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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9화 (359/488)
  • 359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클리드는 저 인간 여자가 좋았다. 그녀가 유일한 암컷이기에 본능적으로 끌린 것도 맞지만, 그런 조건이 아니었어도 유클리드는 저 여자에게 끌렸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암컷 스라소니와 나타니엘, 단둘이 살아남았어도 유클리드는 저 여자를 선택했을지 모른다.

    그래. 욕심이 난다. 저 고집스러운 여자의 시선이 결단코 자신을 향할 리 없다는 걸 잘 아는데도, 승부욕이 생겨서. 유클리드는 그녀가 몹시도 탐이 났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시선은 여전히 이엘에게 고정시킨 채 노아를 향해 운을 뗐다.

    “폐하께서 부군을 뽑는다는 소리가 제국 내에 파다하다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

    “이번 영지 시찰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황제의 진짜 목적은 그간 비워 두었던 부군 자리에 맞는 수컷을 찾는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어.”

    노아도 이미 알고 있는 소리였다. 그가 머물렀던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까지 그 소문이 돌았으니까. 그녀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뜨렸을 테지만, 사실 그것마저 이엘이 의도한 바였다.

    상대를 방심시키기엔 자신의 약점을 보여 주는 것만큼 효율이 좋은 일도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이엘은 부러 그걸 노리고 부군 자리를 3년이 넘게 비워 두었다. 자신의 속이 타들어 가는 걸 알고 미안해했음에도.

    ‘서운해?’

    ‘아닙니다.’

    ‘서운한 것 같은데.’

    ‘…….’

    ‘그대가 그럴 때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내게 이러는 거지?’

    왜 서운하지 않았겠는가. 그녀의 옆자리는…… 자신의 것이다. 사랑하기에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 자리를 뺏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이엘이 자신을 불러 서운하냐 물었을 때, 노아는 저도 모르게 그렇다며 마음의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물론 꾹 눌러 참은 보람도 없게 그녀에게 금방 들켜 버렸지만.

    ‘공식적으로 줄 순 없지만, 내 마음이 노아를 향한다는 걸 부디 잊지 마.’

    ‘…….’

    ‘미안해. 날 위해 무엇이든 해 주는 그대에게, 그 자리만큼은 꼭 주고 싶었는데.’

    ‘아닙니다, 폐하. 옹졸한 제가 쓸데없는 질투를 한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급한 제 대답에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의 이엘은 영원히 줄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저를 달랬다. 상황이 마무리되면 언제든 그대에게 줄게, 라고 허울뿐인 말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건데도 이엘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 않다는 듯.

    그렇다고 그녀가 변심했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자주, 그 사랑을 표현하는걸.

    단지 포기했던 거다. 그때 나타니엘은 지독한 상황에 갇혀, 언젠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시한부 인생처럼…… 자신의 삶을 포기했던 거겠지. 그러니 미래를 그리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지금은 어떨까…….

    ‘다행이네요. 폐하께선 미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신 모양이니.’

    태어날 아이에 관해 오드를 찾아가 물었을 때, 나자르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엘이, 미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고. 즉위 직전까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그’에게 시달렸던 그녀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기 위해,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폐하께선 공작의 생각보다 훨씬 더, 노력하고 계십니다.’

    노아는 오드의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와 아이를 모두 살릴 수 있지? 이엘이 포기하지 않은 그 미래를, 어떻게 하면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걸까…….

    “노아.”

    “…….”

    “노아. 내 말 안 들려?”

    “…….”

    “이거 완전히 술에 취했네. 정신 좀 차려 봐.”

    한편 유클리드는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노아가 술에 완전히 절었다고 생각한 건지 혀를 쯧쯧 찼다. 황제가 이곳에 들어온 뒤로 저 늑대의 번민이 극에 달한 듯했다. 늑대는 웬만해선 술에 잘 안 취한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로 취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건지……. 쯧, 너도 참 가련한 처지다.

    “사실 나도 폐하의 부군 자리가 탐이 나긴 해.”

    그래서 유클리드는 제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는 노아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 냈다.

    “허울뿐인 첩 자리라도 말이야.”

    “…….”

    “권력욕 따위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개인적으로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은 있거든.”

    전쟁광에 미친놈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던 자신이 겨우 인간 여자에게 이런 평범한 감정을 갖게 됐다고 하면 다른 종족들이 뭐라고 할지……. 그러나 유클리드는 흐릿하게 웃으며 상석에 앉은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에 우리가 2차 전쟁으로 전세를 뒤집지 않았더라면, 너와 내가 저 여자를 바라볼 수나 있었을까?”

    “…….”

    “지금쯤이면 황녀였던 그녀는 어떤 귀족의 부인이 되어 우리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겠지? 더러운 이종족이라면서.”

    유클리드는 인간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모멸의 시선을 보내는 것에 무감했다. 아주 어릴 때나 화가 나고 억울했지, 오래 살다 보면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는 게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는 걸 깨닫게 되는 법이다.

