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억측이다.”
“맞아, 억측. 그러니까 폐하께도 말하지 않았고 다른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심지어 나자르인 오드 님에게도.”
“…….”
“말했잖아. 그냥 내 추측이라고. 왜 이렇게 멸망해 가는 땅에 나타니엘이라는 인간 여자가 혼자 살아남았을까, 고민하다가 내린 내 추측.”
유클리드는 언제 진지했냐는 듯, 다시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돌아가 낄낄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인내심이 바닥이 난 노아가 견디지 못하고 그를 닦달하려던 차에, 유클리드는 노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네게 이 이야기를 하는 건, 나조차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야.”
“…….”
“아까 네가 그랬지. 나는 기껏 올라온 게 이 자리지만, 너는 좌천된 게 이 자리라고.”
“…….”
“그 얘긴 여전히 나보다 네가 폐하께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소리이고, 달리 말하면 네가 진실에 더 접근할 수 있다는 소리다.”
“유클리드.”
“난 이미 저 여자를 선택했어. 물론 올리세스 따위가 감히 내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꼴이 역겹고 우스워서 등 돌린 것도 맞지만, 어쨌든 난 폐하를 선택했어.”
“…….”
“그러니까 이 전쟁. 무조건 폐하의 승리로 끝나야 돼. 나타니엘이 이겨야 한다고.”
대물림. 그래, 거래 조건이 첫아이였기에, 첫아이가 미완의 거래를 이어받아야 했던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녀가 정말 첫째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타니엘조차 자신이 동생이고 아르세니온이 오빠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유클리드의 말처럼 선황후가 미리 손을 써 두었다는 소리가 된다. 쌍둥이는 날 때부터 서로의 위치를 다르게 알고 자란 거고.
유클리드의 추측이 맞다면, 선황후는 산실에 들어왔던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그들을 도망치게 한 것이다. 이엘이 먼저 태어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되니까.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사랑하는 쌍둥이를 모두 지키기 위해서였겠지.
그 얘기는 곧, 선황후가 진실을 선황에게도 숨겼다는 소리가 된다. 황녀와 황자를 온전히 지켜야 할 세력엔 귀족들뿐 아니라 탐욕스러운 선황도 포함되었을 테니까.
“근데 마지막 신탁에 관한 내용을 어디서 찾지.”
“…….”
“노아. 넌 황실에 있는 황실도서관에 들어갈 자격이 되잖아. 네가 좀 알아봐.”
“…….”
“대답 좀 해 주지 그래?”
그러나 노아의 귀엔 유클리드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머릿속에 지금까지의 단서들을 조합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래,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자.
만약 정말로 황자가 먼저 태어났더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쌍둥이가 흔한 건 아니지만, 제국법대로 첫째인 황자가 승계하고 둘째인 황녀는 평범하게 살아가면 됐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황녀가 먼저 태어나 버렸다. 이렇게 되면 원치 않아도 파벌 싸움이 생길 수 있다.
첫째와 사내. 자기들이 만든 두 가지 악습이 충돌하게 될 테니까.
게다가 나타니엘은…… 몸이 약해. 노아가 곁에서 지켜본바, 그녀는 신체가 건강함에도 잔병을 달고 살았다. 어릴 때부터 오드가 함께 있었음에도 잔병치레를 했다는 건, 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원래대로라면 승계할 수 없는 여자아이. 그것도 몸이 좋지 않아, 누군가 지켜 주지 않으면 금세 죽어 버릴지 모르는 연약한 아이. 함께 피를 나눈 쌍둥이 황자가 혹여 황녀를 죽이는 세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어미로서의 불안감.
그래서 아이를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가장 안전한 방법인, 황자를 첫째로 만들어서.
그다음 계획은 마음은 아프겠지만 쌍둥이의 안전을 위해 황녀를 다른 가문에 입적시키는 것이었겠지. 하지만 불발됐다. 선황이 적극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에.
왜지? ‘목소리’와의 계약 때문이라기엔 시간대가 맞지 않은데. 리노와 로빈의 말로 비추어 보면, 선황이 ‘목소리’에게 바칠 제물로 아이를 고르게 된 건 쌍둥이가 태어나고 몇 년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보통 귀족들이 첫째로 태어난 딸을 입양 보내거나 약혼시키는 기간은 아이가 태어난 직후다. 그게 뒤탈을 막기 쉬우니까.
아마 선황후도 쌍둥이가 태어나자마자 곧장 아이를 바꿔치기했고 산실에 들어왔던 자들을 모두 내쫓았으며, 나타니엘을 바로 입양 보낼 준비를 했을 것이다. 딸이 둘째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도, 황녀라는 위치는 보통 귀족 영애와는 다르니 위험을 이중으로 막기 위해 입양 보내려 했겠지.
그러니까 시기가 맞지 않는다. 황제가 ‘목소리’와의 계약으로 첫아이가 필요했던 건 쌍둥이가 태어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쌍둥이가 태어난 직후엔 그다지 필요 없었을 텐데. 왜 황녀를 입양 보내는 것을 말렸지? 왜 거절한 걸까.
