 꿈속에 갇힐 수도 있다. 성력을 쓸 수 있는 나자르라면 다시 현실 세계로 빼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암컷의 능력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제약이 많다. 특히 다른 종족이면 몰라도 동족이지만 성별이 다른 킨과 자신은 절대로 암컷의 능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탓에.

아니지. 버림받은 게 아니라 우리가 신을 떠난 거였지……. 밀로는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제 품 안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나머지도 수거하러 가야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은한 달빛에 비추어 본 것은 며칠 전에 킨이 이엘에게 보여 주었던 용의 비늘이었다. 빛이 약한 곳에선 밤하늘도 집어삼킬 듯한 새카만 색이지만 빛이 통과하는 순간 투명하게 변한다.

“근데 그 또라이는 이걸 엘에게 왜 준 거야?!”

갑자기 킨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민다. 그녀에게 주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 비늘 자체가 너무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보호석과 비슷한 의미다.

단 한 번도 인간이나 다른 종족의 손에 넘어간 적이 없는 비늘이, 이엘의 손에 넘겨졌다. 그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밀로는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게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설렘이 일었다. 그녀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쓸 수도 있는 거고, 혹은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쓸지도 모르니까. 어찌 됐든 기왕 손에 들어간 거니 모쪼록 이익을 안겨 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그렇게 한참 비늘을 쳐다보던 밀로는 복잡한 머릿속을 다 비워 내고 콧노래를 부르며 밤 산책을 시작했다.

*

“어서 오십시오, 윌터 남작님.”

“따뜻한 환대 고맙소. 근데 공작님은 안 계시는 것이오?”

“공작님께선 폐하의 영지 시찰에 동행 중이시니, 당연히 이곳엔 안 계십니다.”

“아아, 그렇군. 역시 공작님께선 참 충직하시군그래.”

알폰스의 대꾸에 웃으며 대답한 올리세스는 처음 밟아 본 늑대의 영지 곳곳을 구경하듯 살폈다. 그토록 염원하던 늑대의 영지에 들어왔지만 썩 만족스러운 기분은 아니다. 정작 올리세스가 만나고 싶었던 노아는 이곳에 없었으니까.

올리세스는 노아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영지에 찾아왔던 그 늑대는 급한 일이 생겨 떠난다는 종이만 남겨 둔 채 얼굴도 비치지 않고 사라졌다. 어쩌면 그에게 추적과 감시를 붙여 두려는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리세스는 주변을 은밀하게 둘러보았다. 노아는 정말 황제의 곁에서 함께 시찰 중인 걸까? 여기에 있는 게 아니고? 미심쩍었지만 알폰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그래도 조금 아쉽군. 각하와 직접 만나서 거래를 하고 싶었는데.”

“노아 님께 듣기론, 우리 종족과 거래를 성립하는 게 남작님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시던데요.”

우직한 알폰스의 말에 올리세스의 얼굴에 아주 잠깐 균열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확실히 자신들의 방문을 맞아 준 데다가 노아와 했던 말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현재 노아가 황제의 곁에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왜 자꾸만 그가 그곳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그렇다고 여기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늑대 공작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래, 맞소. 공작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난 그저 친교의 목적으로 온 셈이지. 괜찮다면 경이 성 안을 안내해 줄 수 있겠소?”

“안내는 내가 하도록 하지.”

대답이 들려온 건 알폰스의 뒤쪽이었다. 올리세스는 소리 나는 쪽을 응시했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윌터 남작. 반갑소. 영지를 비우신 공작님을 대신해 업무를 보고 있는 안드로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인 듯하군.”

“아아. 안드로 백작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이 굵직하고 또렷한 노아와는 달리, 안드로는 선이 곱고 창백한 미형의 남자였다. 그를 처음 만난 올리세스는 아주 잠깐 넋을 놓은 채 쳐다보고 말았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안드로는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곤 그를 안내하기 위해 주변을 물렸다.

“남작은 일단 날 따라오고, 다른 자들은 알폰스 경이 안내해 주도록.”

“예, 안드로 님.”

명을 받은 알폰스가 올리세스의 일행을 데리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문 앞에 둘만 남겨졌고, 안드로는 살짝 고갯짓을 하며 올리세스를 성 안으로 들였다.

