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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68화 (368/488)
  • 368화

    “어쨌든 금방 돌아올 테니 그동안 집무실엔 누구도 들이지 말게. 내가 집무 때문에 며칠째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다.”

    앤디는 패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 지독한 일중독자가 며칠째 집무실에서 안 나온다고 하면 그의 예민한 성미를 건드리기 싫어서 이 근처엔 얼씬도 안 할 것이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참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안다니까…….

    “속으로 내 욕하고 있군.”

    “아, 아닙니다.”

    “아니라면서 말은 왜 더듬어?”

    “…….”

    “쯧.”

    패티스는 앤디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다가 집무실 문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스완 통해서 폐하께 연락하게. 웬만하면 경의 선에서 처리하고.”

    “예, 다녀오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패티스는 하이에나로 변한 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앤디는 집무실 문을 닫으며 차마 내뱉지 못한 추측을 중얼거렸다.

    “설마 폐하의 형제라든가, 방계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그 인간한테 양위하시려는 건…… 너무 억측인가.”

    에이, 설마. 황족은 이종족들이 하나하나 맡아 가며 죽였기 때문에 살아남았을 리 없지. 폐하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위안을 얻은 앤디는 콧노래를 부르며 패티스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

    “폐하. 날이 추워요. 저희 영지는 밤이 되면 더 추워지니, 들어가셔서 기다리세요.”

    “괜찮아.”

    더는 이엘의 고집을 말릴 수 없었다. 결국 피시는 저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두르고 단단히 여며 주었다.

    “그렇게 기대되세요?”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고.”

    “괜찮을 거예요. 심각한 일이었다면 스완을 통해 미리 말했을 테니까요.”

    “그랬겠지?”

    “네, 그럼요.”

    피시의 관심은 저 멀리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제 형제에게 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걱정하는 그녀를 달래 줄 수 있다는 것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한편 이엘은 입김을 내뱉으며 초조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하이에나의 영지에 온 뒤로 모두의 배려로 침실에서 여독을 풀고 있었다. 특히나 피시가 그녀의 건강 상태에 예민한 탓에 성 안엔 아주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서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휴식이 깨진 건 별안간 독수리로부터 들려온 소식이었다. 영지 밖을 정찰하던 독수리들이 하이에나 한 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제도에 남은 하이에나들 중 하나이려나 싶었는데 독수리와 함께 정찰을 나갔던 하이에나에게서 그가 패티스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아니야. 뭔가 심각한 일이 있는 거야. 패티스는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데, 그가 내 명령을 어기고 제도를 버려둔 채 이곳에 올 이유가 가벼울 리 없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괜찮아요, 폐하.”

    “피시.”

    “절 믿으세요. 전 하트와 패티스의 쌍둥이예요. 폐하와 스완처럼 생각을 공유하는 건 아니지만, 쌍둥이끼리만 느끼는 미묘한 기운이 있거든요.”

    신빙성이 떨어지는 위로였지만 이엘은 피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피시처럼 쌍둥이였기에. 그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같은 쌍둥이로서 이해했다.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패티스를 응시했다. 아주 거대한 하이에나 한 마리가 새카만 밤에 스며든 것처럼 고요히 달려오고 있었다.

    정찰병들에게서 그가 하이에나란 것을 전해 듣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 제 쪽을 향해 오는 저 이종족이 패티스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이에나로 변한 패티스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책략가였으니까. 인간의 모습일 땐 하트와는 달리 마른 편이라 하이에나의 모습이 저렇게까지 커다랄 줄 몰랐는데. 하긴 너무 당연한 얘기구나. 직계의 피를 이어받은 우논인데.

    “폐하!”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던 패티스는 그녀와 피시를 발견한 건지 속도에 박차를 가해 성문을 통과했다. 이엘의 앞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입김을 뱉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일어나, 패티스. 바닥이 차가워.”

    “폐하.”

    “얼굴도 얼음처럼 얼었네.”

    이엘이 패티스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내려와 손으로 그의 차가운 뺨을 감쌌다. 아무리 이종족이라 할지라도 그 먼 길을 쉬지도 않고 내내 달려왔으니 지칠 만도 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한겨울이었다. 바다와 맞닿아 어느 영지보다 추운 곳이기도 했고.

    “명령을 어기고 제도를 비운 채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된 점, 용서해 주십시오.”

    “됐어, 그런 말은 그만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짐이 명령을 내려야 일어날 텐가?”

    “아닙니다. 일어나겠습니다.”

    딱딱한 바닥에서 일어난 패티스는 그제야 몇 달 만에 마주한 그녀를 눈에 담았다. 반년이 훌쩍 넘었다. 다른 놈들은 제도와 시찰대를 오가며 가끔씩이라도 이엘을 만났지만, 자신은 줄곧 제도를 지키느라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이토록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또 조금…… 자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그대가 내 아비라도 된 듯하구나.”

    “기꺼이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패티스가 싱긋 웃으며 이엘에게 에스코트를 청했다. 이엘은 그 손을 잡으려다 뭔가 깨달은 건지 제 몸에 걸쳐져 있던 피시의 겉옷을 벗어, 패티스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감기 걸리면 안 돼.”

    “전 우논입니다, 폐하. 이렇게 약해 보여도 인간보다 강한 우논인걸요.”

