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보지 못했으니 괜찮다? 냄새가 가려졌으니 괜찮아?”
“…….”
“내가 염려하는 건 그딴 게 아냐. 여기 있는 고니가 평범한 고니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란 거고!”
패티스의 벼락같은 노성에 스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 앤디는 열었던 입을 꾹 다물며 그의 꾸중을 얌전히 받아 냈다. 화날 만하네. 혼낼 만하고…….
그리고 자신 역시 하이에나에게 꾸지람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야 어쨌든 저 고니의 현재 소속은 늑대로 되어 있으니까. 놈을 잘 관리하지 못한 제 탓이 크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 책임도 큽니다.”
“내가 지금 경의 사죄를 받겠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걸로 보여?”
“죄송합니다.”
“저게 성력을 쓸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 파장을 경은 상상이나 해 볼 수 있겠어?”
“…….”
“성전기사단이 나자르인 오드 님에게 아주 작은 성력을 빌려 쓰는 것으로도 인간과 이종족들은 선망의 시선을 보내. 왜냐고? 지금 우리의 세상에서 성력만 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성력은 신을 얼마나 믿는가에 따라 그 크기와 효과가 커진다. 어떻게, 어느 방식으로 쓸 수 있을지 무한하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성력을 완벽하게 운용할 수 있는 오드 님이 폐하의 편에 섰다는 게 의미가 있는 거야. 성력이 갖고 있는 권력이 폐하께 고스란히 향하는 거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성력을 쓸 수 있는 놈이 하나 더 나타났다? 근데 그놈은 오드 님처럼 아직 완벽한 통제는 하지 못하네? 그렇지만 놈이 쓸 수 있는 성력이 갈수록 커진다고? 경은 이게 뭘 뜻하는 것 같나.”
“…….”
“폐하에게 위험한 수단이 된다는 뜻이란 걸, 정말 몰랐나?”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앤디가 표정을 와락 구기며 스완을 힐끗 쳐다보니, 그는 짐작한 건지 눈을 감은 채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래,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 좋지.”
“…….”
“하지만 폐하의 대리 역할로 제도를 지키고 있고, 그분의 그림자가 되어 뒤에서 움직여야 하는 내가 머릿속이 마냥 꽃밭이었으면 좋겠나?”
“……아닙니다.”
“한시라도 폐하의 앞을 가로막는 정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분의 생명이 위험할 이 상황에서,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이란 자는 저깟 고니가 불쌍해서 사리 분별을 제대로 못 하는 건지 묻는 거다.”
너무나도 논리정연해서 앤디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자신이 실언을 한 것이다. 앤디는 뒷짐을 진 채, 노아에게 혼날 때처럼 그의 힐난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린 고니와 함께 지낸 게 몇 달이 지났다. 그랬기에 고니에게서 느껴지는 성력이 점차 강해졌어도 인지하기 어려워. 매일 보는 사이니까.”
“…….”
“하지만 로빈은 다르다. 놈은 신을 가장 먼저 버렸고, 여전히 버린 상태야.”
그 말의 의미는, 누구보다 성력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것과도 같았다.
“아마 지금쯤 수색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내가 아는 로빈이라면 그럴 테니까.”
“제가 뱀의 영지에 다녀오겠습니다. 가서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백작님.”
거듭 사과를 한 앤디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가기 위해 문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뱀의 영지 근처에서 스완을 추적하려는 세력을 잡아서 모조리 죽이는 편이 낫겠다. 의심받지 않게 사냥한 것처럼 꾸민다면 들킬 가능성이 낮으니까 그렇게 해서…….
“잠깐.”
문고리를 잡고 뱀을 잡을 계획을 꾸미던 앤디가 뒤에서 들려온 패티스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그대로 몸을 돌려 패티스를 보았다.
“예, 백작님.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스완.”
“예, 예?”
“너. 네가 이곳에서 무능하게 버린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나?”
“그건…….”
비교적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지금 상태로는 전쟁은 물론이고 작은 습격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보다 스스로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스완은 갑자기 제게 엄히 쏟아진 패티스의 경고에 입술을 꽉 깨물며 시선을 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책임져라.”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백작님! 스완은 폐하의 목숨과 연결……!”
“앤디 경. 내가 지금 경에게 그걸 물었나?”
“…….”
“저놈이 폐하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기에 여태 방만하게 굴어도 눈감아 준 게 아니었나?”
“…….”
“내가 고니에게 바라는 건 고작 목숨값이 아니다.”
스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리 죽으라고 종용하는 게 낫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겁을 주는 건지……. 그래도 자신이 저지른 게 있으니 말대꾸는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이든 하겠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뱀의 소굴로 들어가라.”
“……예?”
“예?!”
스완과 앤디가 동시에 대답했다. 지금 어디로 들어가라고……?