    적당히 인간과 타협했다. 인간이 이종족을 멸시하고 박해했지만, 결국 그들도 이종족과 공생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종족도 필요했다. 그리고 스라소니는 그 자리를 자처했다. 그게 살아남는 방식이었고.

    “내가 왜 여길 왔는지 궁금하지? 왜 폐하께 올리세스의 정보를 다 넘기는 건지도.”

    뱀처럼 태세를 쉽게 전환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암컷에 몸이 달한 처지도 아니었다.

    “난 신을 썩 믿지는 않지만, 신의 위대함은 잘 알고 있거든. 신이 한번 결정한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도. 오래 살면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

    “하지만 그 신이 유독 인간을 사랑하니까. 인간을 전부 죽이고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건, 끝내 인간을 놓지 못했다는 뜻이거든.”

    “…….”

    “이 세상이 아직 존재한다는 건, 아직 신의 희망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뜻이야.”

    그즈음 노아가 잠겨 있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어떻게 해도 자신으로서는 그 해답을 찾지 못할 거라는 판단에서. 그러나 여전히 유클리드의 헛소리는 반쯤 흘려들으며 신경 쓰지 않은 채였다.

    “난 그게 폐하라고 생각해. 그녀는 신의 마지막 선택이고 희망이야.”

    “…….”

    “아마 폐하가 죽어 버리면 이 세상은 정말 끝날 거야.”

    “당연한 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오랜만에 들린 노아의 목소리에 유클리드가 반색하며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늑대는 조금 전보다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유클리드는 시큰둥한 노아의 반응에 낄낄 웃더니 들고 있던 나이프를 손안에서 장난치듯 휘휘 돌리며 설명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냐. 유일한 암컷이 죽었으니 번성하지 못하고 모조리 멸망할 거란 소리가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뭔 소리야.”

    “선황이 살아 있을 때, 항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단 말이야? 선황이 자기 아이들을 학대한다고.”

    “그건…….”

    “그러면서도 감싸고돌았지. 황후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쌍둥이 중 둘째를 다른 가문으로 입적시키려 했지만, 그것을 철저히 묵살하며 제 곁에 쌍둥이를 두었어. 한시도 제 옆을 떠나지 못하게.”

    “…….”

    “그래서인지 이상한 소문이 돌았던 거야. 사실은 쌍둥이 중 첫째가 황녀 아니냐는.”

    술에 취했던 정신이 완전히 깨어났다. 유클리드의 말이 근거 없는 헛소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자신의 귀가 점점 그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빠르게 두 파벌로 나뉘어졌다더군. 각각 황자와 황녀를 지지하는 쪽으로.”

    “……황자는 일찌감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전쟁 직전까지 황위계승권은 황녀에게도 있었어.”

    “…….”

    “사실 황제도 몰랐던 것 아닐까? 누가 첫째인지.”

    “무슨…….”

    “황후가 아이를 낳을 때 산실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도망치듯 황궁을 나갔다고 하더라고.”

    나타니엘이 첫째일 수도 있다고? 노아의 새카만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래서 난 황후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

    대물림…….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노아의 머릿속에 파고든 건 대물림이란 단어였다. 왜 선황의 대물림이 이엘에게 갔을까? 처음엔 아르세니온이 죽었으니 남은 선황의 자식이 이엘뿐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다면. 그 황자가 지금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게 정말 맞다면, 왜 이엘이 그 대상이 됐을까? 어제 이카르와의 대화로 아르세니온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을지 모른다는 가정을 하긴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게 황자가 아닌 황녀였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나타니엘이 첫아이였을 수도 있다고……?

    “사실 첫째는 황자가 아니라 황녀였던 거지.”

    “유클리드.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단 거지? 쓸데없는 말로 날 현혹하려고 하지 말고 아까 네가 말한 얘기나 똑바로 말해.”

    “그 이야기의 연장선이야.”

    “…….”

    “제국에 내려왔던 마지막 신탁. 넌 들어 봤어?”

    “마지막…… 신탁?”

    “신탁은 인간과 이종족 모두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실제로 모두가 아는 게 맞아.”

    가뜩이나 황자가 살아 있다는 얘기에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 듣는 1제국의 비화는 노아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여 유클리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녀의 안전이 엮여 있을까, 노아는 그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근데 마지막 신탁은 아무도 몰랐단 말이지. 분명 신의 음성이 내려왔는데, 그 내용은 누구도 몰라.”

    “…….”

    “신탁이 내려왔는데, 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그때 즈음, 이종족은 2차 전쟁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을 무렵이었고, 인간들은 이미 신을 떠난 뒤였더라고.”

    즉, 아무도 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신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 밖에서 신은 음성을 내렸고, 그게 마지막 신탁이 되어 버린 거야. 그리고 내 생각은 그 음성이 폐하와 관련되어 있다고 봐. 그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추측은 두 가지야. 먼저, 폐하는 선황의 첫 번째 아이였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신탁이 그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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