어쩌면 그게 신탁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유클리드가 말한 그 마지막 신탁. 그게 뭔가 중요한 포인트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의 정신을 나긋한 유클리드의 목소리가 깨웠다.
“저것들한테 물어볼까.”
“저것?”
“용 말이야. 저거 용이잖아.”
“넌 저게 용이라고 생각하나?”
“속일 사람을 속여. 내가 용도 못 알아볼까 봐?”
유클리드는 어이없다는 듯 노아를 쳐다보며 비웃었다. 아무리 자신이 동맹족이 아니라 경계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다니, 쯧.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용이 좀 특이해? 이종족이지만, 우리와 같은 이종족이 아닌데.”
“…….”
“폐하께서도 알고 계셔? 저게 용이라는 걸.”
“글쎄.”
“흐음,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니까? 어차피 저것들이 용이든 아니든 난 상관없어.”
“…….”
“다만 저게 용이라면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래.”
“뭔데.”
“너도 알잖아? 용이 원래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는 것.”
아, 설마 신탁을 말하는 건가? 지금은 아니어도 과거엔 신과 가까웠던 존재이니, 마지막 신탁의 내용을 저들에게서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고니인 스완이 성력을 쓰면서, 동시에 나자르 고유의 예지를 조금이나마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저 용들도 신탁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읽은 건지, 유클리드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노아. 설마 신탁의 내용에 대해 물어볼 생각은 아니지? 그건 쟤들도 모를걸.”
유클리드의 말에 김이 빠졌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에겐 저 용들 말고도 백조가 있으니까. 어쩌면 스완의 아버지라는 놈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클리드의 말에 대충 대답해 주었다.
“그럼 네가 물어본다는 건 뭐지?”
“아아, 난 암컷의 행방.”
“……설마 용의 암컷을 말하는 건가?”
“응.”
“…….”
“용의 암컷은 모든 판도를 바꿔. 걔들은 모르는 게 없거든.”
역시 유클리드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노아를 비롯한 이종족들 중에 암컷 용의 존재에 관해 언급했던 자가 있었던가? 아니. 모두 잊고 살았다. 심지어 밀로의 존재를 알고 있던 자들도 암컷 용들의 존재는 확신하지 못했다.
반면 유클리드는 밀로와 킨의 존재가 용이라고 단언했을 뿐 아니라, 본 적도 없는 암컷의 존재까지 확신하고 있었다. 살아온 시간을 무시할 수 없는 건가.
그 순간 노아의 머릿속엔, 일이 어그러지게 되면 유클리드의 목부터 곧장 쳐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저놈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 되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 전에 먼저 죽여야겠지.
동시에 이엘의 선견지명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게 유클리드였으니까. 끌어들여야 할 아군 중에 스라소니만 한 종족은 없다고 했던 말이 불쑥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마치 날 죽일 것처럼 쳐다보네.”
“…….”
“뭐야. 왜 부정 안 해?! 정말 날 죽일 생각이었어? 이럴 수가. 이딴 놈이 동맹인 곳에 내 발로 들어왔다니.”
“그건 너도 똑같지 않나, 유클리드? 이 관계가 깨지면 어차피 너와 난 생존을 위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종족인데.”
“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동족도 없이 혈혈단신인 날 그렇게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줄래? 무섭거든.”
무섭기는 무슨. 오히려 즐기고 있는 주제에.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클리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경고하듯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그러나 강하게 말했다.
“네 존재가 거슬린다면 난 지금 이 자리에서도 널 죽일 수 있어.”
“이야, 그건 정말 무서운데?”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폐하께서 널 왜 받아들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여전히 네가 동맹이란 생각은 안 한다.”
“흐음.”
“그러니까 수작 부리지 말고 입 닫아.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넘어가니까.”
“너무하네. 나의 폐하께서도 날 거둬 주셨는데, 폐하의 미움을 받는 네가 날 의심하다니 말이야.”
“…….”
“뭐, 좋아. 날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 애초에 난 너희랑 동맹을 맺은 게 아니라 폐하와 동맹을 맺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유클리드는 노아의 매서운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흔흔히 웃었다. 그러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더니 밀로와 킨이 떠들고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다만 네가 정말 당장이라도 내 목을 틀어쥘 것 같아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내가 아는 정보를 하나 알려 줄게.”
“…….”
“저것들이 정말 용이라면. 절대 놓치지 마.”
“왜지? 용은 공중전에 강하니까?”
“아니. 그래 봤자 용이야. 우리가 떼로 몰려들면 저 두 마리는 속절없이 무너질 거야. 난 그 의미로 놓치지 말라는 게 아냐.”
“…….”
“노아. 왜 암컷 용과 수컷 용이 따로 살고 있는지, 넌 알아?”
“신께서 수컷을 버리셨으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정답은 수컷들이 신을 속이고 도망쳤거든.”
마치 재미있는 동화를 이야기하듯 유클리드는 연신 웃음꽃이 핀 채였다. 그 내용은 꽤 무겁고 심각했음에도 스라소니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근데 걔들이 도망칠 때 뭔가를 훔쳤대.”
“그게 뭔데.”
“그건 나도 몰라.”
“…….”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나도 최대한 아는 걸 얘기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