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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69화 (369/488)
  • 369화

    솔직히 2차 전쟁 때 다른 이종족들의 계획을 망치고 뱀과 손을 잡아 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던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로빈은 적과 아군은 구분할 줄 안다. 하지만 용이란 작자들은 동족이란 개념도 없는 자들이다.

    게다가 그 개체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능력치는 보통의 이종족을 뛰어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이렇게 개체수가 많아지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돌아가라고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가 드레인을 만나고 싶어 해.”

    “……암컷이 있다는 걸 알게 됐군요.”

    “그래, 맞아.”

    “그녀를 찾기 위해 온 건가요?”

    “그건 아니야. 드레인의 존재는 여기 와서 알게 된 거니까.”

    패티스가 아주 잠깐 고심하는 듯했다. 사실 드레인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심지어 패티스조차 그녀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현재로선 드레인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스완이 유일했다.

    “그가 드레인을 만나려면 스완이 필요할 텐데,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스완은 보여 주지 않을 거야. 그건 걱정 마. 그에게도 이미 말해 뒀어. 노력은 해 보겠지만 쉽진 않을 거라고.”

    “폐하께선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반반이야. 킨이, 그러니까 그 용이 드레인을 만나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반.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반.”

    어느새 성 앞에 도착했다. 그곳엔 소식을 전해 들은 여러 종족들이 패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하이에나들은 환하게 웃으며 오랜만에 마주한 자신들의 영주를 맞았다.

    “백작님. 귀환을 환영합니다.”

    “그래. 근위대장은?”

    “쉬고 계십니다.”

    “내가 쉬라고 했어. 하트 경이야말로 휴식이 필요하니까.”

    이엘이 변명하듯 우논의 말을 빠르게 이어받으며 패티스에게 설명했다. 그녀의 모습에 패티스는 한없이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 근위대장을 책망하겠습니까. 폐하의 하나뿐인 검인걸요.”

    그 대담한 발언에 하이에나들의 어깨는 위로 올라갔고, 다른 종족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이런 때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지 모르겠다는 낯이었다.

    “그럼 안에 들어가서 얘기를……,”

    “오, 그쪽이 여기 영주?!”

    위쪽에서 들린 우렁찬 목소리에 이엘은 이마를 짚었고, 늑대들은 익숙하다는 듯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 패티스는 호기롭게 저를 부른 놈의 정체를 알기 위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푸른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 나부끼는데도 아랑곳 않고 남자는 저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말씀하신 용들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신세 좀 지고 있습니다. 반가워요!”

    “폐하. 저건 밀로라는 놈입니까? 아니면 킨이라는 놈입니까?”

    “밀로. 쟨 밀로야.”

    “그렇군요. 밀로라면…… 폐하의 친구라고 하셨으니 무례는 모른 척해야겠네요.”

    “미안해, 패티스. 내가 잘 얘기할게. 한동안 안 저러다가 또 왜 저럴까…….”

    진심을 다해 난처한 듯 대답하는 이엘 때문에, 패티스는 조금 전에 느꼈던 불쾌함을 말끔히 지워 버렸다. 폐하께서 곤란하신 건 제 쪽에서 사양이다.

    “들어가시지요, 폐하. 날이 춥습니다.”

    “응. 그러자. 미르. 너도 그만 들어가. 그렇게 밖으로 고개 내밀다가 떨어지지 말고.”

    “우리 폐하는 내 걱정만 한다니까.”

    아치형으로 난 창에 몸을 반 정도 내민 채 그녀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고 있던 밀로가 능글맞게 웃으며 윙크했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위인이란 걸 잘 아는 이엘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무시하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 모여 있던 자들도 전부 그녀의 뒤를 따라 향했다.

    홀로 남은 패티스만이 밀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영주님?”

    “그 눈빛이 꽤 익숙해서.”

    패티스의 대답에 밀로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리하시군요? 맞아요. 전에 제가 이런 눈빛으로 당신을 주시했죠.”

    “…….”

    “그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든요. 제가 한눈팔다가 폐하께서 큰 상심을 입으신 적이 있어서.”

    지금에야 웃으면서 하는 얘기지만, 그땐 밀로도 심각한 상태였다. 늑대의 영지에서 열렸던 귀족회의 때 그녀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새에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 주드를 잃었다.

    “영주님께서도 동의하시겠지만 늑대 공작께선 공사가 다망하신 터라, 폐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녀가 뱀의 영지에서 탈출해 이곳 하이에나의 영지로 도피했을 때, 밀로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지켰다. 그녀를 지킬 뿐 아니라, 그녀가 소중히 생각하는 것들까지 모두 지키기 위해. 물론 그 탓에 이엘에게 자신이 용이란 사실을 들키긴 했지만.

    “내 눈엔 늑대의 공작이나 너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넌 가장 중요한 시기에 폐하를 버리고 네 종족에게로 돌아갔잖아.”

    패티스의 서늘한 말투에 밀로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 그런가요? 라는 다소 건조한 대답을 내뱉고는 창틀을 손으로 짚더니 순식간에 창을 넘어 성 밖으로 뛰어내렸다. 쿵! 소리와 함께 무겁게 바닥에 안착한 밀로는 특유의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패티스의 앞에 제 손을 내밀었다.

    “아까 보니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고. 뭐, 종족도 알고 있는 듯하고. 따로 소개할 건 없네. 만나서 반가워, 하이에나의 영주님.”

