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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66화 (366/488)
  • 366화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선에 나가면…… 피해는 아군이 입게 돼요.”

    피시는 두 주먹을 꾹 쥐며 힘겹게 대답했다. 과거의 경험이 남긴 뼈아픈 충고였다. 조이나를 잃었던 그날이 그랬으니까. 뭣도 없는 주제에 앞서 나갔다가 결국 동족을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숨어 지내면 어느 세월에 성장할래? 네 역할은 폐하의 뒤에 숨는 거야?”

    “아닙니다. 언젠간 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이건 네가 불쌍해서 주는 충고란다, 하이에나 영주님.”

    영주가 아니라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건지, 남자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저 하고 싶은 말만 쏟아 내고 있었다.

    “판단을 내리는 건 네 몫이야. 네게 조언해 주는 이들의 말을 모두 들을 필요는 없어.”

    “…….”

    “너희 종족은 전투에 최적화된 종족이니 실전을 쌓아야 얻는 것들이 있을 거야. 숨어 있지 말고 나서.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지키고 싶다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단번에 이엘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게 남겨진 두 형제까지.

    “물론 나 또한 조언하는 이에 불과하니 내 말을 듣고 말고의 판단은 네 몫이고.”

    “당신은 제게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그냥 일종의 재미야. 나도 살아가는 재미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킨은 눈가를 사르륵 접어 예쁘게 웃었다. 지독할 정도로 오래 살게 되면 시간 개념이 사라지고 그냥 흐르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특히나 용은 그게 심했다. 신으로부터 도망쳐 저희끼리 살면서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주기적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뿐.

    그나마 지상에선 닥치는 대로 죽이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2차 전쟁 때완 달리 현재의 황제는 그런 걸 싫어하는 듯하니 유일한 흥미도 사라진 셈이다. 그래서 킨은 목표를 바꿨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내 손에 피를 묻힐 수 없게 됐으니, 너희라도 내 재미를 위해 힘을 키워 주면 좋겠거든.”

    “…….”

    “잘 생각해 봐.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러 와도 돼. 다른 놈들은 귀찮지만 넌 특별히 상담해 줄게.”

    킨은 마치 선심 쓴다는 듯 말하곤 피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 홀로 남겨진 피시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잠재우려 눈을 질끈 감았다. 피시에게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사람은 하트였지만, 그는 알면서도 피시를 전선에 세우지 않았다.

    트라우마 탓이다. 2차 전쟁 때 피시의 실수로 암컷들이 전멸해 버렸던 그 일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해서. 그건 피시뿐 아니라 하트와 패티스 모두에게 같은 상처를 남겼다. 누구도 입 밖으로 그 일을 꺼내진 않지만, 피시의 잘못된 판단으로 내린 공격이 동족의 파멸을 가져왔다는 데엔 이견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피시는 조금 전 킨이 했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아마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자신이 전선에 서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제 형제를 목숨보다 사랑하는 하트가 불완전한 자신을 전쟁에 쓸 리 없으니까. 그는 지금도 피시가 능력을 공격형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방어용으로 쓰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피시는 결심이 선 건지 주먹을 세게 쥐며 이엘이 머무는 본성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그림자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언젠가 이엘이 말했듯, 이제는 정말 알을 깨고 나와야 할 때였다.

    *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패티스는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와 동시에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스완. 이젠 여기가 황궁이란 자각도 사라진 건가?”

    “저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 죽겠다구요!”

    울기 직전인 듯한 표정으로 달려와서는 패티스가 업무를 보던 책상 위를 두 손으로 쾅 내리치며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패티스는 스완을 한심스런 눈빛으로 보다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성전기사단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려가게.”

    “패티스 님! 제발!”

    “호르난 경. 쟤 데리고 나가도록.”

    “예, 백작님.”

    “아, 제발 휴식 좀 달라고요!”

    스완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을 때, 순간적으로 스완의 손에서 뻗어 나온 새하얀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려던 성전기사단장 사피라를 강하게 밀쳐 냈다. 갑작스런 공격이었지만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던 사피라가 힘에 밀려 속절없이 튕겨져 나갔다.

    “헉!”

    “…….”

    “죄, 죄송……합니다…….”

    위로 붕 떠서 날아간 사피라는 집무실 벽에 강하게 부딪치곤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스완은 성력을 쓴 제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으며 패티스와 사피라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의 성력은 쓰고 싶어서 쓴 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써 버렸다.

    “성공했군.”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사피라를 힐끗 보던 패티스가 무심하게 평가를 내리자, 소심하게 눈치만 보던 스완이 움찔거리며 제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 성공했다고? 내가…… 정말 성공했어? 스완은 멍청하게 제 손과 먼지를 뒤집어쓴 사피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연습용으로 쓰던 인형도 아니고 성전기사단장인 사피라를 상대로, 성력으로 그를 방어하며 밀쳐 냈다. 이렇게 방어와 공격을 한꺼번에 사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넌 굴려야 되는 거다, 스완.”