“네가 미끼가 되어서 내부로 들어가 정보를 우리 쪽으로 흘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스완의 목숨이 위험해져요!”
“아니. 장담하건대 고니의 성력이 알려지게 되면 저놈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내가 될걸.”
“그게 무슨…….”
“스완. 네가 폐하와 약속했던 계약 기간이 몇 년이었지?”
패티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스완이 일순 숨을 멈췄다. 아, 무슨 의미로 저 말을 하는 건지 알 것 같다.
“……5년입니다.”
“그래, 5년.”
“설마……!”
기겁한 앤디가 눈을 크게 치떴을 때. 이미 패티스가 쥐고 있던 장검이 스완의 목 바로 앞에 다가온 상태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스완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제게 겨눠진 검과 패티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 5년이 지나면 넌 폐하와 계약이 끝나며, 더 이상 폐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테지. 그 5년이라는 기간이 이제 겨우 몇 달 남았고.”
“…….”
“그런데 네 능력이 밝혀져 성력을 탐내는 자들에게 악용이라도 당한다면. 그래서 폐하께 폐가 되는 존재가 된다면.”
“…….”
“그땐 네 목을 가져가는 건 나다.”
조금의 가능성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패티스의 냉정한 판단에 앤디는 혀를 내둘렀고 스완은 제 처지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야, 스완! 네가 하긴 뭘 해! 들어갔다가 뒈지지나 않으면……!”
“로빈은 고니를 죽이지 않을 테니, 경도 헛소리 작작 해라.”
“백작님!”
“누가 고니로서 뱀에게 다가가래?”
“네?”
“나자르인 척해.”
“…….”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 황녀. 그리고 멸족한 줄 알았던 나자르와 재규어. 모두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게 지금 우리 세계인데. 거기에 나자르가 하나 더 살아남았다고 한들 뭐가 이상하지?”
패티스는 입꼬리를 위로 올려 웃으며 스완에게 겨눴던 검을 다시 거두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스완이 입을 벌리며 숨을 토하듯 뱉어 냈다.
“네가 어수룩한 나자르인 척한다면, 확신하건대 로빈은 널 절대 죽이지 않을 거다.”
“…….”
“근데 거기엔 전제 조건이 있어.”
“……제가 성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요?”
“그래, 맞아.”
“알겠어요. 이젠…… 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수련해야겠네요.”
스완을 나자르로 오인한다면 로빈은 절대 스완을 죽이지 못한다. 나자르를 함부로 죽여, 죗값을 받게 된 멍청한 인간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면.
“뱀은 은신도 가능하고 힘도 갖고 있지. 동맹도 연합도 없는 주제에 모든 이종족이 그의 눈치를 본다. 심지어 폐하의 동맹인 우리까지도 놈을 함부로 대하지 못해.”
“…….”
“그는 네게 가장 큰 보호막이 될 거란 소리야, 스완.”
“네.”
“그럼 각자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겠지? 앤디 경, 스완.”
“예.”
“네.”
스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겠네. 그간 꼼수를 부렸던 건 아니지만, 솔직히 죽을 만큼 노력했던 것도 아닌 터라……. 스완은 제 뒷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앤디가 서 있는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무렵이었다.
“스완.”
“예?”
“조금 전에 내가 네게 한 말은 거짓이 아냐. 널 강하게 키우겠다는 협박도 아니고.”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네 존재가 폐하께 해가 된다면, 나는 주저하고 있을 동맹들을 대신해 널 처단해야 한다.”
스완은 씁쓸한 듯 주먹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녀의 동맹인데……. 종족 자체는 그렇지 않기에 이렇게 배척당하게 된 걸까. 받아들이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 날 막아 줄 존재는 로빈뿐이야.”
“…….”
“뱀은 강해. 강하고 교활하지. 아이러니하게도 널 가장 완벽하게 지켜 줄 테니까.”
“네.”
“그러니까 부디 내게서 잘 살아남도록 해라.”
“무슨 그런 살벌한 말을 안부 인사하듯 가볍게 합니까?!”
패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완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소리 하자, 긴장이 풀린 스완이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툴툴거렸다.
“어, 맞아. 안부 인사야.”
“네?”
“안부 인사처럼 당연하고 가벼운 거라고.”
“…….”
“별거 아니니까. 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말만 남겨 놓고 패티스는 두 사람보다 먼저 집무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격려와 칭찬에 스완은 넋이 나갔고 앤디는 제 볼을 꼬집었다.
“지금…… 패티스 님이 널 응원하신 거냐?”
“…….”
“야. 스완. 내 말이 맞냐고.”
“…….”
“저거 완전 얼이 나갔네, 쯧.”
앤디의 말처럼 스완은 한참이나 넋 나간 상태로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