    “우논이라고 감기에 안 걸리나? 그대가 내 아비를 자처한다면 아프면 안 되지.”

    “그렇군요. 영광입니다.”

    패티스는 이엘의 앞에서만큼은 고집을 버리는 편이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권했을 때 거절은 단 한 번뿐이고, 거듭 권한다면 결코 사양하지 않았다. 이엘의 의견과 생각을 전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에 나오는 배려였고 습관이었다.

    “패티. 난 안 보여?”

    그녀의 뒤에서 들린 형제의 목소리에 패티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피시는 맑게 웃으며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넌 그다지 오랜만이 아니니 그렇지.”

    “그건 그렇네. 우린 몇 주 전에 봤으니까.”

    피시가 헤실헤실 웃는 것을 지켜보던 패티스는 제 어깨에 걸쳐진 겉옷으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향이 느껴지더라니 피시의 옷이었나 보군. 혹시라도 그녀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된 건지 피시가 자기 옷을 벗어서 건네준 모양이었다.

    “괜찮아, 너 입어.”

    “네가 더 추워 보이는데.”

    “여긴 우리 영지잖아. 줄곧 여기서 살았는데, 뭘. 난 괜찮으니까 패티가 입어.”

    피시의 고집에 패티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엘이 웃으며 그 손을 붙잡았고 세 사람은 나란히 성을 향해 걸었다.

    “이렇게 폐하와 패티랑 함께 있는 게 엄청 오랜만인 것 같아요.”

    상기된 표정으로 피시가 옆에서 열심히 재잘거렸다. 이엘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너른 평야를 둘러봤다.

    사실 가장 미안한 종족이 있다면 그건 늑대와 하이에나였다. 늑대는 대외적으로 그녀와 대립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신경을 써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고, 하이에나는 그런 늑대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여러 사람 몫을 하느라 고생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세쌍둥이에게 가장 미안했다. 조이나를 잃은 뒤로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이제 겨우 함께 살게 되었는데, 하트가 근위대장이 되어 이엘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입장이 된 터라 조금 전 피시의 말처럼 이렇게 함께 모이는 것조차 너무 오랜만이 된 것이다.

    “미안해. 안정이 되는 대로 하트를 돌려줄게.”

    “아닙니다, 폐하! 하트가 근위대장이 된 건 가문의 영광인걸요.”

    피시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이엘은 묵묵히 저를 에스코트하며 이끄는 패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도 원치 않는 영주 자리에 앉게 만들어서 미안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원해서 영주가 되었고, 폐하의 은혜를 입어 작위를 받았습니다. 원래대로였다면 저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자리였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후후. 듣기 좋은 거짓말이구나.”

    이엘이 웃으며 제 양옆에 있는 하이에나 둘을 이끌었다.

    “그래서 백작이 이렇게 친히 온 이유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직접 올 정도면 중대한 사안인가 보군.”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 우선 여기 상황을 먼저 말해 줄게. 노아는 뱀의 영지로 떠났어. 로빈과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군.”

    “무슨…….”

    “그건 나도 모르겠어. 사실 그것에 관해 제도에 머물던 그대와 스완에게 물어볼 게 있었는데, 스완이 계속 내 연락을 피하는 것 같더라고. 이틀 전까지는 말이야.”

    “…….”

    “백작을 탓하려는 게 아니야.”

    “예, 그래도 제가 내린 지시가 맞으니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역시 패티스가 내린 지시였나 보군. 이엘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최근까지 스완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그녀를 무시했다.

    그러나 스완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 주책바가지는 저가 지은 죄가 있어도 그녀의 연락을 피할 놈이 아니었다. 누군가 시킨 게 아니고서는.

    “그게 백작이 여기까지 날 찾아온 이유와 관련된 건가?”

    “예, 맞습니다.”

    “…….”

    “죄송합니다, 폐하. 감히 폐하의 연락을 무시하고 함부로 움직인 점,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우선은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 참고로 여기엔 용도 와 있어.”

    “용이요? 용이라면…….”

    “응. 밀로가 돌아왔어.”

    용이라는 이름에 패티스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나 뒤이은 말은 패티스뿐 아니라 피시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밀로의 친구도 함께 왔어.”

    “친구요?”

    “응. 또 다른 용.”

    “폐하. 설마 그 사람이 용이었어요?”

    황제 일행이 이곳에 도착한 첫날, 피시는 제게 시비를 걸던 킨과 마주쳤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어 잊고 살았는데……. 조금 전 이엘의 설명을 들으니 이상하게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던 킨과의 만남이 떠오른 것이다.

    “응, 피시는 만나 봤나 보구나. 맞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푸른색 머리카락. 그리고 푸른색 눈동자.”

    “…….”

    “용이야.”

    골치가 아프군. 패티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은 한 마리만 있어도 귀찮은데 그게 지금 세 마리나 그녀의 곁에 붙어 있는 셈이다. 그나마 암컷인 드레인은 꿈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자는 믿을 만한 자입니까?”

    “아니.”

    “…….”

    “밀로는 신뢰할 수 있지만, 킨은 아니야. 킨은 동족인 밀로조차 신뢰할 수 없다고 했어.”

    “용은 위험합니다, 폐하. 단 한 마리의 존재만으로도 모든 종족에게 위협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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