    “…….”

    “잔말 말고 가서 훈련이나 똑바로 해. 뱀의 영지는 네 생각처럼 호락호락한 데가 아니야.”

    패티스는 벗어 두었던 안경을 도로 쓰며 집무실 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나 스완이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자, 먼지를 털어 낸 사피라가 패티스의 명령을 대신 이행하고자 스완을 잡아챘다.

    “스완 님. 저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훈련 도중에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하지 않기로.”

    “…….”

    “이런 식이면 제가 당신과 훈련하는 일은, 다신 없을 겁니다.”

    역시나 칭찬에 인색한 성전기사단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성공을 축하해 주기보다는 스완의 잘못을 먼저 지적했다. 그리고 그의 냉정한 쓴소리를 듣고 나서야 스완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순순히 사피라에게 붙잡혀 끌려 나가다가, 힘을 줘 걸음을 멈추곤 다시 한 번 패티스를 불렀다.

    “그럼 폐하께만이라도 얘기하게 해 주세요!”

    “…….”

    “폐하가 걱정하고 계신다고요.”

    그간 그녀 몰래 제도에서 패티스와 스완이 벌인 일들이 꽤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연락 자체를 무시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령을 내린 건 패티스였지만 정작 그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사람은 스완이었다. 이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데도 모르는 척 무시하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모른다.

    “이러다 폐하께서 할 일 다 제쳐 두고 제도로 오시면 어떡해요.”

    “…….”

    “패티스 님!”

    “알겠어. 그 부분은 내 생각이 짧았다. 폐하께서 걱정하지 않는 선에서 네가 잘 둘러대.”

    “네, 알겠습니다. 훈련은…… 잘 받을게요.”

    본전도 못 찾은 스완이 어깨를 아래로 툭 떨군 채 기운 없이 사피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호르난 경. 강도를 낮춰 주게. 놈이 도망치지 않는 정도로만.”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할게요!”

    사피라가 말을 더 얹기 전에 스완은 그를 밀치고 패티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패티스는 이제 그만 나가 보라는 듯 아예 그들을 등졌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야 집무실에 평화가 찾아왔나 싶었는데,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어수선해지고 말았다. 별안간 들이닥친 앤디로 인해.

    “귀환 신고합니다!”

    “들어올 때 노크하는 법이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인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예, 잠깐 잊었습니다.”

    능청스럽게 대답한 앤디는 문을 도로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백작님. 2기사단 부단장 앤디입니다. 귀환 보고를 위해 들렀습니다.”

    “…….”

    “허락하신 줄 알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앤디의 얼굴 위로, 조금 전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던 스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고니가 몇 년을 늑대의 영지에서 지냈다더니, 하는 행동이 저 늑대와 지독할 정도로 똑같다.

    “명령하신 대로 스완의 뒤를 캐려던 뱀들은 모조리 죽였고, 몇 마리만 살려서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곧 로빈이 직접 움직일 겁니다. 새로운 나자르를 찾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이쪽도 순조로운 편이야. 스완이 무의식적으로 성력을 조절하는 것에 사용했거든.”

    “정말요?”

    놀란 앤디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곤, 조금 전 사피라가 처박혔던 모퉁이 쪽을 쳐다봤다.

    스완은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강도를 조절했다. 그의 성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기 때문에 조금 전에 스스로 강도를 조절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사피라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성전기사단장이라고 해도 성력을 빌려 쓰는 그와, 성력을 직접 사용하는 스완 사이엔 힘의 차이가 존재하니까.

    분명 무의식 속에서 성력을 사용했음에도 사피라를 가볍게 밀쳐 내는 정도로 강도가 조절됐다.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스완에게도 말했지만 그 고니는 굴리면 굴릴수록 성장 속도가 굉장히 빨라진다. 그래서 의식이 있을 땐 사피라에게, 꿈속에선 용의 암컷에게 열심히 굴려지는 중이었고.

    “걔가 웬일이래요? 이쯤 돼서 자긴 못 하겠다고 바닥에 나뒹굴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전에 나뒹굴었어.”

    “…….”

    “그러다 성전기사단장에게 끌려 나가기 싫어서 성력을 쓰더군.”

    “와, 걔는 진짜 뭘 해도 이상하다니까요.”

    앤디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독특하다 못해 이상한 놈이다. 그렇게 연습할 땐 제대로 못 하더니 훈련하기 싫으니까 실력이 느는 것만 봐도. 쯧쯧.

    “그래도 예상외야. 성전기사단장이나 그 암컷 용이 억센 강도로 굴리고 있는데도 여태 잘 참았잖아.”

    “자기도 양심이란 게 있으면 불평하진 않겠죠.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앤디는 표정을 와락 구긴 채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귀족회의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얌전히 침실에 처박혀서 나오지 말라니까 그걸 그새 못 참고 나와서 들키냔 말이야. 그것도 하고많은 이종족 중에 하필 로빈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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