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62화 (362/488)
  • 362화

    ‘공작님. 예상하지 않으셨나요?’

    ‘…….’

    ‘놈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모두 빼 먹었으니 더 이상 살려 둘 필요는 없죠.’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나?’

    ‘믿지 않으시면요?’

    ‘…….’

    ‘설마 폐하의 궁을 뒤져 보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폐하께 인정을 받은 동맹족도 아닌 분께서.’

    왜 그녀가 저놈을 황제의 대리인으로 황궁에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린놈이라고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패티스의 화려한 언변에 로빈조차 말이 막혔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자신이 아니다.

    ‘그렇게 내가 의심되면 백작도 함께 들어가면 될 게 아닌가?’

    ‘저 역시 그러고 싶습니다. 대체 공작님께서 무슨 이유로 렉토스를 만나고자 하시는지, 저 또한 궁금하니까요.’

    ‘근데 왜 거절하는 거지? 폐하의 명령 때문인가?’

    ‘공작님. 제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듣지 않으셨군요.’

    ‘…….’

    ‘이미 죽은 자를 무슨 수로 데려옵니까. 시신조차 어디 있는지 모르는걸요.’

    순간적으로 패티스에게서 제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로빈은 짜증을 눌러 참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한편 정말 기회를 놓친 게 아쉽다는 듯 웃던 패티스는 로빈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나긋이 제안했다.

    ‘근데 정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셔서 놈을 찾으신 겁니까?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압니까? 제가 공작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을지요.’

    ‘내가 동맹족도 아닌 하이에나에게, 그걸 말해 줄 것 같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공작님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더는 대화할 필요가 없는 듯하군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정말 궁금했더라면 몇 번이고 저를 잡았을 텐데, 패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로빈을 내쫓았다. 뿐만 아니라 황궁 곳곳에 경비 단계를 높여, 회의 기간 내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로빈은 렉토스를 만나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확실한 수확은 있었다. 그곳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것이다.

    “왜 날 보고 도망쳤을까.”

    경비 단계를 올렸다고 해도 로빈은 포기하지 않고 렉토스를 찾기 위해 황궁 안을 돌아다녔다. 물론 대다수의 입구들은 기사단과 하이에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황궁 안 어딘가에 렉토스 놈이 잡혀 있을 거란 추측에 힘을 싣게 됐다.

    그러던 차에 후원 근처를 지나다 누군가와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로빈은 보지 못했으니까. 그 누군가가 로빈을 먼저 알아보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버린 것이다.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로빈은 그가 같은 공간에 있었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정말 빠르게 사라졌다.

    로빈이 고작 알게 된 거라곤 분홍빛 머리카락이라는 단서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 하이에나가 후원의 출입을 막았었지.”

    패티스가 금서의 내용이 알고 싶다며 자신을 제도로 불러냈다. 그때 공사 중이라며 후원의 출입을 막았었는데…… 그게 공사가 아니었나? 자신이 보면 안 되는 무언가가 후원에 있었던 건가?

    사실 별것 아닐 수 있는데도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찰나에 느껴졌던 그 오묘한 성력 때문에.

    물론 제도와 황궁은 성력이 가장 크게 머무르는 곳이다. 오드와 성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오드의 성력을 빌려서 쓰는 성전기사단이 경비를 맡고 있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황궁 어딘가에서 성력이 느껴진다고 한들 크게 이상할 점은 아니었다.

    “근데 그 느낌은…… 마치 나자르를 볼 때와 비슷했단 말이지.”

    모든 인간과 이종족들이 나자르를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직접적인 신의 대리인이기 때문도 있지만, 정말 신을 대면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도 있었다.

    이를 테면 나자르가 자신의 속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감.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아볼 것만 같은 두려움. 로빈처럼 신을 멀리 떠난 자들일수록 그를 마주하는 게 불편하고 꺼려지는 건 당연했다.

    근데 그 잠깐의 순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아주 짧은 찰나에 오드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철렁였다면?

    물론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다. 오드가 근처에 있었다던가. 단순한 우연들이 빚어낸 결과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지금 상황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한다. 죽은 줄 알았던 황녀가 멀쩡히 살아남아 황제가 되었고, 멸족한 줄로만 알았던 재규어가 동족을 모아 작위까지 하사받았다. 마찬가지로 멸살됐다던 나자르 역시 살아남지 않았던가.

    그래, 나자르.

    “혹시 또 다른 나자르라면? 오드 외에 다른 나자르가 한 명 더 살아 있었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정말 전세가 역전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일한 나자르인 오드의 절대적인 지지가, 나타니엘을 황위에 앉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호석의 생성과 파괴가 전적으로 나자르에게 달린 터라, 성전의 권세가 이전 제국보다 커졌고 인간과 이종족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나자르의 말에 순응했다.

    인간 같지 않았던 냄새. 그렇다고 이종족으로 보기엔 머리카락 색이 보기 드문 편이었고, 특히나 귀족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황제의 동맹 중엔 저런 머리색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경계하는 패티스의 태세가 수상쩍은 건 물론이고.

