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거짓말. 저 약은 놈이 전부를 말했을 리 없다. 적당히 저 살아갈 궁리만 하는 놈이 다 토해 냈을 리 없지. 노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유클리드를 한참 노려봤지만, 그는 휘파람을 불며 노아의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신의 것을 훔쳐 달아나는 바람에…… 신과 멀어졌다는 건가? 단순히 살육에 미쳐서 신과 멀어졌던 게 아니라?
용.
이것도 신의 뜻인가? 신의 계획에 용도 포함됐을까? 여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암컷 용이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보기 힘든 수컷 용까지 한 마리 더 추가됐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도 그들이 전부 나타니엘을 필요로 해. 우연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게 뭔지 정말 말해 주지 않을 건가?”
“글쎄, 난 모른다니까.”
“훔쳤다고 표현한 걸 보면 신의 것일 테고.”
“…….”
“네가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용뿐만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도 탐낼 만한 것이라는 뜻일 테고.”
“제법 그럴듯한 추리인데?”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건, 그게 있어야 승기가 확실하게 우리 쪽으로 돌아온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예리하지만 이제 그만. 네게 말해 줄 생각 없으니 그만 얘기해.”
그렇게 말한 유클리드는 노아의 말을 아예 듣지 않겠다는 듯, 다른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노아는 이종족들 사이로 사라진 유클리드의 흔적을 찾다가 우연히 시선이 밀로와 킨에게 닿았다.
여전히 희희낙락하는 킨과 그 옆에서 짜증을 내고 있는 밀로의 모습이 지금의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질적인 존재인 두 용을 바라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아무래도 밀로 놈과 제대로 얘기해 봐야겠다. 그리고 저 킨이라는 놈 역시.
*
“폐하께, 언제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백작도 탈 없이 돌아가길 바라오.”
이엘의 검지 위, 녹색 반지에 입술을 짧게 묻었다가 뗀 유클리드가 노아를 힐끗 보며 피식 웃고는 순식간에 스라소니로 변했다. 그러곤 볼일이 끝났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이카르의 영지를 빠져나갔다.
“아무리 동맹이 아니라고 해도 저렇게 예의가 없다니. 지난 며칠간 저를 돌봐 준 게 누군데! 안 그렇소, 대장?!”
“시끄러워. 폐하께서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야.”
“내 말이 틀렸습니까? 하다못해 고맙다는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지.”
“스라소니한테 뭘 바라냐.”
이카르의 퉁명스런 대꾸에 재규어들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흥, 콧소리를 내고 떠나는 일행의 짐을 옮기기 위해 자리를 비켰다. 이엘은 그들의 대화를 뒤에서 듣고 있다가 작게 웃으며 이카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이카르.”
“이해한 거 아닙니다. 적선한 셈 치는 거죠, 뭐.”
“어쨌든. 유클리드가 이곳에 머무는 게 못마땅했을 텐데 큰 문제 삼지 않아 줬잖아. 그게 고맙다는 거야.”
“제가 제도에 자주 가지 않아서 잊으셨나 본데, 저도 엄연히 폐하의 동맹입니다.”
“알아. 내가 설마 그걸 잊었을까?”
“그리고 그 이전에 전 폐하의 보호자입니다.”
“…….”
“그러니까 고맙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라구요.”
이카르가 전혀 서운하지 않은 얼굴로 서운하다며 투정을 부렸다. 이엘은 그를 보며 웃어 주다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사단들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걱정됐던 건지, 이카르는 지휘권을 수하에게 아예 넘겨주고는 이엘의 곁에 붙박이듯 섰다.
“폐하. 왜 그렇게 심란한 표정을 지으십니까? 역시 제가 폐하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죠?”
사실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기사단의 수가 처음 영지 시찰을 떠날 때보다 확연히 줄었다. 일단 2기사단의 단장인 일라이저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고, 아마 몇 개의 영지를 더 지나야 합류할 듯했다.
그가 남겨 두고 간 2기사단원들이 적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그들의 지휘를 이종족인 하트나 르네가 맡고 있기에, 일라이저가 통솔할 때보다는 완벽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원래도 몇 안 되던 늑대들 역시 상당수가 알폰스와 함께 늑대의 영지로 돌아간 상태였다. 노아가 올리세스와 했던 계약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그곳에서 올리세스의 상단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늑대들은 1기사단에 포진해 있었고, 그 1기사단은 앤디와 함께 제도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선 대부분이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노아의 판단하에서였다.
물론 르네와 독수리 일부가 합류했으나 그들은 근위대나 황실기사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엘의 호위를 전적으로 맡기기엔 불안했다. 그런 면에선 혼자서도 일당백을 해내는 이카르가 꼭 필요한 실정이긴 했다.
“아니, 괜찮아. 지금 전력으로도 충분하니까.”
이엘이 웃으며 거절했다. 노아도 돌아왔고, 일라이저도 곧 합류할 것이다. 불안해 보이긴 해도 독수리와는 건국 이전에도 여러 번 연합해 전쟁을 치렀던 경험도 있다. 게다가 근위대장인 하트가 한시도 이엘의 곁을 떠나지 않으니 문제될 건 없다.