    “…….”

    “내 손 무안하게 계속 무시할 거야?”

    패티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막무가내인 용의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억센 악력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영주님의 존함은 어찌 되시는지요?”

    “패티스.”

    “아아, 그렇군요. 작위는?”

    “백작.”

    신경전이나 힘자랑을 위해 억세게 잡은 게 아니라 원래 힘이 넘쳐나는 모양이었다. 패티스는 기분 나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며 밀로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안쪽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용과 닿았던 손 곳곳을 닦았다.

    “와, 이거 상천데요? 면전에서 이런 취급이라니.”

    “쓸데없는 말은 질색이야.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빨리 말하도록. 폐하께서 곧 있으면 날 찾으실 테니.”

    “암컷 용을 만나 봤습니까?”

    “너도 암컷 용에 관심이 있나?”

    “너도,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미 폐하께서 다 말씀하신 모양이군요. 킨이 암컷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난 폐하의 보통 동맹족이 아냐. 폐하는 황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공식적으로 하이에나에 속하신 분이셨으니 동족과 다름없다.”

    패티스의 대답을 들으며 밀로는 어깨를 으쓱이고 입을 삐죽거렸다. 인간이 인간이지, 무슨 하이에나람. 그러나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내뱉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은 킨이 있으니 저라도 자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탓에.

    “어쨌든요. 영주님도 암컷을 만나 봤냐고요.”

    “아니. 못 만났어. 그리고 못 만날 거야. 그녀를 만나려면 조건이 필요하고 그게 해당되는 사람은 폐하가 유일하셔. 심지어 폐하도 그녀를 만난 건 단 한 번뿐이었고.”

    괜히 스완에 대해 얘기할 필요는 없지. 패티스는 할 말 끝났으면 돌아가겠다는 고갯짓을 하곤 밀로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뒤에서 밀로가 그의 팔을 확 낚아챈 탓에 성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이 멎고 말았다.

    “놔. 진짜 귀찮게 구네.”

    조금 전처럼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밀로가 강한 힘으로 패티스의 팔을 잡고 놓아 주지 않은 것이다. 악수할 때완 달리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가뜩이나 타인과 직접적으로 닿는 걸 싫어하는 패티스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패티스는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경고했다.

    “야. 넌 내가 만만해? 불필요한 이물질이면 이물질답게 얌전히 놀다가 네 종족이 사는 곳으로 꺼져. 여긴 네 종족들이 활개 칠 만한 놀이터가 아니라고.”

    “스완이 성력을 써서 가능한 거지?”

    “…….”

    “나한텐 말해도 돼. 킨은 안 되지만.”

    그 말을 하며 밀로가 패티스의 손을 놔 주었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패티스는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용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꽤 강하게 경고했다.

    “스완에게 손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은 내 종족과 다름없거든.”

    “내가 미쳤어? 걔한테 손대게? 그게 아니라 스완이 안전한지 묻는 거야.”

    “…….”

    “킨이 폐하께 암컷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 넌 폐하와 스완만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착각이야. 위치만 알면 나와 킨은 그녀를 만날 수 있어. 언제든.”

    “뭐?”

    “하지만 그녀를 만나면 안 돼. 킨은 그녀를 죽일지도 모르니까.”

    밀로의 말에 패티스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녀를 죽인다니? 대체 왜? 만나게 해 달라는 의미가 그런 뜻이었어?

    “이유를 물어봐도 네가 듣기에 타당한 이유는 아닐 거야. 너도 알겠지만 우리 종족은 살육에 미쳤잖아.”

    “그냥 단순히 살육에 미쳤기 때문에 동족을 죽인다고?”

    “그녀와 우린 동족이 아냐.”

    “…….”

    “우리가 신을 떠난 직후부터 우린 아예 다른 종족이 된 거야.”

    암컷을 추앙하는 하이에나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그게 용의 특수성이다. 지금의 용은 암컷과 수컷이 완전히 다른 종족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나더러 킨인지 뭔지가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라는 거야?”

    “어. 너희에게 그녀가 중요하다면.”

    “…….”

    “킨이 폭주하지 않는 정도라면 내가 충분히 말릴 수 있지만, 그를 완전히 제어하는 건 역부족이야. 힘과 능력은 내 쪽이 월등히 뛰어나지만, 걘…….”

    말을 다 마치지 못한 밀로는 아주 잠깐 고민하는 듯 주저했다. 그러다가 한숨처럼 마지막 말을 토해 냈다.

    “걘 신이 처음 만드셨던 용들 중 하나니까.”

    “뭐?”

    “따지자면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쯤 되려나. 그 이상일 수도 있고. 이쯤 되니 나도 걔랑 내가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네.”

    “…….”

    “아무튼 시간이란 걸 셀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 산 놈이라고. 걔가 모르는 건 없고, 걔가 못 하는 것도 없어.”

    밀로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하다. 물론 우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산 존재는 없다.

    하지만 상대는 용.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사는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종족. 같은 이종족으로 묶기에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종족이니까.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다. 패티스는 생각하던 걸 멈추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밀로를 쳐다보며 따졌다.

    “그럼 그딴 위험한 새끼를 왜 데리고 온 거야. 네 말대로 걔가 그렇게 오래 산 놈이라면 폐하께 위험하다는 것 몰라?”

    “알아. 그래서 데려왔어.”

    “…….”

    “폐하를 지키기 위해. 걔는 내 편이 되어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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