    나자르는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니 억측은 아닌 셈이다.

    “우선은 리플을 기다려야겠군.”

    그놈이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로빈은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자르라면……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고.

    *

    “그걸 왜 지금 말해.”

    패티스의 서늘한 목소리에 집무실 문을 닫던 앤디가 마른침을 삼켰다. 와. 내가 혼나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살이 다 떨리냐……. 그는 고요해진 집무실 안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스완을 쳐다봤다.

    “넌 내 말이 우습나?”

    다시 한 번 패티스가 노성을 억지로 눌러 참은 듯한 목소리로 스완의 정신을 깨웠다.

    “죄송합니다.”

    끝내 스완의 입에서,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문장이 튀어나왔다. 그에 놀란 건 되레 앤디였다. 저놈이 뭍으로 나온 뒤로 저런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있던가. 폐하와 목숨이 이어졌다는 것을 방패 삼아 온갖 이종족들 앞에서도 목을 빳빳이 쳐들던 놈이었는데.

    “이번 일은 정말…… 제가 면목이 없어요.”

    “…….”

    “늦게 말씀드린 것도 죄송합니다.”

    기운 없이 고개까지 푹 숙인 게 퍽 안쓰러웠지만, 이번 일은 앤디가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저 건방진 놈이 언젠가 한번은 큰코다칠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게 진짜로 벌어질 줄이야. 그것도 하필 뱀이라니.

    “로빈이 널 봤나?”

    긴 침묵 끝에 나온 짧은 질문에 스완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주 멀리서 마주쳤는데 제가 먼저 발견하곤 숨어 버렸으니까요.”

    “확신할 수 있나?”

    “확신……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요……. 바로 들킨 건 아닐 거예요…….”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패티스의 눈치를 살폈다. 패티스는 긴 한숨을 쉬며 피곤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린 채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귀족회의가 열렸던 그 기간 동안 스완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제 탓도 있다. 몇 달 전, 금서의 내용을 알기 위해 로빈만 제도로 불렀을 땐 후원의 출입을 막으면서까지 스완의 정체를 숨겼는데……. 결국 그때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얌전히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못 참고 기어 나와? 패티스는 머리 꼭대기까지 솟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숨을 골랐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귀족회의가 끝난 뒤 피시는 곧 도착할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하이에나의 영지로 돌아갔다. 원래 계획은 스완도 피시와 함께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이엘을 기다리다가 그녀에게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그랬다면 지금 사태를 해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라도 저놈이 솔직히 말한 것에 안도해야 하는 걸까.

    골머리를 앓는 패티스를 힐끗 쳐다보던 앤디가 조심스레 운을 떼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다.

    “저기, 패티스 님.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죠? 스완이 먼저 발견하고 숨었다고 했잖아요. 아마 못 봤을 겁니다. 뱀은 시각이 뛰어난 편도 아니니까요. 거리도 꽤 멀었고요.”

    “…….”

    “그리고 로빈이 스완을 알아봤다고 한들, ‘백조’라고 생각하진 못할 겁니다. 고니가 저주 때문에 호수에 발이 묶여 뭍으로 올라올 수 없다는 건, 로빈 같은 이종족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잖습니까. 게다가 나자르의 보호 때문에 고니에 대한 기억은 흐릿한 상태이고요.”

    그러니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혀 달라는 의미였다. 앤디는 답지 않게 기죽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스완을 힐끔 봤다.

    쯧쯧. 또 저러고 있으니까 괜히 신경 쓰이네. 최근에 겨우 패티스의 신뢰를 받게 됐다고 뿌듯해하던 게 선명한데. 앤디는 철없는 동생 변호하듯 다시 한 번 패티스를 설득하려 했다.

    “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나?”

    “예?”

    싸늘한 패티스의 목소리에 앤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내 상관도 아닌데 왜 내가 이런 기분을 겪어야 하는 거냐고. 스완 저놈이 내 동족도 아닌데 난 또 왜 저걸 변호하려 했고. 속으로 몇 분 전의 제 모습을 탓하며 반성했다.

    “그래, 고니. 경의 말대로 고니의 존재는 흐릿하니 저놈을 보고 곧장 고니를 떠올릴 리 없지.”

    “…….”

    “먼 곳에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과연 그럴까?”

    “…….”

    “경은 지금 아무것도 안 느껴져?”

    무슨 말씀이신지……. 돌연 제게 쏟아진 문책에 기가 죽은 앤디가 눈을 껌뻑거리다가 패티스의 고갯짓이 향하는 쪽을 쳐다봤다. 패티스의 시선은 스완을 향하고 있었다.

    “저 백조에게서 아무것도 안 느껴지냐고.”

    “어떤 걸 느끼…… 아.”

    저도 모르게 짧게 탄식했다.

    “스완. 네가 직접 보여 줘.”

    “……예.”

    패티스의 차가운 말에 스완이 소파에서 일어나 앤디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앤디는 스완에게서 새하얀 빛이 퍼졌다가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