“백작은 영지 일에 신경 써. 나는 괜찮으니까.”
“이깟 영지가 뭐라고요. 대충 살면 되죠. 땅도 없이 떠돌이처럼 지내던 때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감사한 겁니다. 더 신경 쓸 것도 없어요. 그리고 제겐 영지보다 폐하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면 안 돼.”
“…….”
“백작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그대 아래 달린 재규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그대가 짐의 보호자가 된 것과는 별개로 짐을 위해서만 살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녀의 냉정한 지적에 이카르는 할 말을 잃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결과였다. 패티스가 이카르의 동족을 찾아 주겠다고 말했을 때, 그때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재규어들을 모아 그들의 수장이 되면, 전처럼 이엘의 곁만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대를 탓하려는 게 아냐. 내 말 이해하지?”
“네.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건지 알아요.”
재규어는 중요한 전력이었다. 각 개체 하나하나가 공격력이 높았고, 토벌당하기 전에는 최상위 이종족 중에서도 그 상위에 속했던 종족이었으니까. 인간들의 눈에 거슬릴 만큼 월등한 종족이었다.
몇 마리 남지 않은 상태인 지금도 다른 이종족들은 이카르의 영지에 눈길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개체수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도 알려지지 않아, 존재만으로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동족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도 제국에 큰 힘이 되는 것이라고, 이엘은 돌려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 고집을 꺾을게요.”
“고맙네, 이카르 백.”
“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무사히 제도로 귀환하시기를, 이곳에서 기도하겠습니다.”
“후후, 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네.”
그 말을 마친 이엘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하이에나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녀를 태운 하트는 무리의 선두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느 정도 정돈이 끝나고 떠날 채비를 마친 이종족과 기사단들이 그녀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럼. 곧 다시 만나자.”
“예, 폐하!”
씩씩하게 대답하는 재규어들에게 짧게 웃어 준 이엘이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평야에서 대기하던 독수리들이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고, 늑대와 하이에나를 포함한 이종족들은 소복이 쌓인 눈 위를 내달렸다.
“갑자기 조용해지니까 좀 쓸쓸한데요.”
그녀의 무리가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이카르의 시선은 평야 쪽을 향한 채였다. 며칠 전에 왔던 눈이 녹지 않은 터라 그 위에 수많은 발자국들이 엉망진창으로 엉겨 있다. 발트의 말처럼 갑자기 조용해진 영지 안이 퍽 쓸쓸하게 느껴진다.
“귀찮긴 해도 오랜만에 영지가 시끌벅적해서 좋았거든요.”
“발트. 네가 그런 감상을 남겨 놓으니까 좀 이상한데.”
“대장. 대장은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요?! 감성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종족 주제에 뭔 감성이야. 이게 며칠 인간들이랑 부대꼈다고 인간이라도 된 줄 아나. 정신 차려라.”
“아, 또 뭔 인간입니까. 기분 나쁘게.”
투덜거리는 발트의 등을 툭툭 쳐 주고는 이카르도 웃으며 돌아섰다. 곧 만나자고 하셨으니 금방 만날 수 있겠지. 어차피 영지 일도 차근차근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조금만 더 자리 잡으면 발트나 다른 재규어들에게 영지를 맡겨 두고 그녀의 곁에 합류하면 되겠지. 그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저택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
“예? 분홍색 머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확실해. 분홍색 머리였어.”
로빈의 말에 리플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분홍빛 머리가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것도 아니다. 특히 적발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흔한 편이라, 제 주인인 로빈이 햇빛 아래서 잘못 봤을 수도 있단 생각을 잠깐 했다.
“적발은 아니야. 그것과는 달라.”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로빈이 가지런히 넘겼던 머리를 손으로 헤집으며 부정했다.
“알겠습니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종족이 확실했습니까?”
“그래, 아마도. 인간 냄새는 아니었으니까.”
“예.”
명령을 받은 리플이 집무실을 나갔다. 로빈은 커프스단추를 풀곤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팔로 제 눈을 가린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도에서 열린 귀족회의로 인한 여독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라 꽤 피곤했다.
황제가 없는 귀족회의에 굳이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 다른 종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차피 무늬만 귀족회의일 뿐, 사실상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한 자리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로빈은 그녀 없이 하이에나가 주인이 되어 열린 귀족회의에 참석했다. 렉토스와 접선하기 위해.
그러나 역시 놈을 만나지 못했다.
“정말 죽였나?”
놈이 쓸모를 다했으니 죽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렉토스는 인간치고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로빈조차 놀라지 않았던가. 세잔티노 사건 때 렉토스를 납치해 왔던 건 특별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놈이 그렇게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줄은, 로빈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든 게 우연이었다.
어쨌든 렉토스의 처분은 이제 앤디와 패티스에게로 넘어갔다. 황제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그 두 집단이 놈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면, 설령 지금은 살려 뒀다 하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죽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놈과 대면하고 싶어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던 건데.
‘죄송하지만 이미 처리했습니다.’
하이에나의 어린 백작 놈은 기분 나쁜 낯짝으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렉토스에게 할 말이 있다며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는 제 요구를 가볍게 깔보듯, 패티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