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67화 (367/488)
  • 367화

    “고니 얘기는 됐고. 경은 보고나 이어서 하게.”

    “예, 알겠습니다. 우선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뱀은 혼란시켜 두었으니 곧 로빈이 직접 움직일 겁니다. 그때 적절히 덫을 놔서 스완을 납치당하게끔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올리세스 쪽은?”

    “그쪽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던데요? 폐하께 전해 듣는 것보다 더 안 좋았어요.”

    “안 좋다는 건 무슨 뜻이지?”

    “세뇌당한 수준이에요. 올리세스를 또 다른 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완의 주변을 수색하는 뱀을 처리하면서, 노아가 머물렀다던 올리세스 소유의 마을에도 들렀다 왔다. 물론 앤디는 노아처럼 흔적을 남겨선 안 됐기 때문에 내부까지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겉으로만 봐도 자신들의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노아 님이 탈출하시면서 거길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더라고요. 아무래도 리노까지 데리고 탈출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모양인데, 그 덕에 마을이 난장판이 됐어요. 지금 방화범 잡겠다고 난리도 아니더라고요.”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리노를 데리고 탈출하지 못했다는 건, 리노가 갇혀 있다는 곳의 경비가 마을 경비보다 삼엄하단 뜻이다.”

    “그러네요. 어떡하죠? 저도 마을 내부까진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리노를 데리고 탈출할 수 있을까. 패티스는 머리를 굴려 봤지만 명쾌한 해답을 여전히 찾지 못한 채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스완을 사용하려 했지만, 현재로선 스완은 그곳이 아니라 뱀의 영지에 더 신경 써야 할 때라서.

    “정 안 되면 노아 님처럼 인간인 척, 그 마을에 직접 잠입하는 수밖에 없지.”

    “그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알겠네. 어쨌든 수고했어, 수습하느라. 가서 쉬도록 하게.”

    “백작님. 폐하께는 언제까지 비밀로 하실 겁니까?”

    “…….”

    “저희가 금서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완의 아비로부터 들은 마지막 신탁까지.”

    “…….”

    “언제까지 비밀로 하실 겁니까, 패티스 님.”

    싱글싱글 웃던 것을 지운 앤디가 사뭇 진지하게 패티스를 불렀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하던 패티스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두고는 손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이제 와서 폐하께 비밀로 하는 게 꺼려졌나? 내가 경에게 그랬잖아. 언제든 가서 말씀드리라고.”

    “그건 제가 그럴 용기가 없다는 걸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겠죠.”

    “…….”

    “저는…… 독단적인 판단을 내릴 자신이 없으니까요.”

    앤디의 무거운 목소리를 끝으로 집무실 안엔 정적이 흘렀다. 커다란 창을 통해 붉은 노을이 새어 들어왔다. 패티스는 그 노을빛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용기라…….”

    “…….”

    “정확한 표현이군. 경은 용기가 없지.”

    “예, 맞습니다. 저는 폐하께 그런 얘기를 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네?”

    “나도 두렵다고.”

    용기가 없다. 모든 진실을 확인할 용기가, 패티스에겐 없었다. 처음 그녀 몰래 움직이려 했던 건, 이 일련의 과정들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이엘이 이런 일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싫어서. 퍼즐이라고는 했어도 그게 이런 큰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을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패티스는 이엘이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기본적인 토대는 있었지만,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과 다름없는 건국이었다. 그러니 지난 3년간 이엘이 휴식을 취했던 기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패티스는 그녀에게 이번 영지 시찰이 휴식이 되길 바랐다.

    “이제 그냥 쉬쉬할 수 없는 수준 아닙니까?”

    앤디의 말을 들으며 패티스는 눈을 감았다. 확인을 위해서든, 보고를 위해서든 그녀를 만날 때이다.

    “경도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저는…….”

    “경이 나라면. 어떻게 할 건가.”

    앤디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황제인 그녀에게 모든 걸 밝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 건지.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 건지. 폐하께선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건지. 그리고 우리에겐 어디까지 감추고 싶어 하셨던 건지.”

    “패티스 님.”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질 못하겠어.”

    이엘과 자신들이 사무적인 관계였다면. 평범한 상사와 부관의 관계였다면. 그냥 일반적인 인간과 이종족의 관계였다면……. 그랬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폐하께 상처를 드릴까 봐, 겁이 나는군.”

    “……마찬가지입니다.”

    “경은 한때 폐하의 오라비를 자처했다며. 어때. 경이 나라면 어떻게 할 건가.”

    “그거야, 뭐…….”

    앤디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그의 질문을 피했다. 어차피 둘 다 머리로는 안다. 더는 숨기지 말고 이엘에게 다 토로해야 한다는 걸. 그 이후의 일은 그녀가 정할 일이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동맹관계에 있는 자들끼리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어서는 안 된다.

    “얘기해야겠지.”

    “하실 겁니까? 언제요? 그럼 제가 가서……,”

    “아니. 경은 제도를 지켜.”

    “예?”

    “내가 혼자 다녀온다.”

    “패티스 님이 혼자 가시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아니면 호위라도 데려가십시오.”