“노아 님으로부터 그림 선물 잘 받았소. 덕분에 성 안이 화사해지고 따뜻해진 듯하오.”

들어서자마자 안드로가 옆으로 자리를 비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곤 정면에 걸린 커다란 액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붉은 장미가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몇 달 전에 자신이 노아에게 선물했던 그 그림이 성을 장식하고 있었다.

“백작님께서도 원하시는 그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제게 말씀하십시오. 화친의 선물로 기꺼이 드릴 수 있답니다.”

“내가 이런 그림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이 그림을 보자마자 범상치 않다는 걸 단번에 느꼈소.”

“그러셨습니까? 그림의 가치를 알아봐 주셨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궁금함에 묻는 것인데, 남작이 직접 그린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올리세스는 살짝 당황한 건지 대답이 조금 느렸다. 안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말 순수한 궁금증에서 기인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올리세스는 헛기침을 하고는 웃으며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 아버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쪽에 관심이 많으셨던 터라, 영지 내에 예술 쪽으로 뛰어난 장인들이 많답니다.”

“그랬군. 역시 이 그림은 장인의 솜씨였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혹 원하시는 그림이라도……,”

“그 장인이란 사람을 만나 볼 수 있겠소?”

“그를 직접 보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맞소. 괜찮다면 직접 그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좀 어려운 부탁이오?”

뜬금없는 안드로의 부탁에 올리세스가 고민에 빠졌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루벤이다. 과거 궁정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현재 일라이저 러셀의 영지에 조카와 함께 세작 노릇을 위해 잠입해 있는 상태였다. 루벤을 데려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안드로는 노련한 자였다. 게다가 오래 살기도 했고. 과거 1제국 때도 늑대는 공작 가문으로 황궁을 자주 오갔을 테니, 혹 입궁했던 안드로가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루벤을 만난 적이 있다면……. 그림 쪽에 관심이 있다면 그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게 된 것이다.

“남작이 그렇게까지 꺼리니 이 그림을 그렸다던 화가의 존재가 몹시도 궁금해지는군.”

“꺼리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고많은 화가 중 하나인지라, 백작님께서 마주하셔도 기대에 못 미칠 거라 생각한 탓입니다.”

“그 판단은 내가 내리오. 이 그림은 하고많은 화가들 중 하나가 그린 게 아닐 텐데. 겸양을 보이는 건가? 아니면 그를 숨기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백작님, 그건……,”

“알겠소. 그대가 그렇게 꺼리는데 밀어붙이는 건 도의가 아니지. 내가 마음을 접겠소.”

올리세스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어쩌면 이게 좋은 기회였을지 모르는데……. 그는 곧장 관심을 접고 돌아선 안드로를 재빨리 불러 세웠다.

“안드로 님!”

“무슨 일이오?”

“알겠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오?”

“예. 화친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소. 노아 님께서 방문을 허락하신 손님에게 강요를 할 마음은 없으니까.”

“아닙니다. 다만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올리세스가 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안드로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아까 안드로 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그림을 그린 자는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알고 있소.”

“과거 제국에서도 꽤나 실력이 뛰어났던 자니까요.”

“…….”

“그러니까 제 말은…….”

“대가 없는 만남을 주선하기는 싫다는 뜻이오?”

“맞습니다.”

“알겠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겠소.”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안드로를 바라보던 올리세스가 한쪽 팔을 펼쳐 조금 전에 자신이 들어왔던 문 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제가 오늘 가져온 그것들.”

“…….”

“진지하게 살펴보시고 영지 내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

“은밀한 청탁이라고 느끼셔도 됩니다. 맞으니까요.”

이상하리만큼 이종족 내로 포필렌이 퍼지질 않는다. 마치 누군가 꽉 잡고 막아 내는 것처럼. 그래서 올리세스는 그 시작점이 되는 곳을 이곳, 늑대의 영지로 삼을 계획이었다.

“부디,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결정권은 내게 없소.”

“그럼…….”

“하지만 노아 님께 말씀드릴 만한 힘은 있지.”

올리세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걸, 안드로는 놓치지 않았다.

“괜히 남작의 사업 수완이 좋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군.”

“과찬이십니다. 그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럼 이 일에 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볼까?”

안드로는 제 말에 기쁜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올리세스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응접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역시 욕심밖에 없는 인간은 속여 먹기 쉽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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