    “경은 나를 피시보다도 약한 존재로 보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해 보니 그건 또 그렇다. 그 불안불안한 하이에나는 무려 세잔티노에서 고니의 호수까지 다녀왔는데, 그보다 더 똑똑하고 강한 패티스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머쓱해진 앤디를 바라보던 패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말 나온 김에 다녀올게.”

    “지금요?! 이렇게 갑자기요?”

    “지금 폐하께서 계신 곳이 내 영지니까.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제도를 빠져나가면 아무도 나인지 모를 거다. 그냥 자기 영지로 돌아가는 우논 하나쯤으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누군가 나를 알아차리면 귀찮아지니, 경이 내가 없는 동안 제도를 철저히 지키고 있게.”

    “아, 알겠습니다.”

    앤디는 패티스를 얼떨떨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자신이 아는 패티스는 저렇게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닐 텐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였다.

    “그때까지 스완의 상태를 잘 확인해. 놈이 약한 소리를 해도 절대 봐주지 말고. 그 백조가 저지른 일 때문에 경도, 나도 고생하고 있다는 걸 항시 기억해.”

    “알고 있어요, 저도. 그리고 전 그 백조 놈한테 무르지 않거든요?”

    “물러.”

    “…….”

    “놈을 경의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부터가, 경이 백조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뜻이다.”

    뭘 또 휘두른다고 말할 필요까지야……. 앤디는 반박할 만한 적당한 핑계를 찾지 못한 채 꿍얼거리는 걸로 패티스의 질책을 피해 버렸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냐.”

    “…….”

    “이런 시대에 네 편, 내 편 가릴 수 없는 형편이란 것도 잘 알아.”

    “백작님.”

    “다만, 그대는 늑대야.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이고, 노아 님이 대외적으로 폐하께 흔들린다는 소문이 퍼지는 와중이니 부단장인 그대는 절대 중심을 잃어서는 안 돼.”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선 늑대가 그 역할을 맡아 주기를 원하셨잖아.”

    패티스의 말에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맞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런 역할극을 하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다. 앤디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솔직히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뭐가?”

    “그렇잖아요. 기껏 힘겹게 황위에 올랐는데 폐하께선 왜 권력을 강하게 붙잡지 않으시고…….”

    “폐하가 선황처럼 폭군이라도 되길 바라?”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마치 언제든지 황위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처럼 구시니까…….”

    앤디의 말에 패티스도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도 동의하는 바다. 아주 사사로운 하이에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마지막이자 영원한 군주는 오직 이엘 하나뿐이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겨진 여자, 암컷. 그녀만이 유일한 황제이니, 죽을 때까지 황위에 있기를 바란다.

    “물론 황제라는 위치가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한데요. 그래도 전 어렵게 오르신 만큼 지지기반을 더 튼튼하게 다져서 오래오래 집권하셨으면 좋겠거든요.”

    “…….”

    “막말로 올리세스 놈 좀 보십시오. 반역을 준비하는 놈이라 그런지, 아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잖아요? 가짜 사제를 들여서 자기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게끔 머리를 굴리다니.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하시길 원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저희를 이용해서라도 황위를 단단히 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엘은 황위에 오를 때부터 자신의 자리가 견고할 거라는 가능성을 버리고 시작했다. 그래서 늑대와의 사이를 벌려, 자신이 아닌 늑대를 인간과 이종족 모두의 신뢰를 받는 존재로 만든 것이었다. 어차피 황위라는 자리는 누가 있어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앤디의 말처럼 동맹족과 여론을 이용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단단하고 튼튼한 지지기반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려 나자르가 그녀의 편이었다.

    전쟁 이전에는 차별받고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던 그녀의 성별이, 전쟁 이후엔 누구보다 귀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그걸 조금만 이용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인 것처럼 구시니까, 그게 좀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

    “폐하가 아니면 누가 황위에 오르겠습니까? 황손은 모조리 죽어 버려서 그나마 가까운 놈이 올리세스인 세상에서요.”

    “폐하께서 황위를 누군가에게 물려줄 거라고 생각하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기틀만 마련해 놓으시고 훌훌 떠나실 것만 같아요. 그것도 아주 안 좋은 방식으로요.”

    앤디의 생각엔,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양위하는 식의 전개도 아닐 것 같다. 갈수록 그녀에 관한 나쁜 소문이 돌고 있는 데다가, 어떤 쪽에선 벌써부터 그녀를 폭군 취급하는 놈들도 있었다.

    물론 그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해 줄 필요는 없지만 밑도 끝도 없이 와전되는 소문을 어느 정도는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그대로 두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부풀려지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아이를 낳으시면 황손에게 곧장 양위하시려나 싶었습니다.”

    “…….”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올리세스에게 넘기실 생각도 아닌 것 같은데……. 저도 폐하의 마음을 잘 모르겠네요. 그건 노아 님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고요.”

    언젠가 이 문제에 관해 노아와 진지하게 의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노아도 앤디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진 못했다. 앤디는 노아를 잘 알고 있다. 이엘이 먼저 말해 주지 않는 이상, 노아가 먼저 물어보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더러 그것까지 폐하께 여쭤보란 의미인가?”

    “아뇨, 여쭤봐 달라는 게 아니고요. 그냥 뭐 그렇다고요.”

    그게 그거 아닌가. 패티스는 앤디를 흘겨보듯 쳐다보다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